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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일 뿐’이라는 말의 이중적 의미
news letter No.783 2023/6/20
한국종교연구회(한국종교문화연구소 전신) 시절에 종교학이론 분과, ‘개항기의 종교’ 분과, 북한종교연구 분과 그리고 신화 분과 등 총 4개의 분과 활동이 있었다. 이 가운데 박규태 선생님이 이끌었던 신화 분과는 1989년 8월에 출범하여 종교학의 주요 연구 주제였던 신화와 관련된 기본 서적을 강독하였다. 그때 함께 읽었던 책으로 미국의 민속학자 A. 던데스가 편집한 《성스러운 이야기: 신화이론 읽기》 (Alan Dundes, ed., Sacred Narrative: Reading in the Theory of Myth,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8)가 있다. 유독 이 책을 지금 떠올린 이유는 여기에 수록된 에세이들을 다시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라, 책 도입부에 등장하는 ‘신화일 뿐이야(It’s just myth)’라는 말 때문이다.
이 문장이 함축하는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이 말의 어투는 신화 개념의 부정적 표현이다. 신화는 인식 상의 오류가 있는 이야기, 황당무계한 이야기 그리고 거짓된 이야기라는 입장이다. 둘째, 이 말은 피상적으로는 신화 개념의 부정적 표현이지만, 그 용례를 살펴보면 ‘신화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자신이 지적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신화 만들기를 예고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굳이 단순화하여 구분하면 전자는 신화를 명사적으로, 후자는 신화를 동사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자주 인용되는 사례이지만 플라톤은 상대방의 불합리성이나 논거의 부족함을 지적하고 싶을 때 편리하면서 공인된 수단인 신화라는 말을 종종 사용했다. 마치 오늘날 신화라는 말을 자기 생각이나 신념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거나 자신의 무례를 감추기 위해 사용하는 것과 같다. 또한 플라톤은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의 작품들 그리고 유모들이 읊는 신화는 모두 거짓이라고 고발하면서 《파이돈(Phaedo)》, 《공화국(Republic)》에 나오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는 참된 신화이자 새로운 신화로 규정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신화학의 신화(myth of mythology)’를 말한 레비스트로스는 신화학자를 기존의 낡은 것을 재활용하여 새로운 신화를 만드는 브리콜뢰르(bricoleur)라고 지칭했는데, 플라톤이야말로 대표적인 신화 제작자가 아닐까 한다. 그가 인간을 타락하게 한다고 경멸한 거짓 신화와 자신이 만든 참된 신화를 오가며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했던 정황 역시 새로운 신화 만들기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근대의 신화학자들의 신화 해석 이론 역시 ‘잠재적 신화’1)이다. 특정 이론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연구자들이 논문 쓰기를 통해 반복과 변형을 이어가고, 이론적 호사가들이 그 이론을 추종하여 절대시하다 보면 이론은 신화가 된다. 신화 이론(theorizing about myth)이 반드시 이론화된 신화(theorizing myth)2)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학자들은 마치 네미(Nemi) 호수 옆 한 그루의 나무를 지키며 서성이는 사제(司祭)처럼 불철주야 경계의 고삐를 당기는 릴레이가 이어질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신화는 인간의 상상력으로 탄생하고, 반복과 변형을 거듭하다가 상상력에 의해 폐기되기 마련이다. 실재(reality)라는 대양의 기슭에 인간이 지식의 조류에 의해 끊임없이 씻겨 내려가는 이론의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이 새로운 신화가 지속적으로 대체되는 것은 신화학의 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수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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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개별작품들은 잠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지만 단지 전체적인 집단에 의해 채택될 때만 그것들이 신화적인 지위를 획득한다”라는 레비스트로스의 말에서 차용했다. Claude Lévi-Strauss, The Naked Man: Mythologiques, vol.4, trans. John & Doreen Weightman, Chicago: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p625-626. 이창익, 〈신화로 그리는 마음의 지도〉, 《종교문화비평》 20호, 2011, p.174에서 재인용.
2) ‘Theorizing about Myth’와 ‘Theorizing Myth’라는 용어는 각각 로버트 시걸과 브루스 링컨의 저서에서 차용했다. Robert A. Segal, Theorizing about Myth, University of Massachusetts Press, 1999; Bruce Lincoln, Theorizing myth, The University of Chicago, 1999.
하정현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1920-30년대 한국사회의 '신화'개념의 형성과 전개>, <근대 단군 담론에서 신화 개념의 형성과 파생문제>,〈신화와 신이, 그리고 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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