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사유의 방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사유하다

 

 news letter No.787 2023/7/18

 

 

 

 

지난 712일 밀란 쿤데라 별세의 소식을 들으며 초짜 강사 시절 강의실에서 그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화두처럼 들먹였던 젊은 날의 표박이 떠올려진다. 알 수 없는 혼돈에 사로잡혀 만성적인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은밀히 그걸 즐기기까지 했던 당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대로 내 안에서 참을 수밖에 없는 존재의 무거움과 거의 겹쳐져 있었다.

 

쿤데라는 에세이집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에서 인간을 안개 속으로 나아가는 자로 정의 내린다. 어둠이 아니라 안개이다. 어둠 속에서는 맹목이며 자유롭지 않지만, 안개 속에 있는 자는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누구든 자신이 걸어온 길 위의 안개를 보지 않는 자는 인간이 무엇인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망각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걸어온 길은 늘 어두운 안개속이었다. 자유를 갈구하는 만큼이나 자유롭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2021년 말 신설된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유의 방에 들어가려면 먼저 어두운 회랑을 지나게 되어 있다. 거기에 안개는 끼어 있지 않다. 어쩌면 사유야말로 안개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사유의 방에 거하는 자는 다시 자유를 꿈꿀 수 있을까?

사유의 방에는 6세기 후반과 7세기 전반에 제작된 우리나라의 국보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두 점이 나란히 상설 전시되어 있다. 국보78호 반가사유상(전시실 왼쪽)1912년 조선총독부가 일본인 골동품 수집가에게 구입한 것을 4년 뒤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입수했으며, 또 다른 국보83호 반가사유상(전시실 오른쪽)은 같은 해 이왕가(李王家) 박물관(현 덕수궁 미술관)이 일본인 고미술상에게 구입한 것이다. 이 두 점은 각각 1945년과 1969년에 국립박물관으로 귀속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중 국보83호 반가사유상과 아주 흡사한 것이 일본에도 있다. 교토 광륭사(廣隆寺, 고류지) 소장의 일본국보 제1호 목조 반가사유상이 그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1954년 이 반가사유상을 보고 다음과 같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 철학자로서 인간 존재의 최고로 완성된 모습을 표현한 여러 가지 모델을 접해보았다. 옛 그리스 신들의 조각도 보고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수많은 뛰어난 조각상도 보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완전히 초월하지 못한 지상적이고 인간적인 체취가 남아 있다.....그러나 이 반가사유상에는 완성된 인간 실존의 최고이념이 남김없이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지상의 시간적인 온갖 속박에서 벗어나 도달한 가장 청정하고 원만하며 영원한 모습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오늘날까지 수십 년간 철학자의 생애를 살아오면서 이처럼 인간 실존의 참으로 평화스러운 모습을 표현한 예술품을 본 적이 없다. 이 불상은 우리 인간이 지닌 마음의 영원한 평화를 남김없이 최고도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어떤 대상에 대한 찬사라기보다 우연한 순간에 우주적인 아름다움을 포착한 인간의 가장 순수한 감동에서 비롯된 자기고백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많은 일본인들은 이것을 일본에 대한 극찬으로 받아들였다. 이 목조 반가사유상은 금동 반가사유상의 모작이라는 설도 있고, 심지어 메이지시대에 일본인의 얼굴 모습으로 성형했다는 설까지 있다. 그럼에도 형태와 제작방식 및 재질 등을 감안하건대 한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양자는 삼산관 모양, 귀의 처리법, 손과 여러 가지 몸짓 등이 거의 똑같다. 게다가 초기 일본 불상들은 대개 몸체의 각 부분을 여러 개의 나무로 따로 만들어 조립하는 제작방식을 취한 데 비해, 목조 반가사유상만은 하나의 통나무로 불상 전체를 조각했다는 점에서 다소 이례적이다.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목조 반가사유상의 재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광륭사는 반가사유상의 존재로 인해 오래전부터 일본인들의 필수 견학지와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한 청년이 몰래 불상을 만지다가 그만 손가락 하나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이에 따라 복원을 위해 최첨단 기술을 이용하여 재질을 분석한 결과 한반도 동해안에 자생하는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진 것임이 밝혀졌다. 일본에서 만든 초기의 불상들은 모두 노송나무를 사용했는데, 광륭사 불상만 적송을 사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많은 연구자들은 그 불상이 한반도에서 건너왔거나 아니면 한반도 출신의 장인이 일본에서 제작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가령 일본서기및 광륭사 소장의 광륭사 연기(廣隆寺縁起), 광륭사 자재교체실록장(廣隆寺資財交替實錄帳), 광륭사 유래기(廣隆寺來由記)등의 관련 기사를 종합해 보자면, 하타씨(秦氏)의 수장 하타노 가와카쓰(秦河勝) 603년에 쇼토쿠 태자로부터 불상을 받아 가도노에 광륭사를 세웠다든가 또는 622년에 태자의 병환 치유를 기원하기 위해 광륭사를 건립하여 태자에게서 받은 신라의 미륵보살상을 안치했다고도 한다. 이때 특히 광륭사 유래기는 태자로부터 하사받은 불상에 대해 미륵보살상, 좌상 높이 28이라고 적고 있어 그 불상이 현재의 광륭사 반가사유상임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하타씨는 누구인가? 고대 일본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한반도계 씨족인 하타씨는 일본에 제철·주조·양잠·기직·토목·관개·농경 등의 신기술을 전파한 식산씨족이다. 그뿐만 아니라 하타씨는 경계의 신 및 예능의 신(宿神)으로서 오늘날에도 일본 전국에 분포하는 오사케(大酒)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져 있다. 하타씨는 견사로 표상되는 와 누에의 변신으로 상징되는 장수등의 현세이익을 가져다준다고 믿어진 주술적 씨족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타씨는 5세기경 나라분지 남서부에 도래하여 교토에는 5세기말 혹은 5세기 중엽 이후에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특히 교토 후시미구(伏見區)와 가도노군(葛野郡) 전역에 걸쳐 집중적으로 거주하면서 교토 지방을 개척한 선구적 집단이었다. 예컨대 현 가쓰라강(桂川)에 해당하는 가도노강(葛野川) 유역에는 예전에 가도노오이(葛野大堰)라는 제방이 있었다. 하타씨는 홍수가 빈번했던 가도노강에 당시 최첨단 토목기술로 둑을 쌓아 강기슭의 쓸모없는 방대한 땅을 모두 농경지로 개간한 주역이었던 것이다.

 

나아가 헤이안(平安, 교토의 옛 지명) 천도는 이와 같은 하타씨의 개척자적 면모를 정치사적으로 유감없이 보여준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속일본기는 헤이안 천도를 단행한 제50대 간무(桓武)천황의 백제왕은 짐의 외척이라는 언급을 전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간무천황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인 생모 다카노 니가사(高野新笠)의 아들이었던 만큼, 한반도계인 하타씨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리하여 헤이안 천도의 배경에 이 하타씨의 절대적인 재력과 인력 동원 및 기술 제공이 있었다는 설이 오래전부터 주장되었다.

 

쇼토쿠 태자의 최측근으로 광륭사의 건립자인 하타노 가와카쓰는 바로 이 하타씨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유명 정치인이자 교토의 가도노군을 본거지로 하는 하타씨 일족의 족장격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거대한 저택을 새로운 도읍의 왕궁 부지로 쓰도록 간무천황에게 희사했다. 하타씨의 이와 같은 이력은 광륭사 반가사유상을 둘러싼 다음과 같은 미국의 미술사가 존 카터 코벨 여사의 추정이 설득력 있음을 보여준다.

 

“쇼토쿠태자는 48세에 홍역으로 급서했다. 이때 태자의 최측근이었던 하타노 가와카쓰는 자신이 세운 광륭사에 태자를 기리려는 미륵보살상을 신라에 주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시일이 촉급했기 때문에 청동 대신 적송으로 만든 미륵보살상을 제작하여 623년 일본에 송달했다. 일본에는 적송을 써서 만든 조각이 없다. 원래 이 불상의 머리에는 삼산관 위에 청동 투조 보관이 씌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이 광륭사 불상의 모델이었을 법한 한국의 금동 반가사유상에서 미학자 조요한(趙要翰, 1926-2002)은 다음과 같이 한국인의 승화된 ()의 미소를 떠올린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어두운 안개의 모순을 승화시킨 반대의 일치에서 비롯된 미소일지도 모른다.

 

“반가사유상의 미소는 선과 악, 미와 추, 진과 위를 넘어서는 무아(無我)의 미소이다. 이는 인생의 의미를 내부로부터 심화시킨 한국인의 웃음을 표현한 것이다. 한국인이 한 많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그 한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이 미소에서 얻었을 법하다.”

 

여기서 무아의 미소모순의 무화를 뜻하지 않는다. 삭이고 또 승화시켜도 모순 자체는 언제나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무아의 미소는 유치환 시인이 목 놓아 터뜨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 / 내 여기 한 개 돌로 눈감고 앉았노니.”(석굴암 대불)라고 노래한 돌의 한과 같은 빛깔을 띠고 있다. 반가사유상의 미소에서 풍류의 극치를 읽어낸 고은 시인이 그럼에도 부끄러운 자화상을 끝내 인정하지 않은 것은, 모순이 승화되지 않은 채 인간 안에 어두운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리는 절반의 반대의 일치만을 보여줄 뿐이다. 반가사유상은 모순을 승화시킨 미소이기에 많은 이들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닐까?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의 소면와당(笑面瓦當)이나 경주 배리 삼존석불의 이른바 신라인의 미소와 서산 마애석불이나 국립부여박물관 소장의 백제 금동대향로 봉황이 보여주는 백제인의 미소가 우리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런 신비로운 미소를 자아내는 반가사유상의 눈과 입은 그 자체로 무언의 사유의 방이 된다. 그것은 너덜너덜해질 만큼 지쳐버린 우리의 분노와 좌절과 체념 일체를 조용히 끌어안은 채 한없는 정적의 위로를 던져준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인간과 세상에 대한 깊은 머릿속의 사색에 잠겨 있다면, 반가사유상의 사유는 그런 인간학적인 사색을 넘어 3의 눈을 통해 강 저편 신적 세계의 어디론가로 흘러가고 있다. 그곳에는 언제나처럼 물안개가 자욱할 것이다. 쿤데라는 과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그가 평생 꿈꾸었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까지 무덤 속에 끌어안고 갔을까? 이처럼 물음을 다시 물어야만 할 때마다 또 다른 사유의 방이 내 안에 생겨나기를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박규태_
한양대학교 교수
저서로 《현대일본의 순례문화》,《일본재발견》,《일본정신분석》,《일본 신사의 역사와 신앙》,《포스트-옴시대 일본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일본정신의 풍경》 등이 있고, 역서로 《일본문화사》,《국화와 칼》,《황금가지》,《세계종교사상사 3》 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