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뉴스 레터

784호-종교학의 가까운 미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3. 6. 27. 18:37

종교학의 가까운 미래

 

 

news letter No.784 2023/6/27

 

 

 

 

1984, 브루스 링컨은 미네소타 대학에 방문 교수로 와 있던 이탈리아인 종교학자 크리스티아노 그로타넬리와 한 편의 인상적인 공저 논문을 발표했다. 그것은 당시까지의 종교학 연구사를 비평적으로 조망한 후, 미래의 연구 방법을 전망하는 대단히 야심 찬 글이었다. 이 글이 학술지에 출판된 것은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뒤였으며, 단행본에 수록된 것은 다시 20년 후였다. 처음에는 종교학의 (미래) 연구에 대한 간략한 노트라는 소박한 제목이었던 글의 최근 판본에는 종교학의 미래라는 명료하고도 거창한 이름이 붙었다.1) 공저자 중의 한 명인 링컨의 나이를 기준으로 하면(그로타넬리는 2010년에 사망하였다.), 자신이 속한 분과학문의 장래에 대한 글을 30대에 처음으로 썼는데, 같은 글을 70세에 다시 출판한 시점에서도 그 미래는 아직 온전히 도래하지 않은 셈이다.

 

나는 이번 학기 대학원 강의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 글을 소개했다. 그것은 분명 모종의 자극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종교학도라면 훈련 과정에서 숱하게 듣는 말이 있다. “너의 연구는 종교학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학적인 자료나 연구 방법이 대체 어떤 것인지는 일반적으로 명확하게 제시되지는 않기 때문에 이 문장은 일종의 화두 또는 입문적인 시련이 된다. 분명 그 관문을 통과하는 일은 연구자의 문제의식,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맷집을 향상시키는 효과가 있지만,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곤란한 질문에 초학자들을 초대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로타넬리와 링컨의 문제의식은 이런 것들이다. 종교 연구는 왜 여전히 마르크스, 뒤르켐, 베버, 말리노프스키, 기어츠, 레비스트로스 등 고전 이론가들의 접근 방법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가? 왜 과거에는 그처럼 다양한 배경을 가진 연구자들이 종교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인가? 게다가 왜 종교 연구 방법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종교만을 전문적으로 전공한 학자를 찾기 어려운 것인가? 반면 20세기 중반 이후의 제도화된 종교학은 왜 종교를 부분적으로 다루는 다른 분야들과는 고립되어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설정된 목차는 종교학자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일련의 우주론적 시대 구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는 신화적 선조들(Mythic Ancestors)의 시대다. 저자들은 종교를 당시의 사회 및 경제 구조와 연관시켜 다룬 칼 마르크스, 종교적 차이와 사회적 갈등의 관계에 관심을 가진 프리드리히 엥겔스, 사회와 종교의 복잡한 상호 관계에 주목한 막스 베버, 사회 집단의 연대라는 측면에서 종교에 접근한 에밀 뒤르켐, 사회 내에서의 종교의 기능을 구체적으로 분석한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 등을 열거한다. 신화적 선조들은 종교를 광범위한 사회적 맥락에서 다루려 했고, 이용 가능한 자료의 한계 내에서 비교 방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했으며, 갈등과 역사적 과정에 주의를 기울였다.

 

두 번째 장의 제목은 타락(The Fall)”이다. 저자들은 신랄한 어조로 양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된 분과학문으로서 제도 내에 자리 잡은 종교학[history of religions, comparative religion, religious studies, Religionswissenschaft]에 대한 실망을 표명하고 있다. 이 분야는 과거의 비판적인 방법론적 유산을 계승하지 못했고, 그 결과 성과는 없고 고립된 채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화두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종교 연구가 학문적 독립성과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제도적인 기반을 마련해야 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종교의 고유성, 자율성, 환원 불가능성을 주장하며 학계와 사회 내에서의 정치적 지위를 확보해야 했다는 것이다. 저자들에 의하면 타락은 주로 후자, 종교의 자율성에 대한 주장에서 발생했다. 이 분야에 가담한 덜 비판적이고 더 신실한학자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루돌프 오토, 빌헬름 슈미트, 반 데르 레이우, 요하킴 바흐 등이 역사적 맥락이나 과정에서 벗어난 성스러운 것으로부터 종교의 고유한 본질을 찾는 일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이들 종교현상학자들이 비판성을 결여한 연구를 정당화하기 시작하면서, 종교학은 자율적 분과학문으로 자리 잡은 대신 많은 것을 잃었다. 그 가장 큰 해악은 종교학이 종교 현상의 환원을 거부하며 인접 학문들과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끊은 반면, 애초에 가장 거리를 두려고 했던 신학과는 은밀하고 왜곡된공모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은 자기들만 알아듣는 방언으로 종교에 대해 별 영양가 없는 소리만 해대는 종교학자들의 성과를 불신하거나, 무시하게 되었다.

 

저자들에 의하면, 종교학자들이 이렇게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는 동안 종교에 대한 확장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의미 있는 연구를 발전시킨 것은 역사학자와 인류학자들이었다. 20세기 중반 이후 인류학은 보다 역사적인 의식을 갖게 되면서, 한편 역사학은 보다 인류학적인 접근에 주목하게 되면서 종교 현상과 관련된 연구 대상과 이해를 풍부하게 하였다. 이 글의 마지막 장인 되찾은 낙원?(Paradise Regained?)”에서 제시하는 대안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한다. 종교는 고전적 연구자들, 그리고 오늘날의 역사학과 인류학이 그렇게 하듯이 문화적, 역사적, 사회적 실체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종교를 다루는 인류학자와 역사학자들은 맥락과 과정을 중시하는 고전 이론가들의 태도를 유지한 반면에, 비교 방법은 계승하지 않았다. 따라서 종교학의 미래는 종교 자료에 대해 그들 이상의 엄밀한 접근 방식을 취하는 한편, 엘리아데, 뒤메질 등에 의해 지속되어 온 비교 연구 방법을 보다 정교하게 발전시킬 때 비로소 도래하리라는 이야기이다.

 

이 도발적인 글에 대한 인용은 여기에서 그친다. 한국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종교학은 이 글에서 말하는 독립된 분과학문으로서의 제도화, 그 과정에서 나타난 고립과 위기, 돌파구의 모색이라는 과정을 훨씬 단기간에 겪었다. 독단론의 대안으로서의 비교 연구, 환원론의 대안으로서의 현상학적 접근은 한때 종교학의 중심적인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곧바로 유행한 해체주의적 사조들에 특히 취약했기 때문에 충분히 시도되기도 전에 상당 부분 포기되었다. ‘고립의 근거지가 될 제도적 기반조차 그리 견고하지 않다.

 

새로운 이론적 사조들을 적용하는 대안도 있으나, 전통적인 방법들을 급진화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만하다. 피상적인 비교 대신 전문화와 협업을 동반한 비교 연구, 본질주의적 현상학 대신 역사적 맥락을 고려한 패턴과 구조의 해석에 도전하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문헌과 현장이라는 연구 자료들에 지금까지 이상으로 치열하게 몰입하는 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학문적 세계체제의 중심부가 겪었던 위기를 주변부에서 더 압축적으로 경험했다면, 다가올 미래 또한 생각보다 가까울 것이다.

 

 

 

---------------------------------------------------------

1) Cristiano Grottanelli and Bruce Lincoln, “A Brief Note on (Future) Research in the History of Religions”, Method and Theory in the Study of Religion 10, 1998; Bruce Lincoln, “The Future of History of Religions”, Apples and Oranges: Explorations In, On, and With Comparis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8.

 

 

 

 

 

 

 

한승훈_
한국학중앙연구원
최근 논문으로 〈조선후기 반역자들의 의례〉, 〈현대 한국 종교에서의 순례지 조성을 둘러싼 갈등〉, 〈전근대 동북아 종교 범주로서의 교(敎)〉 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