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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가능한 연구소를 위하여
news letter No.922 2026/2/17
소장 취임 후 무엇보다 현재 연구소의 상황을 파악하는 일이 우선이라 생각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자료가 연구소 미래 비전과 지속 가능한 체제 구축을 위한 방안이 담긴 문건이었습니다. 이 문서는 이사회 운영위 차원에서 작성한 것으로 대략적인 내용은 작년 12월 9일 자 연구소 명의로 발송된 메일을 통해서도 표명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지속 가능성이란 문구를 보면서 긴장감이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창립 후 약 40년의 세월을 지나온 연구소가 지속 가능성을 걱정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속 가능성이란 위기의식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겠지요.
한국종교문화연구소는 종교학을 표방한 민간단체로서는 국내 유일의 조직입니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대학, 기업, 종교단체 등이 운영하는 연구소와 달리 어떠한 외부 지원 없이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한종연의 상황은 어쩌면 늘 지속 가능성의 위기의식을 마치 내 몸의 일부처럼 지니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듯싶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위기의식이 있어서 지금껏 어려운 고비를 넘겨왔다고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존은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과 실천을 통해서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이 담보되어야 가능한 일이라서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관대하고, 섬세하고, 부드럽고, 공감적인, 혹은 과감하고, 용감하고, 몸을 사리지 않는 손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연구소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연구소를 감싸고 도는 작금의 위기의식은 구성원들에게 새로운 각성을 촉구하는 경고의 울림이자 함께 힘을 모아 돌파구를 찾자는 참여의 몸짓이라 이해됩니다.
아시다시피 현재 연구소는 적지 않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연구소 창립 후 단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진행되는 월례포럼, 늘 종교학계에 새로운 의제를 던져주는 심포지엄, 연구소의 학문적 지향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종교문화비평》의 발간은 연구소의 정체성과 현주소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업입니다. 어쩌면 이것만으로도 연구소로서 충분한 역할과 기능을 다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연구소의 사명을 그렇게 규정하기에는 학문 공동체의 자의식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어떤 연구소든 설립 목적과 취지가 있습니다. 한종연의 설립 목적은 순수 인문학으로서 종교학을 심화 발전시켜 나가는 한편으로 연구소를 둘러싼 주변 환경과 긴밀하게 소통하는 일도 포함합니다. 전자가 학문 공동체를 지향한다면 후자는 학문 너머 관계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합니다.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매일매일 낯선 얼굴로 그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불현듯 다가서는 생생한 현실과 마주하는 일은 자칫 학문 공동체가 소홀하기 쉬운 난제입니다. 애당초 한종연은 이렇게 어려운 과제를 기꺼이 담당하기로 마음먹은 바 있고 그 사실은 연구소 정관이나 규칙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지속 가능한 연구소 구축 방안을 담은 문건의 내용을 이 자리에서 세부적으로 반복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꼼꼼히 읽어보신 분들도 계실 테고, 아직 공식적으로 확정되기까지 절차도 남아 있을 터이고, 좀 더 구체화하는 과정이 남아 있을 테니까요. 다만 몇 가지 눈에 들어왔던 부분을 추려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이 문건은 그동안 놀랍게 달라진 사회문화적 또는 학문적 환경의 변화를 거론하면서 연구소의 학문적 전문성을 한층 강화해야 하며 그 조건으로서 연구원의 주체성이 무엇보다 요청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연구소는 내 집이며 내 놀이터라는 소속감과 무엇이든 연구소 사업에 기꺼이 참여하겠다는 주인의식을 강조한 대목입니다.
또 한 가지, 연구소는 안과 밖을 구분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특별히 안에서 밖을 향한 관심과 역량을 지금보다 더 확대하자는 제안이 눈길을 끕니다. 그동안 연구소의 문제의식과 성과를 밖으로 확산하는 일이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연구원 각자가 지닌 학문적 관심사를 좀 더 친숙하고 대중적인 언어로 전달해 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뉴스레터 발행이 그런 사례겠지요. 하지만 해당 문건은 이 수준을 넘어서는 몇 가지 사업을 제안합니다. 모두 재정 자립을 향한 방안과 연계되어 있기도 합니다. 쉽지 않은 과제임이 분명합니다.
사실 이 문건에는 명시되지 않은, 이른바 침묵의 언어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 문서를 작성한 가장 큰 목적은 연구소 구성원들에게 관점의 전환을 요청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속 가능성이란 도달하려는 목표이기 이전에 하나의 관점이란 생각이 듭니다. 각자 나름의 연구 주제를 가지고 연구에 몰두하는 개별 연구 주체의 관점을 잠시 떠나서 지속 가능성을 하나의 관점으로 채택해서 연구소를 바라보면 무엇이 보일까요. 솔직히 연구자로서 연구소 없이도 연구의 길을 걸어 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열려 있습니다. 지속 가능성을 함께 고민할 필요도 없겠고요. 왜 연구소일까요. 결국 원점으로 돌아온 느낌입니다. 지금까지 소장 취임 후 몇 가지 고민의 흔적을 적어보았습니다. 지루하셨다면 부디 용서를 구합니다.
설입니다. 지금도 이날을 새해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해서 이번 기회에 저도 댁내 평안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소장 임현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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