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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의 주술과 음모론
news letter No.924 2026/3/3

지난 주말 장장 일곱 시간 반 동안 진행된 <부정선거, 음모론인가> 끝장토론을 보느라 머리에 쥐가 날 뻔했다. 내용이 복잡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공허할 만큼 텅텅 비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아니면 분노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의 찌끼들이 역류성 식도염처럼 솟구쳐 올라 내 머릿속을 온통 할퀴고 지나갔기 때문이었을까. 애당초 무얼 기대하고 본 것은 아니었지만 시청 동기는 분명했다. 그것은 “인간이 과연 주술적 사고로부터 충분히 자유로운 사유와 행동을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과 관계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프레이저는 『황금가지』에서 두 가지 주술 모델과 함께 두 가지 법칙을 제시했다. 모방[동종]주술의 ‘유사의 법칙’과 접촉[감염]주술의 ‘접촉의 법칙’이 그것이다. “유사는 유사를 낳는다”는 닮음의 원리와 “한번 접촉한 것은 그 후에도 서로 상호작용을 한다”는 닿음의 원리에 기반한 인과 조작이 현실 속에서 어떤 효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프레이저는 이런 주술을 잘못된 관념연합으로 규정하면서, 주술의 실패가 종교로의 진화를 촉진했고 결국 과학이 발달하면 주술도 종교도 사라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하지만 지금도 주술과 종교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양자는 상이한 범주이지만, 종교를 주술의 변형된 형태로 보거나 혹은 주술을 종교의 한 부분집합으로 볼만한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주술적 사고 대신 주술종교적 사고를 말하고 싶다. 여기서 ‘주술종교적’이란 비합리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상징을 통해 현실을 직접 조작할 수 있다고 믿는 상징적 사고 구조를 가리킨다.
종교학은 통상 종교를 상징체계로 본다. 그렇다면 주술은 어떨까?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와 주술을 비합리적인 미신이 아니라 언어와 같은 상징체계로 이해했다.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은 더욱 분명하게 주술의 상징적 측면을 도식화했다. 그는 프레이저의 주술 모델에서 은유와 환유라는 언어 모델을 추출해냈다. [모방주술=유사의 법칙=대체=은유]와 [접촉주술=접촉의 법칙=연결=환유]라는 도식이 그것이다. 이런 발상에 따르면 주술은 상징작용의 극단적 형태가 된다.
라캉은 이런 도식을 무의식의 차원으로 확장시켰다. 그에 의하면 은유는 상징계에서 욕망을 구조화하는 상징적 대체 장치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억압과 동일한 구조를 가진다. 이를테면 언어로 대표되는 상징계의 법(규칙, 사회질서)은 욕망을 제한하고 억압하는데, 이로써 한 기표가 다른 기표를 대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가령 라캉이 강조한 ‘아버지’ 또는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은유는 욕망을 억압하는 상징적 법과 금지의 기표를 가리킨다.
한편 환유는 욕망이 끝없이 이동하는 연결운동을 가리킨다. “욕망은 환유적이다!”라는 라캉의 명제는 유명하다. 이는 우리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며,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진짜 욕망하는 것을 결코 얻지 못한 채 그것과 닮았거나 혹은 연결되어 있는 다른 것들로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는 뜻이다. 라캉은 이것을 “하나의 기표(욕망의 대상)에서 다른 기표로 끊임없이 미끄러진다.”고 표현한다. 이때 그는 ‘자신이 진짜 욕망하는 것’을 ‘대상a’라고 불렀다. 그것은 욕망의 대상이자 동시에 욕망의 원인이기도 하다.
결국, 주술을 라캉식으로 풀이하자면, 이런 은유와 환유의 상징적 조작이 실재계에서 직접 효력을 가진다고 믿는 사고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되풀이 말하거니와, 프레이저는 주술을 관념연합적 조작이 현실에 실제 효력을 가진다고 믿는 사고방식으로 간주했다. 그가 말한 주술적 인간으로서의 원시인은 주술을 통해 세계를 직접적으로 경험한다. 이에 비해 현대인은 상징계를 통해 세계를 ‘매개적으로’ 경험한다. 그러나 실재계에서는 상징적 기표의 작용이 ‘직접’ 작동한다. 이는 무의식이 여전히 주술적 구조를 지님을 시사한다.
이번에는 오늘날 인지종교학에서 종교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생각해 보자. 대표적으로 파스칼 보이어(Pascal Boyer)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본질적으로 편향적이다. 인간에게는 이른바 ‘보이지 않는 행위자(invisible agents)’를 민감하고 과도하게, 그것도 매우 손쉽게 추론하는 인지적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무언가 이상한 생각이 드는 상황 앞에서 인간은 의도와 목적을 가진 존재가 있다고 먼저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특정 사건의 원인을 ‘의도를 가진 존재’로 추론하고 더 나아가 그런 존재의 마음과 의도와 감정까지 상상하려 든다. 이와 같은 인지적 메커니즘은 정령이나 신 또는 악마 등과 같은 불가시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낳기 십상이다. 이런 인지적 경향이 생존과 관련된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인지종교학적 종교 이해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종교는 잘못된 사고체계가 아니라 인간 두뇌의 정상적인 작동 결과이며, 신 관념은 인지적 오류라기보다 인지적 과잉 작동의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교는 단순한 문화적 산물이 아니라 인간 보편의 인지구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말이다.
이상의 주술과 종교 이해를 염두에 두면서, 현대사회에서의 주술종교적 사고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는 비단 불가시적인 신에게 기도 응답을 기대하는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스포츠, 과학 등 여러 영역에서 그 조짐을 엿볼 수 있다. 가령 선거에서 특정 색상이나 상징을 반복 사용하여 정치적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선전하면 선거전을 유리하게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주식시장에는 징크스가 따라다니며, 투자자들은 종종 보이지 않는 시장 심리에 좌우되거나 또는 특정 숫자라든가 날짜에 집착하기도 한다. 또한, 스포츠의 경우라면, 선수들의 루틴 의식이라든가 팬덤의 반복적인 응원 의례 또는 굿즈 소유가 연결을 만든다는 감각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런 것들은 대개 A를 하면 B라는 유사한 결과가 생기거나 A와의 연속성이 유지된다는 유사의 법칙 및 접촉의 법칙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현대과학의 최첨단 기술이라 할 만한 인터넷과 AI는 어떨까? 사실 네트워크 접속 자체부터가 주술종교적 구조를 내포하고 있다. 사람들은 같은 네트워크 안에 있으면 물리적 접촉이 없더라도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것으로 느끼며, SNS에서의 ‘좋아요’, ‘리트윗’, ‘팔로우’ 등도 물리적 접촉이 아니지만 상징적 접촉을 통해 감정적 동일체 감각을 촉진한다. 이는 접촉 법칙의 디지털적 변형 양태가 아닐까?
무엇보다 가장 주목할 것은 알고리즘이다. AI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알고리즘으로 마치 ‘의도’를 가진 것처럼 반응하고 ‘판단’을 하는 것처럼 말하며, 나아가 마치 ‘감시’하고 있는 것처럼 작동한다.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인지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이런 알고리즘을 자연스럽게 하나의 ‘보이지 않는 행위자’로 받아들인다. 이는 종래 인간이 특정한 신적 존재를 ‘보이지 않는 행위자’로 인지해 온 고전적인 종교적 사고와 놀랄 정도로 유사하다.
프레이저는 주술과 종교를 과학이 대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오늘날 과학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일반인은 이해할 수 없고(마치 중세 유럽인들이 사제 말고는 라틴어 성서를 이해할 수 없었듯이), 내부 작동은 갈수록 불투명해지며 다만 결과만 경험될 뿐이다. 이때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기술은 다시금 이렇게 하면 현실에 이런 변형이 초래된다는 주술종교적 체험이 되기 십상이다. 주술종교의 핵심은 “과정이 불투명한 상태에서 결과가 나온다”는 구조에 있다. 가령 가뭄 때 지붕 위에 올라가 물을 뿌리거나 기우제를 올려 기도하면 비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실제로는 비가 내릴 때까지 물을 뿌리거나 기도하는 것이겠지만, 사람들은 어떤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 마찬가지로 접속하고 클릭하면 결과가 나오는데, 그 과정에 대해 우리는 깜깜이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이리하여 데이터와 알고리즘과 AI는 갈수록 객관적이고 초월적인 힘으로 신성화되어 갈 것이다. 이런 디지털 주술종교의 출현은 이미 예고편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데이터가 이렇게 말해주고 AI가 저렇게 판단했다며 그 권위를 주장한다. 프레이저식으로 보면 알고리즘이야말로 현대의 ‘보이지 않는 힘’이고 그 결과는 마치 ‘객관적 운명’처럼 수용된다. 막스 베버는 탈주술화(Entzauberung)를 말했지만, AI는 세계를 다시 재주술화(Re- enchantment)하는 듯이 보인다. 이런 AI 시대의 주술종교적 사고는 이미 프레이저가 말한 저 단순한 주술과 종교에 토대를 두고 있지 않다.
프레이저의 주술과 종교를 현대의 AI 시대에 맞추어 바꾸어 말한다면, “주술종교는 비합리적 사고의 잔재가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인지체계가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상징=인과적 연결방식”으로 규정될 만하다. 특히 AI 알고리즘 환경에서는 패턴 인식이 과잉 강화되고, 상징 반복이 자동화되며, 집단적 인지 편향성이 증폭된다. 이와 더불어 주술종교적 사고도 기술적으로 확장되기 마련이다. 이 점을 온라인 커뮤니티 응집도가 매우 높아서 빠른 감정적 동조와 상징성 증폭 및 진영논리에 따른 강력한 집단주의적 정체성 정치가 만연해 있는 한국사회의 음모론에 비추어 확인해 보자.
첫째, 무엇보다 AI 알고리즘은 기술적으로 유사한 콘텐츠를 반복적으로 증폭한다. 그 결과 작은 상징적 유사성을 거대한 음모 구조로 확장시키며, 사소한 것이라도 그 데이터 패턴을 찾아내어 증폭시켜 마치 운명적 증거처럼 과잉 인식하게 만들 수가 있다. 예컨대 음모론자들은 흔히 우연한 사건들을 나열하여 거기서 모종의 상징적 유사성을 찾아내는 데에 매우 예민하다. 그들은 특히 날짜나 숫자 등의 상징적 연결성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그리하여 부분적인 통계자료와 그래프 및 확률 또는 여론조사 데이터의 일부분을 마치 운명적 사실인 것처럼 부풀려 인식하며, 이를 근거 삼아 배후에 거대한 조종 세력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가령 끝장토론의 부정선거론자들은 부분적으로 세밀한 통계 도표들과 함께 몇몇 소소한 오류의 사례들을 결정적 증거로 제시하면서, 지난 모든 선거 때마다 투표(사전투표와 당일투표), 개표, 재검표 등의 모든 과정에 걸쳐 총체적인 삼중 부정선거가 있었고, 나아가 그 배후에 모종의 설계와 음모 및 이를 뒷받침하는 거대한 연결 네트워크 즉 카르텔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작은 유사성들을 모아 ‘의도된 인과’로 확장시키는 패턴의 과잉 인식은 다름 아닌 유사 법칙의 과잉 작동이자 자동화라 할 수 있다. 또한, 누군가 거대한 배후 세력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인식은 접촉 법칙의 과잉 작동으로 주술종교적 세계관의 ‘보이지 않는 힘’을 연상시킨다.
둘째, 심정적으로 AI 알고리즘과 결탁한 음모론 담론에서는 종종 상징적 연결이 도덕적 동일성으로 해석되곤 한다. 이때 음모론자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도덕과 정의의 순수한 체현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한,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설령 같은 이념 집단에 속해 있다 해도 오염된 배신자라고 단죄한다. 그런 배신자는 적으로 치부되며 적과 접촉하면 공동체 전체가 오염된다고 믿는다. 가령 끝장토론의 부정선거론자들은 카르텔이 대통령을 비롯해서 법무부장관과 대법원장, 검찰과 사법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명언했다. 또한, 구체적 실행자인 오인방까지 실명 거론했는데, 그중에는 크게 볼 때 음모론자들과 같은 진영에 속한다고 여겨져 온 인물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이 카르텔에는 중국도 들어가 있다. 아마도 중국을 오염된 외부 적의 대표자로 간주하는 모양이다. 이처럼 순수성과 오염이 같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담론 구조는 접촉 법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셋째, AI 시대의 음모론자들은 복잡한 세계를 단일한 증거, 단일한 원인, 단일한 의도, 단일한 해결책 등으로 지극히 단순화시켜 제시하기를 좋아한다. 가령 끝장토론의 후반부에서 부정선거론자들이 의기양양하게 비장의 무기처럼 꺼내든 증거 자료는, 선관위 서버 비밀번호와 중국공산당 통치시스템 민원해결 번호와 민주당 영재영입 비상령 캠페인 번호가 모두 12345임을 보여주는 도표였다.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단순화가 현실 속에서 먹혀들어 갈 수 있는 까닭은 인지종교학에서 말하는 ‘보이지 않는 행위자’ 추론의 경향과 닮아있다. 안타깝게도 인간의 실수라든가 시스템의 오류 가능성보다는 “누군가 의도와 목적을 가진 자가 조작했다.”는 설명이 사람들에게 심리적으로 더 안정감을 줄 수 있는가 보다.
극우적 음모론은 대개 경제적 불안, 문화적 상실감, 정체성 위기 등의 조건에서 독버섯처럼 피어난다. 거기에 기생하는 주술종교적 사고의 발현은 불안과 통제 상실에 대한 상징적 보상체계라는 측면을 내포한다. 물론 상징 조작이 지나치게 현실 판단을 압도할 경우는 종종 망상적인 데로 빠지기 십상일 것이다. 음모론 담론들은 대개 좌우를 가리지 않으며, 앞뒤도 위아래도 없다. 단지 고도로 단순화된 이념이나 신념만이 오직 일방향으로 질주할 뿐이다. 거기에는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이 끼어들 틈조차 없다(실은 나 자신도 종종 이런 틈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그리하여 끝장토론은 결국 끝장을 보지 못했다. 쌍방 모두 마치 열광적인 종교신자처럼 그렇게 절대적인 확신에 찬 제국의 신민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것이 있고 그것이 내 안에 증오의 뿌리를 깊이 내려 어쩌면 스스로 망가질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할 때, 나는 어찌해야 하나? 스스로 납득할 만한 어떤 설명거리라도 만들어내야 하지 않을까? 예컨대 일부 맹신이나 망신(妄信) 혹은 광신으로 치닫는 경우를 차치한다면, 보통의 종교인들이 신에게 헌신하는 것을 반드시 비이성적이거나 비합리적인 것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특정 제국의 신민인 동시에 상식적인 생활의 영역에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인지종교학이 내게 가르쳐준 삶의 지혜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일부 폭력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일반적인 음모론자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될 이유란 없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음모론의 디자인 표상은 유난히 눈(目) 이미지가 두드러진다. 왜 그럴까? 음모론자들이 (거짓) 진실을 보는 제3의 눈을 선호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안목의 결여에 대한 풍자일까? 어떤 경우든 혜안(慧眼)이 요청됨은 말할 나위 없다.
박규태_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저서로 《한과 모노노아와레: 한일 미의식 산책》,《현대일본의 순례문화》,《일본재발견》,《일본정신분석》,《일본 신사의 역사와 신앙》,《포스트-옴시대 일본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일본정신의 풍경》 등이 있고, 역서로 《일본문화사》,《국화와 칼》,《황금가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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