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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만남: 김교신과 한센병 환자

 

 

news letter No.923 2026/2/24

 


1936년 8월 15일, 소록도 중앙리에서 생활하는 한 한센병 환자가 김교신에게 보내는 서신을 썼다. 서신에는 조만간 소록도 한센인이 그를 방문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방문자의 이름은 윤건석, 나이는 스물한 살. 1935년 1월에 병을 얻고 3월에 소록도갱생원에 입원했다. 소록도의 한센인 기독교 신자와 접하면서 “그리스도의 구원과 사랑을 깨닫고 겨우 마음을 수습하여 학원에 가서 어린 불운아들을 가르쳐”왔다고 한다. 서신에 따르면, 윤건석은 《성서조선》의 애독자이자 ‘맹우회(盲友會) 성서 공부회’에 출석하는 유일한 경병자(輕病者)였다. 서신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윤건석은 그 모임에서 한센병으로 시력을 상실한 동환(同患)들에게 《성서》나 《성서조선》과 같은 책자들을 읽어주었을 것이다. 서신에는 윤건석에 대한 안타까움도 담겨 있었다.

아직도 가슴에 깊이 박혔던 슬픔이 완전히 가시지 못한 듯하며 인간적인 희망을 빼앗긴 소년의 번민과 고통에 때때로 괴로움을 받는 듯하나, 그리스도의 주시는 평안으로 과거의 모든 그림자 같은 본능을 소각시키려 노력하는 안타까운 형제외다.

 
9월 7일 윤건석은 김교신을 만났다. 그날 일기에 김교신은 다음과 같이 썼다. “오래 기다리던 소록도 친구가 내방하다.” 이날 만남에서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는 상세하지 않지만, 김교신은 일기에 소록도의 배급 상황, 《성서조선》 지우(誌友)들의 소식, 교회 유래, 결혼 문제—당시 단종수술(斷種手術)을 전제한 부부동거의 허용을 둘러싸고 한센인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다—등을 전해 들었다고 썼다.

그러나 “과거의 모든 그림자와 같은 본능”을 떨치기엔 너무 젊었던 것일까, 윤건석은 김교신을 만나고 나서 곧바로 소록도로 돌아가지 않았다.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가 김교신에게 보낸 11월 6일 자 서신에 따르면, 윤건석은 자신이 비장한 각오로 계획한 일이 수포로 돌아가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했을 정도로 좌절과 고통에 빠져 어느 지방에 머물고 있었다. 윤건석은 직접 12월 20일에 쓴 서신을 김교신에게 보내면서 자신이 부산에 머물고 있으며 그간 소식을 전하지 못한 점에 용서를 구했다.

당시 소록도교회에서 김교신과 그의 《성서조선》은 존경과 애정의 대상이었다. 김교신은 《성서조선》을 포함해서 여러 책자를 소록도교회에 보냈고, 특히 성탄절을 앞두고는 후원금을 모아 찬송가, 성경책, 연필, 축구공, 가방 등 다양한 성탄선물을 소록도교회에 보내곤 했다. 한센병 환자들 중에는 《성서조선》에서 여러 지식, 세상과의 연결됨, 위로와 용기, 신앙적 각성을 얻은 자들이 많았고, 그만큼 그들은 김교신을 만나보기를 소망했다. 심지어 만날 수 없다면, 그의 사진이라도 보내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소록도의 한센인 신자들은 그를 그리워했다. 그들에게 김교신은 자신들을 위로하고 지지하는 친구이자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진실한 경청자(敬聽者)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에 병원당국은 한센병 환자 중에서 감염력이 적다고 판단되는 경증 환자에게 조건을 달아 제한적으로 귀성을 허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경증자라고 해도 한센병 환자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면서 육지로 이동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어려운 여정 끝에 말과 글로만 알던 김교신을 만났으니 청년 윤건석에게는 매우 가슴 벅찬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후 윤건석은 서신을 통해 김교신에 대한 감정을 이렇게 전했다.

잊혀지지 않는 선생님, 강한 바람은 몹시 불고 백설이 분분하여 우리 형제자매의 보드라운 혈육을 에이는 이때 설한(雪寒)에 어젯밤의 꿈조차 애정이 다대(多大)하신 선생님을 만나 뵈어 희락이 넘친 기쁨은 이 붓으로는 다 형언할 수 없나이다.......소록도 도중(島中)에 고적을 느끼는 형자들에게 진정 동정하시는 선생님의 애심(愛心)은 생의 일생을 통하여 잊혀지지 않는 느낌이외다.

김교신의 일기에 나오는 그에 관한 단편적인 내용으로는 김교신을 만난 직후에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왜 그가 고통과 좌절에 빠지게 되었고 소록도 동환(同患)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소록도로 복귀하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다. 1936년 12월 29일 우편소인이 찍힌 소록도 한센인의 서신에 의하면, 윤건석은 평안북도 강계의 만포진(滿浦鎭)으로 갔다. 한반도 남단에 머물다가 중국과 맞닿은 북쪽 접경지역에는 왜 갔던 것일까? 《성서조선》에는 더 이상 윤건석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한센병에 걸린 청년 윤건석의 이야기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성서조선》의 글들에 파묻혀 있는 한 조각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스치듯 소개되는 그에 관한 이야기에서 소록도 한센인을 둘러싼 정동(affect)을 느낄 수가 있다. 절망과 희망, 미움과 용서, 기대와 실망, 슬픔과 기쁨, 고독과 의존감, 상실과 위로 등이 뒤섞이며 이루는 감정의 물결로 관계된 자들을 안으로 끌어당긴다. 윤건석은 자신의 사정과 행로를 소록도에 있는 신앙의 선배에게 계속 알리면서 여러 지역을 이동했다. 그는 소록도 동환을 자신의 가족처럼 의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건석과 연락을 이어가던 소록도 한센인은 김교신에게 서신을 보내, 윤건석에게 동정과 관용을 베풀고 자신에게 향한 사랑보다 더 많은 사랑으로 그를 아껴줄 것을 김교신에게 간청했다. 한편, 서신을 통해 윤건석의 서울 집 주소와 맏형의 이름을 김교신에게 알린 것으로 보아, 김교신은 윤건석에 관한 일로 소록도 한센인에게 정보를 얻으며 어떤 조치를 취했거나 취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성서조선》의 윤건석에 관한 이야기에서 소록도로 복귀하지 못한 채 여러 곳을 떠도는 윤건석의 마음과 그의 안녕을 걱정하며 그를 위해 뭔가를 “행하는” 소록도 한센인과 김교신의 마음을 조금은 감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기 실속만 차리는 세상에서 남의 어려움을 돌아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소록도의 엄혹한 환경에서 섬을 벗어난 젊은 한센인의 안녕을 걱정하며 그를 위해 애달아하는 또 다른 한센인의 마음은 어디에서 생겨났던 것일까. 어려움에 처한 한센인을 모른 척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만큼 한센인에 대한 차별과 핍박이 당연시되던 시기에 단 한 번 만났을 뿐인 한센인 청년에게 김교신은 왜 그리 오랫동안 마음을 두었던 것일까? 어떤 만남은 오래 계속되어도 안에서 서서히 사그라지는데, 어떤 만남은 한 번으로도 영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들이 지닌 마음은 어떤 결들로 이루어졌고, 그런 마음이 낳는 세상은 어떤 것인지, 경외의 마음으로 상상해 본다.

 

 

 

 

 

박상언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논문으로 <소록도 한센인의 사회적 공간 구성과 종교적 헤게모니>, <소록도 한센인의 고통서사와 종교의 자리>, <다른 몸들과의 불안한 연결: 종교의 장애인식과 한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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