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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종교문화연구소의 2026년 봄, 서울 종교문화답사기

 

 

news letter No.928 2026/3/31

 

2026년 3월 14일 토요일, 날씨는 흐렸다. 오전 10시에 정동제일교회에서 만나 답사를 시작하기로 했는데, 10시 3분 정도에야 도착했다. 정동교회는 1885년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감리교회이다. 이미 모인 인원들이 이욱 선생의 인솔하에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다. 전체 인원은 16명 정도였다. 정문에서는 설립자인 아펜젤러 목사 동상과 최병헌 목사 동상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바로 교회 역사기념관과 벧엘예배당을 견학하였다. 안내하시는 분이 예배당은 1897년에 지은 건물로, 일제강점기 전쟁 중에도 공출되지 않은 교회종이 간직되어 있다고 하였다. 종을 가져가려면 교회를 부숴야 했기에 가져갈 수 없었다고 한다. 기념관에는 역대 교회 목사, 아펜젤러의 일기, 역대 발간 교회사 도서 등을 비롯하여 유관순 열사 등 애국지사 관련 기록이나 의료, 교육 활동 등에 대한 사진과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당시는 남녀칠세부동석이 엄격하게 지켜지는 시기여서 예배당에서도 남녀 사이에 휘장이 있었는데, 손정도 목사가 이를 제거하게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여성이 남성이 다니는 병원을 불편해 했기에 별도의 여성병원을 지었다고도 하였다. 현재도 한국은 남녀유별에서 자유롭지 않은 편이다. 1970년대에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3학년까지는 여학생과 같은 반 같은 줄 옆자리에 앉았지만 4학년 때는 가운데 줄만 같이 앉게 하였으며, 5학년부터는 남녀학생의 반을 달리했다. 이후로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여학생과 학교를 달리하여 다녔다. 현재는 학령 인구 감소와 유교적 인식의 쇠퇴로 중고등학교도 남녀공학이 늘고 있는 추세라지만, 2025년 남녀공학 고등학교의 비율은 66%로, 아직도 30% 넘는 학교가 단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벧엘예배당은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뜻깊은 유물이 많았는데, 제단 전면에 세운 파이프오르간이 인상적이었다. 대개 성당에서나 볼 수 있는 파이프오르간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측면이나 뒷면에 있지 않고 전면에 있는 것도 특이해 보였다. 김란사(金蘭史) 선생의 노력과 모금을 통해 1918년에 마련한 것이며, 6.25전쟁으로 파괴되었으나 후대에 다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김란사 선생은 한동안 하란사로 불려졌었는데, 이는 미국에 갈 때 남편 성 하씨를 따른 것으로 후대에야 본래 성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결혼하면 아내가 남편 성을 따르는 관습 역시 로마 시대 이후 내려오는 남존여비의 습관이라 하는데 현재에도 미국에서 80% 가까이 이 관습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11시에 우리는 배재학교 기념관에 들렀다. 역시 아펜젤러가 세운 근대학교였다. 1887년 고종에게 받은 ‘培材學堂(배재학당)’ 사액현판이 눈에 띄었다. 명문 서원에나 하사하는 사액을 내려준 것을 볼 때 그만한 교육기관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기념관 앞 아펜젤러 공원에는 사색에 잠긴 듯 한 아펜젤러의 훤칠한 금빛 동상이 있었다. 마침 날이 개어서 햇빛을 받으니 더욱 빛나 보였다. 아펜젤러는 선박사고로 45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서울의 한복판에서 찬란히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소문 순교성지로 가는 길에 수렛골 기념판을 마주할 수 있었다. 표지석에는 숙박시설이 많아 수레들이 많았기에 우리말로 수렛골 한자로 차동(車洞)으로 불렸다고 하고 숙종비 인현왕후의 고향이기에 영조가 추모비를 세우고 추모동이라 명명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다. 서소문이 순교성지가 된 것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죄인을 효수(梟首)하는 관습 때문이었고, 수렛골은 사람을 태우는 수레가 많이 모이는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니, 두 곳의 의미는 다르지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이 각각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 장소를 추모의 장소로 기리는 영조의 마음과 순교지를 찾는 우리의 마음도 같은 듯 다른 것이니, 서소문 순교성지는 터전 자체가 혈지(穴地)라는 생각이 들었다.

 

 

11시 27분에 서소문 순교성지에 도착했다. 입구 기념탑은 세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양쪽 기둥에는 각각

 순교성인과 순교복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가운데는 순교를 상징하는 부조와 “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같이 간 동료가 동학교도도 많이 처형된 곳이라고 설명해 주었고 바닥에는 “조선시대 국가 처형터인 이 땅은 천주교신자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생명을 잃은 곳입니다. 모든 영혼에게 평안한 안식을 청합니다”라는 동판이 새겨져 있었다. 국가처형터였으니 천주교 순교자뿐 아나리 동학교도 그리고 다른 범죄자도 처형되었을 텐데 순교성지로 명명하는 것이 적절한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왜 기념탑 가운데에 ‘의로움에 목마른 사람’이라고 한정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더 들어가면 노숙자 예수 조각상을 마주할 수 있었는데 못자국 있는 발에 누군가 덮어준 패딩이 인상적이었다. 패딩을 걷으니 깊이 패인 못자국이 있는 발이 나타났다. 바로 예수임을 알 수 있었다. 노숙자 예수 조각상은 발 외에는 온몸을 천 같은 것으로 감싸고 있어서 발의 못자국만이 예수임을 알게 하는 표식이었다. 발의 못자국을 예수의 정체로 삼은 발상도 대단하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예수의 고통을 직관하게 함으로써 한동안 가슴이 먹먹하게 하였다.

서소문 순교성지 기념관은 역사기념관보다는 작품전시관 같은 느낌이었다. 건축에서 조각작품까지 다양하게 공간을 장악하고 있었다. 지하 3층 역사적 전시물에는 당시 국가이념인 성리학 이론서인 이황의 『주자서절요』와 교학서인 『삼강행실도』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 성리학에 위협이 되는 서학을 탄압한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거의 고문서와 서적 위주여서 적극적으로 해설판을 읽고 전시물을 음미하지 않으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있었다. 순교자들의 이름과 내역을 역사적 순서대로 정리한 전시에서 조선이 국가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한 역사적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지만, 순교자들이 왜 순교를 하면서까지 천주교를 버리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는 전시였다. 노숙자 예수 발의 못자국처럼 역사 너머의 공감을 얻기는 어려울 듯했다.

 

점심식사 후 오후 1시 20분에는 약현성당에 들렀다. 순교성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워진 약현성당은 1892년에 지어진 현존하는 최초 서양식 교회건축물이다. 성당 한쪽에는 봄을 알리는 홍매화가 피어있었고, 성당 안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 결혼 게시판에는 정하상바오로라는 세레명이 게시되어 있었다. 순교성지 기념관에서 성 정하상바오로는 정약종의 아들로 순교한 정하상의 이름과 세례명 바오로를 합친 이름으로 1984년 성인의 시호를 받게 되었다고 소개되어 있었다. 동양에서는 존경하는 사람의 이름을 회피하는 것을 예의로 삼았다. 그러기에 조선 역대 왕의 이름은 매우 희귀한 한자로 작명하였다. 자주 쓰는 글자인 경우 당대 문인들의 작문에 제약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오히려 인명 사용을 존경의 뜻으로 여겼다. 달걀의 뾰족한 쪽을 깨서 먹는 거나 뭉툭한 쪽을 깨서 먹는 것처럼 어느 쪽이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직 나로서는 세례를 받더라도 정하상바오로를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약현성당을 나와 언덕길을 올라 도착한 충정로역 사거리에는 충정공 민영환의 동상과 기념 부조가 설치되어 있었다.

 군부대신 사진도 있었는데 여기에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 민영환은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여하기 위해 일본, 미국, 유럽 등을 다니게 되었다. 이때 견학한 유럽 열강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을 신장하게 해야 한다는 개혁안을 고종에게 건의하였으나 군사제도만을 개편하는 데 그치게 된다. 이 해 광무개혁으로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군부대신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민권이 신장된 정치제도를 수용한 민주국가가 아니었고, 자신의 힘으로 변신하지 못한 나라는 결국 열강에 의해 찬탈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고종을 설득하지 못한 민영환은 1905년 나라의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을사늑약의 책임을 느끼고 자결을 선택하게 된다. 민영환은 죽었지만 그의 시호인 충정(忠正)은 지금도 충정로라는 거리 이름으로 살아 있다.

오후 2시 충정로역 사거리에서 본 약현성결교회는 노아의 방주 형태였다. 우리는 방주 아래 지하커피숍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에 정교회 성 니콜라스 대성당을 찾았다. 니콜라스 대성당은 아치형 돔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안내된 곳은 식당이었는데 천장이 일부 수리하는 곳도 있어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우리를 맞이한 정교회 사제는 검은 사제복에 수염을 기르고 있어 한국인이지만 이국적 모습이었다. 차를 대접하기 위해 식당으로 안내한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를 만난 사제의 첫마디는 한국 대중 언론에 공표되는 정교회 기사는 대부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정교회에 대해 왜곡된 정보를 알리는 언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엿볼 수 있었다.

 

정교회 사제로부터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카타콤을 모방한 지하 예배실과 니콜라스의 신체를 모신 대성당에서 듣는 사제의 구체적인 설명과 행위는 우리에게 마치 예배의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였다. 내게 가장 감명적이었던 점은 역사적 사실의 현현이었는데, 성당 의례의 하나인 성찬에 대한 실감이었다. 예배실에서는 빵을 놓는 쟁반과 술을 담는 잔을 보여주고 이를 사용하는 동작을 취해 주었으며, 대성당에서는 교인들을 위해 빵과 술을 준비하는 예비제단과 성물(니콜라스 신체)이 담긴 본 제단을 보여주고 성찬을 준비하는 사제의 마음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예수는 빵이 자신의 몸이고 술이 자신의 피라고 했는데, 사제의 진솔한 설명과 행위에서 그것이 단순히 말이 아니라 진실임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선시대 문신 윤두수는 고려 정몽주의 순국사적을 담은 『성인록(成仁錄)』을 편찬하였는데, 이 책에는 그의 순국사실을 기록했을 뿐 아니라 초상과 유묵(遺墨)을 함께 수록하였다. 그리고 이를 수록한 이유에 대해 이들이 실재했던 인물임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이제 생각하니 윤두수는 유교의 사제 역할을 한 셈이다.




대성당에 그려진 예수 탄생의 벽화에서 쪼그려 앉아 있는 요셉의 모습에 대해 사제는 아버지이지만 아버지가 아닌 입장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이는 자신의 개인적 해석이 아니라 정교회의 입장이라고 설명하였다. 성화에서조차 세속적인 인간을 저버리지 않은 사제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고, 정교회의 세계관이 성과 속의 공존에 있음을 단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번 답사는 감리교회, 성결교회, 정교회 등 개신교 대표 종파를 둘러보는 종교답사였지만 교파에 대한 지식보다는 신과 인간이 종교와 국가라는 틀 안에서 교회와 사제를 통해 만나는 현장 체험을 느끼게 하였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이 느낌을 같이 하기를 기대해 본다.

 

 

 

안장리_
한국문화연구소 대표
논문으로 <조선 국왕의 곤충 인식 고찰>, <정몽주와 김삿갓의 고향시 비교 연구> 등이 있고, 저서로《조선 국왕 영조 문학 연구》,《왕실 서고 봉모당의 건립과 운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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