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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와 어린아이, 그리고 참교육
news letter No.939 2026/6/16
1. 참교육이라는 드라마
바로 얼마 전에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의 인기를 둘러싸고 요즘 설왕설래가 끊이지 않고 있다. 학교 교육을 위태롭게 하는 각종 폭력 사태에 맞서서 주인공이 힘을 합하여 교권을 수호하는 것이 드라마의 주요 내용이라고 한다. 전교조의 이른바 “참교육”이 주로 국가폭력으로부터 학생과 교사를 지키려는 방향을 제시했다면, 이 드라마가 주장하는 “참교육”의 주된 방향은 그와 정반대로 교권보호국이라는 국가기관이 학생과 학부모의 폭력으로부터 교사를 지키는 것이다. 또한 전교조가 교육 현장에 스며든 군사문화에 매우 비판적인 반면, 이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은 특전사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얼차려 등 군대의 강압 수법을 학생들에게 가하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 지금까지 나타난 이 드라마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도 인기가 폭발적이라는 점을 내세우며 한류(韓流) 문화의 우수성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드라마에서 이루어지는 학교 폭력에 대한 응징(膺懲)이 보는 이에게 통쾌함을 준다는 것이다. 첫 번째 반응에 대해서는 그동안 《기생충》과 《오징어게임》과 같은 작품이 실상 한국사회의 치부(恥部)를 배경으로 함에도 한국인들이 그런 점에 관해 관심을 두기보다는 다만 예술적인 성공을 찬양하는 데 몰두했다는 점에서 별로 이상하지 않다.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1962-) 감독의 《어느 가족》이 2018년에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 일본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낸 작품이라고 하여 당시 아베 정권이 애써 무시하려 했던 태도와는 차이가 있다. 아베 정권이 ‘밴댕이 소갈딱지’처럼 속 좁았던 것은 틀림없지만, 적어도 작품의 배경인 일본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인식은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한국의 여론은 영화나 드라마의 수상이나, 국제적 흥행 성공에 너무 열광한 나머지, 그런 작품을 낳게 한 한국사회의 어둠에 대해서는 소홀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 드라마가 한국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점, 그리고 “학교 현실은 드라마보다 훨씬 참혹하다.”는 어느 교원단체의 논평은 우리 사회의 학교 폭력이 심각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드라마에 나타난 여러 관계, 즉 학생들 사이, 학생과 교사, 교사와 학부모, 교사들 사이 등의 관계는 모두 승자독식의 폭압에 지배되고 있다. 강한 자가 군림하고 약한 자는 굴복하며, 강자에 기생하는 자는 생존하고, 저항하는 자는 도태된다. 대부분의 약자는 자기네끼리 서로 연대를 도모하는 대신, 누가 강자인지를 재빠르게 파악하고 그에 빌붙어서 기생하는 생존방식을 택한다. 이런 체제는 효과적이고, 나름 잘 굴러간다. 구제 불능의 반골이나, 눈치코치 없는 자들은 순조롭게 제거된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교권보호국의 공무원들이 개입한다. 그들은 “도태에 직면한”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관객들은 여기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환호한다. 하지만 모두 다 안다. 현실은 그렇게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드라마처럼 특전사 출신 공무원의 얼차려와 자그마한 매질이 넓고도 깊이 스며든 승자독식의 폭력을 과연 불식(拂拭)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그럴 리 없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국제적으로 성공을 누리고 있으니, 한국뿐만 아니라, 대부분 나라에서도 학교 폭력의 문제가 있는 증거라고 희석(稀釋)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 드라마의 성공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불길한 징후에 대해 근본적인 점검이 시급하게 필요하다는 점을 일깨우고 있다.
필자는 독재 정권 시절에 우리를 웃음으로 달래주었던 유머가 요즈음 왜 눈에 띄지 않는지 궁금하게 여긴 적이 있다. 그때, 우리는 독재의 폭압에 시달리면서도 새롭게 전해지는 온갖 유머를 통해 위안을 받았다. 식인종이나 참새 시리즈, 자신의 배를 점점 더 부풀리다가 결국 배가 터진 개구리나 비행기에서 가방 메고 뛰어내린 전두환 등의 유머를 통해 우리는 웃음을 터트리며, 잠시나마 숨 쉴 틈을 찾았다. 그리고 그런 유머가 대부분 여고생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 말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었으나,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기발랄한 창조력은 천장을 뚫고 늘 하늘 높이 날아오를 정도이므로.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현재의 대한민국 학교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참혹하다는 말이 맞다면, 그들은 과연 자신의 넘치는 생명력을 빛나는 유머를 만드는 데 쓸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위협하는 경쟁자로 친구들을 대하면서 자신의 온갖 힘을 모두 그들을 거꾸러뜨리기 위해 소진하고 있는 것일까? 요즘 유머 가운데 강자가 약자를 짓누르며 우월감을 확인하는 종류가 판치고 있다. 전혀 심상치 않다.
2. 클라라 한의 《어린아이처럼 본다》라는 책

필자는 우리의 현대를 규정하는 단어가 ‘분단 시대’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적(敵)을 상정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규정하고 있고, 바로 그 대적(對敵) 관계가 분단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전쟁이 우리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력에 관심이 있으며, 그런 맥락에서 이 책1)에 주목한다. 책의 저자는 이북 피난민을 부모로 두고, 미국에서 성장한 인류학자이자, 대학 교수다. 그가 집중하고 있는 관심사는 사람들이 엄청난 폭력의 피해를 입고도 어떻게 “꾸역꾸역” 살아가는가 하는 점이다. 그들은 국가가 저지른 각종 폭력이나 전쟁으로 자신의 일상이 무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재앙을 겪는다. 또한 그들은 빈곤이라는 구조적 폭력에도 시달린다. 그 폭력은 은밀하고 지속적으로 삶을 갉아먹기 때문에 더욱 잔인하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가족 이야기와 어린아이로서 자신이 경험한 바를 말한다. 그는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쟁이 이미 자신의 삶 속에 들어와 있다. 한국전쟁은 어머니의 표정과 아버지의 침묵에서, 가족의 이상한 금기에서, 사라진 친척들에서, 그리고 아이가 세상을 배우는 눈치 속에서, 세대로 이어지며 계속 살아 있다. 전쟁은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뒷세대의 일상적 감각이 된다. 전쟁은 전쟁 중보다 끝난 후에 더 잔인하고 길게 작용한다. 이 책의 초점은 바로 그것이다. 한국전쟁이라는 재앙적 사건이 어떻게 일상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지, 어린아이는 어떻게 자기 삶 속에 흩어져 스며있는 상처의 조각들을 이어 붙이며 세상을 배우고, 전쟁의 고통을 이어가는지 살피는 것이다. 전쟁의 재앙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뒷세대의 몸속에 단단히 뿌리박고 일상적 삶의 기저(基底) 감각을 이루면서, 끈질기게 존속한다. 어린아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삶에 뒤엉켜 있는 전쟁을 본다. 여기서 이 책의 제목이 뜻한 바가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전쟁의 이러한 잔인한 상처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영영 고통의 상속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클라라 한은 이미 일상의 삶에 스며들어 생활이 된 전쟁의 상처, 몸속에 파고들어 이미 나의 일부가 된 전쟁의 고통을 단번에 뿌리 뽑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뾰족한 수는 없다. 고통은 없애려 하면 할수록 더욱 달라붙기 때문에 고통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나타나는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새로운 집, 새로운 친척을 만드는 것이다. 무너진 집, 사라진 친척 대신에 자신이 돌아갈 고향 집과 자신이 함께 할 친밀한 몸들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으려는 바람이자, 의지이고, 실천이다. 다른 하나는 언어를 통해 상처 입은 관계를 다시 돌보는 것이다. 클라라 한의 경우에는 부모의 언어인 한국어를 배움으로써 자신의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하는 단서를 찾았다. 그가 분명히 하는 점은 새로이 모색하는 친족 만들기와 언어 배우기가 상처 없는 삶을 위함이 아니라, 상처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삶을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는 “집이란 장소가 아니라, 방향이다.”라고 말한다. 그에게 집은 도착점이 아니다. 상처 입고 피 흘리면서도 “꾸역꾸역” 자신을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게 만드는 방향이 바로 집이다. 우리는 집에 도착하지 못한다. 늘 집을 향해 가고 있을 뿐이다.
3. 만화책, 《페르세폴리스》

트럼프가 이란에 맹폭격을 가하여 석기(石器)시대로 되돌려 놓겠다고 큰소리쳤을 때, 보고 싶은 책이 떠올랐으니, 바로 만화책, 《페르세폴리스》2)다. 이 책은 여느 만화책처럼 단번에 읽고 해치울 책이 아니다. 조금씩 아껴서 읽는 데에 묘미가 있다. 그러던 중에 6월 초에 그 만화책의 저자, 마르잔 사트라피(Marjane Satrapi:1969-2026)의 부고가 전해졌다. 남편의 때 이른 죽음으로 슬픔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결국 그를 따라갔다는 것이다. 마르잔 사트라피의 죽음으로 자연스럽게 그의 한평생이 그려졌다.
책의 이야기는 그가 열 살 때인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 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던 것에서 시작한다. 그는 수도 테헤란에 거주하는 중상류층 출신으로, 부모는 이 똑똑하고 반항적인 아이를 이해하고, 따뜻하게 품어 준다. 하지만 신정국가의 이란 사회는 이미 이 아이의 자유분방함을 용납할 생각이 없다. 더욱이 이라크와의 8년 전쟁은 이란의 강압적 분위기를 더욱 강화하여 모두가 숨을 쉴 수 없게 만든다. 아누쉬 삼촌은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처형당하고, 가까웠던 옆집 친구는 비행기 폭격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동안 “가해자보다 더 세게 나아가야 산다”는 깨달음을 얻은 14살의 ‘마르지’는 학교에서 소동 끝에 퇴학당하고, 부모는 그를 피신시켜 오스트리아로 보낸다. 거기서 그는 4년 동안 이란인도 아니고 서양인도 아닌 정체성 혼란을 겪다가 황폐해져서 이란으로 다시 돌아온다. 집에 돌아왔다고 해서 크게 나아진 것은 없다. 그는 극도의 부침(浮沈)을 겪다가 마음을 다잡고, 이란의 대학에 들어가 미술 공부도 하고, 결혼도 한다. 그러나 첫 번째 사랑은 두 번째를 위한 연습일 뿐이고, 이빨이 썩으면 뽑아버려야 한다는 할머니의 조언에 힘입어 이혼하고, 25살에 프랑스 유학을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그는 자신의 책이 “그래픽노블”이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대신 “코믹스”(comics)라는 말을 좋아했다. 그래픽노블은 코믹스가 천박한 대중성을 풍긴다고 하면서 그와 차별하려고 잘난 체하며 등장한 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코믹스는 “웃기는”, “재미있는”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마르잔 사트라피는 웃음과 유머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거기에서 권위에 대해 반항하는 무지렁이들의 생명력을 보았다. 《페르세폴리스》의 제4부, “농담”(The Joke)이라는 장3)에는 마르지가 어린 시절 친구인 키아와 재회하는 장면이 있다. 키아는 전쟁에서 장애를 얻어 휠체어로 움직이며, 오른손만 쓸 수 있다. 전쟁 중에 수류탄이 머리 위에서 터져 수천 조각난 병사 이야기를 하며 그가 웃는다. 그는 흩어진 몸 조각을 병원에서 꿰매어 소생한 병사가 신부와 첫날밤을 치르면서 벌어지는 음담패설을 마르지에게 들려준다. 돌아오는 길에 마르지는 혼자 중얼거린다. 고통이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은 그냥 웃어넘기는 것”이라고.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절망도 그래야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가 자신의 만화 그리는 것에 관해 마치 수도승의 작업 같다고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수도승”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비슷한 장면을 수없이 반복하고, 장시간 집중해야 하는 일의 성격을 말한 것이기도 하고, 홀로 규율적인 삶을 유지하며 목표를 향해 집요하게 나아가는 자신의 삶을 말한 것이기도 하다. 이번에 그는 수도승의 집요함으로 반려자를 잃은 슬픔을 극한으로 추구해 버린 것이다.
마르잔 사트라피의 부고를 받고 그의 순탄치 않았던 일생을 생각한다. 이란 사람들의 몸과 생각을 옥죄는 강압적인 사회와 주리를 트는 교육 제도가 그를 질식하게 했지만, 그는 결코 무릎 꿇지 않았다. 전쟁이라는 재앙으로 가족, 친척, 친구들의 몸과 언어가 온갖 상처로 가득하고, 고통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몸으로 그 고통을 모두 받아내면서 자신의 새로운 집을 찾아가고자 했다. 그는 전두환 시절 유머를 만들어, 우리에게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던 여고생과 닮았으며, 지독한 고통을 감내하며 친절한 몸과 언어를 찾아 헤매는 클라라 한의 어린아이와 닮았다.
우리의 ‘마르지’는 지금 한국의 교실에서 피를 흘리며 신음 중이다. 그는 협공을 당하고 있다. 하나는 한국전쟁 이후 대량 생산체제를 갖춘 증오심 공장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IMF 이후, 학교 친구와 우리의 내면 안에 적대자를 생산하는 적대심 공장에 의한 것이다. 사실 우리의 ‘마르지’가 견딜 수 있는 한계는 이미 지나갔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울부짖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번에 나타난 드라마는 이런 맥락에서 옆구리에서 삐져나와 판타지적인 ‘해탈’을 꾀하려는 것이지만, 거기에 한눈팔 수 없다. 한국전쟁이 남긴 적대의 문법은 남북 간 대결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일상 속 경쟁과 배제의 문화로 스며들었고, 오늘날 학교에서도 친구를 적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재생산하고 있다. 외부의 적을 만들고, 친구를 적으로 만들어 짓밟다가, 결국에는 자기 자신까지 공격하게 만드는 자가면역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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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lara Han, Seeing Like a Child: Inheriting the Korean War, Fordham University Press, 2021. (클라라 한, 《어린아이처럼 본다: 한국전쟁을 내려받기》)
2) 마르잔 사트라피, 《페르세폴리스》, 박언주 역, 서울: 휴머니스트, 2019. (Marjane Satrapi, Persepolis, 2000)
3) 위의 책, 267-275쪽.
장석만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한국근대종교란 무엇인가?》, 《한국 종교학 - 성찰과 전망》(공저)의 책과 <두 가지 몸의 늙음: 한국 근대 노년 관점의 변화>, <식민지 조선에서 여자가 운다>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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