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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은 언제부터 ‘참배하는 공간’이 되었을까?

 

 

news letter No.945 2026/7/28

 

 

내가 조선시대 왕릉에 관해 강의할 때면 꼭 강조하는 것이 하나 있다. 왕릉 제향의 제수는 ‘소식(素食)’이라는 점이다. 곧 제사상에 고기를 올리지 않는다. 희생의 고기를 바치는 종묘의 혈식(血食)이나, 국왕이 생전에 즐겨 먹던 음식을 올리는 진전의 상식(常食)과 구별되는 왕릉 제향만의 특징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가끔 뜻밖의 질문을 받는다. “그렇다면 왜 왕릉 앞에는 갈빗집이 많습니까? 태릉갈비나 홍릉갈비가 유명하지 않습니까?”



듣고 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고기를 제물로 사용하지 않는 왕릉 주변이 오히려 갈비로 이름을 알렸으니 말이다. 그때마다 나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왕릉 주변이 유원지로 묘사된 장면을 떠올렸다. 근대 이후 왕릉 일대가 서울 외곽의 유람지나 휴식 공간으로 변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하곤 했다.

실제로 왕릉을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이 먼저 떠올리는 것은 엄숙한 참배의 기억이라기보다 소풍과 산책의 기억이다. 어릴 적 서울에서 살았던 이들에게 왕릉은 학교에서 소풍을 갔던 곳이자 가족과 함께 나들이하던 곳이었다. 울창한 숲과 넓은 녹지를 품은 왕릉은 죽은 왕의 공간인 동시에 산 사람들의 휴식과 놀이의 공간이었다. 정자각 뒤편 능침과 봉분까지 함부로 올라갈 수는 없었지만, 그 주변의 숲과 잔디는 오랫동안 시민들의 생활공간에 가까웠다.

그런데 장서각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이왕직 자료를 읽으면서 나는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갈빗집의 기원을 밝히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료를 따라가다 보니 더 근본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왕릉은 언제부터 ‘참배하는 공간’이 되었을까.”

조선시대의 왕릉은 왕실이 정기적으로 제향을 올리는 국가·왕실 의례 공간이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이 왕릉을 찾아 정해진 절차에 따라 참배하는 문화가 널리 자리 잡았던 것은 아니다. 왕릉은 엄격하게 보호되는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능역 주변은 주민들의 생활공간이었고 서울 근교의 유람지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나타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뒤 국가의 단묘와 제사는 대부분 폐지되었다. 그러나 종묘와 왕릉을 비롯한 황실 관련 사당과 능묘는 이왕직(李王職)의 관리 아래 남았다. 이왕직은 대한제국 황실을 일본 왕실의 한 갈래인 ‘이왕가(李王家)’로 격하하여 관리하던 기관이었다.

최근 출간한 『일제강점기 종묘 연구』는 장서각에 소장된 이왕직 자료를 바탕으로 식민지 시기 종묘와 왕실 제향의 운영을 살펴본 책이다. 이 자료를 통해 나는 종묘의 제향과 관리뿐 아니라, 당시 이왕직이 왕릉의 공간과 참배자의 행동을 어떻게 관리하려 했는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왕직 내부 회의 자료인 『참봉예회회보』를 보면 당시 왕릉과 능원의 현실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고요하고 엄숙하지만은 않았다. 능역에서는 도난과 화재, 무단 출입과 훼손 사건이 반복해서 일어났다. 1932년에는 지릉의 봉분이 도굴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능원 직원들에게 근무지를 이탈하지 말고 수호 업무를 철저히 하라는 지시가 거듭 내려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러한 기록은 당시 조선인 모두가 이왕가의 능묘를 존숭의 대상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어떤 이들에게 왕릉은 여전히 생활공간이었고, 유람지였으며, 때로는 물건을 훔치거나 훼손할 수 있는 관리의 사각지대이기도 했다. 이왕직은 이런 현실에 대응하여 왕릉을 단순히 보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권위 있는 ‘성역’으로 재구성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모델이 된 것은 일본의 천황릉이었다.

1930년대 이왕직 예식과 직원들은 일본의 천황릉과 황실 사당을 시찰하였다. 그들이 남긴 답사기에는 공통된 감탄이 나타난다. 능 구역과 참도(參道)에는 모래와 자갈이 깔려 있었고, 티끌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청결하게 관리되었다. 시설은 소박하고 간소했지만, 바로 그 간결함 때문에 오히려 엄숙함과 신성함이 더해진다고 평가했다.

참배객의 태도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능 입구에 이르면 손과 입을 씻고, 모자를 벗은 뒤, 정해진 위치에서 합장하거나 배례하였다. 어린아이들까지 질서를 지키며 정중하게 예를 올리는 모습을 보고 이왕직 직원들은 감복했다고 기록했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거대한 건축물이 아니라 깨끗하게 정돈된 공간과 규율에 맞추어 움직이는 사람들의 몸짓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조선의 왕릉 관리에도 반영되었다. 이왕직은 「묘전궁능원 참배자 취급 내규」를 마련하여 능원 참배의 절차와 범위를 규정하였다. 당시 종묘와 영녕전은 일반인의 참배가 허용되지 않았지만, 왕릉과 능원은 신청서를 제출하면 일정한 절차에 따라 참배할 수 있었다. 참배자의 지위에 따라 참배 위치도 달랐다. 어떤 사람은 정자각의 월대 위까지 올라갈 수 있었고, 어떤 사람은 월대 아래나 홍살문 안쪽에서만 예를 올릴 수 있었다. 왕릉 공간의 위계가 참배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세밀하게 나뉜 것이다.



이왕직은 능원 직원들에게 참배객을 ‘근엄한 태도’로 ‘장중하게’ 안내하라고 지시하였다. 중요한 것은 단지 절을 올리는 행위가 아니었다. 어디로 들어가고, 어디에 서며,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왕릉의 권위는 건축물이나 봉분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행하는 사람들의 몸짓을 통해 완성되었다.

이런 점에서 왕릉 참배 규정은 단순한 관람 예절이나 시설 관리 규정이 아니다. 그것은 왕릉이라는 공간을 새롭게 의례화하는 장치였다. 참배객은 정해진 동선을 따라 걷고, 지정된 자리에 멈추며, 몸을 낮추고 예를 표했다. 이 과정을 통해 왕릉은 유람과 휴식의 공간에서 위계와 권위를 체험하는 성역으로 재구성되었다.

물론 왕릉에 대한 존중이나 능역 보호 의식이 일제강점기에 처음 생긴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왕릉은 왕실 권위와 국가 질서를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였다. 다만 일반 대중에게 일정한 참배 절차를 요구하고, 참배자의 신체와 행동을 조직하는 방식은 식민지 시기에 새롭게 강화된 측면이 있었다. 특히 일본 천황릉의 청결과 엄숙함, 참배 규율은 이왕직이 조선 왕릉의 권위를 재구성하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왕릉은 언제나 한 가지 의미만을 지닌 공간이 아니었다. 죽은 왕을 모신 제향 공간이었고, 주변 주민의 생활공간이었으며, 근대 이후에는 시민의 소풍과 유람 장소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다시 참배와 규율을 통해 권위를 체험하게 하는 장소로 만들어졌다.

왕릉 앞 갈빗집에 관한 질문은 여전히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질문은 나에게 왕릉을 제사와 능침만으로 바라보던 시각에서 벗어나게 했다. 왕릉을 찾고, 걷고, 쉬고, 절하는 사람들의 행위까지도 왕릉의 역사에 포함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 것이다.

왕릉은 죽은 자의 무덤이지만, 그 의미는 언제나 산 사람들이 만들어 왔다. 어떤 시대에는 소풍과 유람의 장소로, 또 어떤 시대에는 엄숙한 참배와 권위의 공간으로 기억되었다. 왕릉의 역사를 살핀다는 것은 결국 그 공간을 둘러싼 사람들의 몸짓과 감정, 그리고 권력이 공간의 의미를 어떻게 바꾸어 왔는지를 함께 살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욱_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주요 저서로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조선왕실의 제향 공간-정제와 속제의 변용》, 《조선시대 국왕의 죽음과 상장례-애통・존숭・기억의 의례화》, 《일제강점기 종묘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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