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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탓과 네 탓의 딜레마
news letter No.946 2026/8/4
1990년대 초, 한국 천주교회의 '내 탓이오' 운동은 자동차 스티커 한 장으로 사회 현상이 되었다. 이 말의 뿌리는 미사 고백기도의 "메아 쿨파, 메아 쿨파, 메아 막시마 쿨파"(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 곧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라는 고백이다. 서로에게 삿대질하던 시대에 그 말은 낯설 만큼 신선했다. 남을 겨누던 손가락을 자기 가슴으로 돌리자는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문장은 곧 하나의 질문을 남겼다. 모든 것이 정말 '내 탓'이라면, 잘못된 제도와 불의한 권력의 몫은 어디로 가는가. 자기성찰의 언어가 어느 순간 강자를 감싸는 보호막이 되지는 않는가. '내 탓과 네 탓'의 딜레마는 여기서 시작된다.
"안으로 엄격하고 밖으로 관대하라"는 원칙은 특정 종교의 발명품이 아니라 인류의 큰 정신적 전통들이 놀랍도록 한목소리로 가르쳐 온 이상이다. 예수는 형제의 눈 속 티는 보면서 제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자를 꾸짖으며, 먼저 제 눈에서 들보를 빼내라고 말했다(마태오복음 7,3-5). 『법구경』은 남의 허물은 쉽게 보이나 자기 허물은 보기 어려우며, 남의 허물은 겨를 까부르듯 드러내면서 제 허물은 감춘다고 꾸짖는다(법구경 252). 공자는 "군자는 자기에게서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 논어 위령공 21)고 지적하였고, 맹자는 뜻대로 되지 않거든 모두 돌이켜 자기에게서 구하라(反求諸己, 맹자 이루상 4)고 가르쳤다. 꾸란은 저마다 내일(미래)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미리 마련해 두었는지 스스로 돌아보라 명하였고(꾸란 59:18), 이슬람 신비주의(수피) 전통은 자기 자아(nafs)와의 싸움을 '큰 지하드'(jihād al-akbar)로 여겨 왔다.
문제는 이 고귀한 이상이 우리의 실제 습성과 거의 정반대라는 점이다. 예컨대 중고 물품 거래를 떠올려 보자. 내가 팔 때는 "이 정도 흠집은 괜찮겠지" 하며 관대해지고, 살 때는 상대의 물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깐깐해진다. 내가 늦으면 그럴 사정이 있었던 일이고, 남이 늦으면 성의가 없다는 증거가 된다. "나는 괜찮은데"라는 한마디에 이 이중잣대가 압축돼 있다. 나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엄격한 태도, 곧 종교들이 뒤집으라고 가르친 바로 그 구도로 우리는 태연히 살아간다. '내 탓이오'가 그토록 신선했던 이유는 그것이 이런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역류였기 때문일지 모른다.
여기까지라면 '내 탓'은 흠 없는 미덕이다. 그런데 위험은 다른 데서 온다. 바로 개인 윤리의 겸손을 사회 분석의 자리에까지 밀어 넣을 때다. 두 개의 층위를 구별해야 한다. 하나는 "내가 남을 재는 방식을 다스리라"는 수양의 축이고, 다른 하나는 "내 고통이 다 내 탓은 아님을, 때로는 구조 탓임을 보라"는 정의의 축이다. 가난한 이에게 "네가 게을러서"라고 말하고, 차별받는 이에게 "네 마음가짐이 문제"라고 말할 때, '내 탓이오'의 문법은 불의를 개인의 도덕적 실패로 축소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되고 만다.
그래서 이 딜레마의 열쇠는 격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누구에게 말하는가에 있다. "네 탓이 아니라 내 탓을 보라"는 동일한 말이 억압하는 자의 입에서 자신을 향해 나오면 회개가 되지만, 억압받는 자에게 강요되면 폭력이 된다. 권력자가 스스로에게 '내 탓이오'를 되뇔 때 그것은 정의의 시작이고, 피해자에게 "왜 네 탓은 안 돌아보느냐"고 요구할 때 그것은 가해의 완성이다. 청중이 강자냐 약자냐에 따라 동일한 문장이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작동한다. 성찰의 언어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갈 때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 안으로 겨눌 때만 건강하다.
청중만이 아니라, 때와 자리도 문법을 바꾼다. 참회의 골방과 불의를 고발하는 광장은 다른 언어를 요구한다. 홀로 하루를 돌아보는 자리(曾子의 吾日三省吾身, 논어 학이 4)에서는 '내 탓'이 마땅하지만, 힘없는 이가 짓밟히는 현장에서 "다 내 탓"만 읊는 것은 비겁이다. 예수의 비유 속 세리는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고 홀로 가슴을 치며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기도했고, 결국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이는 우쭐대던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루가복음 18,9-14).
흥미로운 것은 '내 탓'을 가르친 바로 그 전통들이 강력한 정의 사상 또한 함께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히브리 예언자들은 과부와 고아를 짓밟는 제도를 규탄했고, 이슬람은 '아들'(ʿadl)이라 부르는 정의와 약자 보호를 신앙의 기둥으로 삼는다. 불교의 연기(緣起)는 모든 고통이 조건과 관계 속에서 일어남을 보게 하고, 유교의 천명(天命) 사상은 민심을 잃은 권력을 갈아엎는 역성혁명의 논리로까지 나아간다. 요컨대 이 전통들은 '내 탓'과 '구조 탓'을 대립시키지 않았다. 둘을 각자의 자리에 놓았을 뿐이다.
그러니 '내 탓과 네 탓'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내 탓'은 내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겨냥한 내적 성찰의 원칙이고, '구조를 보라'는 세상의 불의를 읽는 눈을 겨냥한 원칙이다. 하나는 나를 낮추고, 다른 하나는 약자를 지킨다. 둘은 층위가 다르기에 충돌하지 않는다. 정작 왜곡이 일어나는 것은 이 둘을 뒤섞을 때다. 강자가 구조의 책임을 "다 내 탓"이라는 말로 덮어 흐릴 때가 그렇고, 개인이 마땅히 져야 할 몫까지 구조 탓으로 떠넘기며 성찰을 포기할 때가 그렇다. 성숙한 윤리는 이 경계를 흐리지 않고 또렷이 긋는다.
결국 '내 탓이오'의 스티커가 남긴 교훈은 그 문장을 무조건 외우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을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적용할지 아는 분별이 중요하다. 곧, 자기 자신에게는 세리의 겸손을, 불의 앞에서는 예언자의 용기를 지니는 것, 이 둘을 한 사람 안에 함께 품되 그 때와 자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종교 전통들이 수천 년에 걸쳐 다듬어 온 지혜의 핵심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안으로는 엄격하되 그 엄격함을 남을 억누르는 무기로 삼지 말 것, 밖으로는 관대하되 그 관대함이 불의에 대한 눈감음이 되지 않게 할 것. 내 탓과 네 탓 사이에서 우리가 익혀야 할 것은 고정된 원칙이 아니라 때와 자리를 아는 분별의 마음이다.
김재명_
건양의대 의료인문학교실
최근 논문으로 <죄에서 병으로: 한국 보수 개신교 ‘성경적 성교육’ 교재 분석을 통해 본 ‘정상 신체’의 정치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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