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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연가 : 백악산과 세종대왕 동상

2009.10.27



촌놈의 서울 사랑은 광화문 뒤편 백악산(북악산)을 보면서 시작되었다. 높은 빌딩숲, 수많은 차들, 그보다 더 위압적이던 전경들 어깨 너머로 보이던 백악산의 곡선이 어찌 그리 매혹적이던지. 직선은 문명이고 제국주의의 선이라면 곡선은 자연의 선이라는 어느 지리학자의 말을 나는 광화문 앞에서 바라보는 산과 빌딩의 선을 통해 공감했다.

이 백악산을 뒤로 한 광화문 앞에 세종대왕 동상이 등장하였다. 세종의 거리에 세종의 동상 대신 이순신 동상이 있던 아이러니가 이제야 사라졌다. 이순신 장군에게 미안하지만 그는 무대의 주인공이 아니라 수호신의 자리로 물러난 것 같다. 궁궐에서 나와 길거리 옥좌에 앉은 세종대왕은 한글을 비롯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은 최고 권력자이면서 당대 문화의 결정체이다. 유네스코(UNESCO,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 등재된 우리 문화 목록을 통해서도 이런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종묘, 창덕궁, 수원화성, 조선왕릉 등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며, 조선시대 의궤, 승정원일기, 왕조실록 등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선정되어 있다. 이러한 왕실문화는 석굴암, 해인사 팔만대장경 등과 같은 불교문화, 향촌의 선비문화 등과 더불어 우리 전통문화의 주요한 자산이다.

왕조국가에선 종교문화 역시 국왕을 중심으로 선회하고 있다. 이것은 어느 왕이 어느 종교를 좋아했는가하는 선호도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적 카리스마에 의지하든 그것을 넘어서든 정치적 카리스마를 세우려는 왕권 속에는 종교적 요소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즐비한 사찰과 승려들의 행렬, 절에서 흘러나오는 염불 소리와 풍경 소리 속에 하루를 시작했던 고려시대 개경과 달리 한양은 산천과 궁궐이 스카이라인을 형성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국왕은 가뭄에 온 백성의 안위가 위협받을 때는 자기 몸을 희생으로 바치고자 했으며, 권력을 위해 사대부들이 당파를 지을 때 국왕은 태극(太極)의 중심이 되고 천지를 비추는 명월(明月)이 되고자 하였다. 이러한 국왕의 자의식은 실제가 아닌 신화와 의례를 통해서 실현되었다. 현실의 국왕은 백성에 앞서 도망가고 나라가 망해도 왕실의 보존에 연연했다. 이러한 왕실의 문화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왕권을 역사적 관점에서라기보다 신화와 의례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국왕’의 이미지는 우리 사회에 아직도 유효한 정치적 상징이다. 패망한 나라의 궁궐을 왜곡하면서도 완전히 허물지 않은 일본이 경복궁 앞 쪽에 총독부 건물을 세운 것이나 해방 후 대통령의 관저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근대 이후 정권 역시 전통시대 국왕의 이미지에 의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제왕적 대통령이나 계몽적 대통령에 대한 기대는 현실 정치의 판도를 형성하는 주요 변수이다. 내세우는 건 성왕(聖王)의 이미지이지만 현실적으로 돌아오는 건 늘 비민주적 권위 정치였다. 6m가 넘는 동상과 넓게 펼쳐진 꽃밭이 광장의 소리를 가로막기 위한 것이라면 광화문 앞 광장은 홍보관 같은 전시 공간일 뿐이다. 우리 정치는 이 권위의 장막을 걷어버리고 광장의 소리에서 새롭게 시작할 순 없을까? 위압적이지 않으면서 친근한 백악산의 얼굴이 빌딩과 동상에 가려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이욱_

서울대학교규장각 연구원leewk@snu.ac.kr

주요 논문으로 <대한제국기 丘祭에 관한 연구>, <조선후기 전쟁의 기억과 大報壇 제향> 등이 있고, 저서로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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