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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秋夕)과 성묘(省墓)
2009.9.29
해마다 한식(寒食)이나 추석 무렵이 되면 성묘(省墓) 가는 사람들로 인해 고속도로나 공원묘지 주변의 도로가 심한 정체를 빚곤 한다. 이는 한식과 추석 전후의 성묘가 오늘날 하나의 중요한 풍속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현대 한국 사회의 성묘 풍속은 어디에 근거한 것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성묘(省墓)는 말뜻 그대로 조상의 묘를 살펴보는 것으로, 분묘에 절한다는 뜻으로 배분(拜墳)이라고도 하며, 또 분묘를 소제하고 절한다는 의미에서 배소례(拜掃禮)라고도 한다. 따라서 단순히 묘소를 찾아가서 예를 표하는 행위나, 잡초를 뽑고 분묘를 소제하는 벌초(伐草), 그리고 제수를 장만하여 분묘에 제사지내는 묘제(墓祭)가 모두 성묘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성묘라고 하면 봄, 가을(주로 한식 및 추석 전후)에 정기적으로 묘소에 찾아가 시행하는 일종의 의례 행위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부모나 조상의 묘를 찾는다는 점에서 성묘는 분명 효(孝)와 조상숭배의 관념을 보여주는 것이면서, 기본적으로 제례(祭禮)의 형식을 띠고 있는 점에서 유교의례(儒敎儀禮)의 하나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유교의례의 범주에 속하는 기제(忌祭)가 집안에 따른 세세한 차이점은 있을지언정 그 시행 시기나 의례의 절차 및 내용에 있어서는 유교 예서(禮書) 특히 <가례(家禮)>에 규정된 것과 기본적으로 일치하고 있음에 비해, 우리나라의 성묘 문화는 그 시행 시기나 시행 방법에 있어서, 중국의 제도를 바탕으로 성립된 예서들과는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당대(唐代)의 <개원례(開元禮)>와 송대(宋代)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서는 기제(忌祭) 하루 전날에 배분(拜墳) 곧 성묘하는 절차를 수록하고 있으며, <외서(外書)>에서는 음력 10월 초하루와 한식 때의 배분하는 습속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중국에서는 기제일(忌祭日) 외에 한식과 10월 초하루에 성묘하는 것이 관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식에 성묘하는 관습은 중국과 한국이 일치하지만, 추석의 성묘는 중국에는 없던 우리 고유의 풍속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안정복(安鼎福)이 추석에 벌초하고 성묘하는 것은 예(禮)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우리 동방의 풍속〔東俗〕이라고 한 것도 이를 적시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면, 추석에 성묘하는 풍속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의 "매년 정월 3일·7일과 5월 5일, 8월 5일과 8월 15일에 풍성하고 정결한 제전(祭奠)으로 제사지냈는데, 대대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 기사나, 이언적(李彦迪)의 <봉선잡의(奉先雜儀)>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정조(正朝), 한식, 단오, 추석에 묘에 가서 배소해왔으니 어떻게 폐할 수가 없다”고 말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곧 추석에 성묘하는 풍속은, 추석이라는 고유의 큰 명절과 유교적 보본(報本) 의식의 소산인 성묘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예서에는 없는, 우리 고유의 명절과 결합한 유교식 제례로서 이어져 온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추석 성묘의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유교의례가 정착되는 조선후기 이후로는 사대부들 사이에서 추석 성묘를 폐지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조선후기의 예학자 김집(金集)이 “추석 때의 묘제(墓祭)는 내 집에서는 설행(設行)하지 말도록 명했고, 가묘(家廟)에만 약간의 주과(酒果)를 올리도록 시켰다”고 한 것이 그 한 예이다. 심지어 유교 전통이 강한 일부 집안에서는, 추석에는 집안에서 차례만 지내고 성묘는 10월의 시제(時祭) 때에 시행하거나, 아예 명절을 중국식으로 변경하여 추석 대신 중구(重九:음력 9월 9일)에 절사(節祀)를 지내고 이어 10월에 시제를 지내는 경우도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일부에 국한되었을 뿐 크게 확산되지 못하였고, 조선후기 이후에도 추석에 성묘하는 풍속이 일반적으로 행해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는 추석에 성묘하는 풍습이, 설과 더불어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이 오늘날까지 쇠퇴하지 않은 현상과 맞물려 여전히 널리 행해지고 있으며, 교통의 발달에 따라 분묘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짐으로써 더욱 확산되는 현상마저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또 현대에 들어 대부분의 집안에서 가묘(家廟:사당)가 없어짐으로 인해 분묘가 부모와 조상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구체적인 공간으로 남아있게 되었음을 생각할 때, 성묘는 오히려 그 의미가 강화되는 측면이 있고, 따라서 성묘는 묘제라는 형식으로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김호덕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serkha12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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