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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72호-정교분리에 대해 생각한다(장석만)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1. 4. 15. 15:06

정교분리에 대해 생각한다

2009.9.22


조선 시대 말기에 정교분리의 관점이 수용되는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종교와 정치의 쌍방적인 불간섭이 아니라, 정치에 대한 종교의 불간섭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제시대에도 역시 세속권력이 종교권력의 간섭을 차단하려는 측면이 부각된다.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정치는 통감이, 정신적 교화는 종교가 맡는다”고 주장하면서 서양선교사들에게 종교집단이 정치에 간섭하지 않을 경우에 그 특권을 인정해 주겠다고 하는 모습은 이러한 정교분리 원칙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특히 일제 총독부는 한반도 내의 종교 세력이 지닌 위험성에 대해 민감한 대응을 해왔다. 자신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는 망명정부보다도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구심점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종교집단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일제의 강력한 정교분리 정책은 종교 세력이 총독부 권력에 도전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1919년 3.1 운동이 천도교와 개신교 중심으로 전개된 것도 총독부가 느껴온 이런 위협감을 확인해 주었다. 이후 총독부의 종교 정책은 정치와 종교의 경계선을 절대화하고, 이 경계를 넘는 종교를 탄압하고 유사(類似)종교화 하여 배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총독부의 이런 정책을 역으로 이용하여 총독부에 저항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1911년의 사찰령이 지닌 부당성을 주장하면서 제기된 한용운의 정교분리론은 사찰령이 불교와 정치의 유착을 조장하기 때문에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일제 말기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거부한 주요 논리 가운데 하나는 정교분리의 원칙이었다.

해방 후의 정교분리 주장은 미국문화의 영향과 함께 개신교 세력의 득세를 주된 배경으로 하였다. 그래서 미국식의 우호적인 정교분리 성향이 상당 부분 내포되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정교분리의 주장을 주로 국가권력이 제기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상황과는 다른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정교분리 원칙은 독재 권력에 대항하는 소수 종교 세력의 부당함을 홍보하는데 주로 이용되었다. 이 시기 정교분리에 관한 이론적 작업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기독교의 영향권 안에서 이루어진 것도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 정교분리를 보는 관점은 크게 엄격한 분리를 주장하는 쪽과 상대적인 구별을 주장하는 쪽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루터의 두 왕국설의 신학적 정당성을 내세우면서 기독교의 3.1 운동 참여 및 10월 유신에 대한 기독교의 찬반 개입 모두를 강하게 비난하였다. 후자는 엄격한 분리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독재 권력의 정당화와 정치 외면의 경건주의를 모두 비판하였다. 정교분리에 관한 이런 관점은 기독교 교단 측에서 국가권력과 갈등관계에 놓이자, 이로 인해 야기되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정교분리 원칙은 정권과 유착관계에 있는 종교집단일수록 더욱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자신들은 그 정권을 위해 조찬기도회와 구국기도회처럼 노골적으로 홍보를 일삼으면서도 정권의 부당성을 외치는 것은 정교분리 원칙에 위배된다고 강조하였다. 하지만 종교적 극우세력이 주장하는 이른바 좌파 정권이 들어서자, 그들은 그 정권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기 위해 공공연하게 정치집회를 열고 스스로 금과옥조로 삼던 정교분리 원칙을 버리게 되었다.

2008년 드디어 고대하던 이명박 정권이 세워지자, 종교적 위호 세력은 공공연하게 정치활동에 개입하였고, “고소영” 내각이라는 신조어의 핵심 부분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제 그들에게 정교분리 원칙이라는 것은 현실 적합성이 결여된 것으로 간주되며, 단지 사문화된 레토릭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정권의 종교편향성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키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담론으로서의 정교분리가 서로 상반되는 세력에 의해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정교분리 담론의 형성 과정을 볼 때, 정치와 종교는 각각 다른 영역으로 구별되어 개념화 되었다. 정치와 종교 영역은 서로 구별되지만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방이 필요한 만큼 상호의존적이다. 정교분리의 원칙은 이 담론에서 상호의존적인 측면을 감추고, 구별되는 측면만을 부각시킨 것이다. 그런 부각이 필요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정치는 국가의 영역 안에서 영위되는 것이다. 국가는 개인의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사회 영역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성격과 위치를 마련한다. 국가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갈등을 통제하기 위해 위임받은 권력을 사용하는 것이 공인되어 있다. 국가는 그런 의미에서 공적인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그만큼 배타적인 권력행사를 누릴 수 있다. 적어도 근대성의 세속 영역에서 국가의 이런 권력 행사에 대해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문제는 바로 종교 영역이다. 종교 영역은 세속 영역의 밖에 자리 잡고 있거나 세속 영역 안에 들어와 있더라도 세속 영역의 변방(邊方)에 있어서 언제라도 국가권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심력이 작용하는 종교 영역의 이런 성격으로 인해 종교는 국가의 정치 영역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다.

따라서 세속 영역의 국가 권력은 종교의 위험성을 차단하기 위해 종교 영역을 “보호구역화”하는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각각 종교와 정치의 영역을 분리시키고 그 속성을 규정하여 고정화하는 것이 당위의 규범으로 마련되는 것이다. 이런 전략은 종교 영역이 정치권력과 대등한 위치를 보장받게 한다는 점에서 종교 쪽도 불만이 없는 선택이었다. 공적인 영역을 정치에 양보하지만, 그 대신 사적인 영역을 종교가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19세기 후반기에 조선에 도입된 정교분리의 관점은 서구인이 문명의 지표로 간주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를 조선이라는 비서구 지역에도 반드시 관철해야 한다고 여겼다. 신앙의 자유와 선교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은 서구인 자신뿐만 아니라, 비서구인들도 문명의 혜택을 입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의 경우에 종교가 개인의 사적인 주관적 의식의 영역이 되지는 않았다. 정치의 영역을 민족국가(혹은 국민국가)로 대표되는 집단 아이덴티티의 유지와 관리가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한다면, 조선 혹은 한국의 종교는 결코 정치의 영역과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았다. 서구의 역사적 상황에서 필요했던 개인의 사적 공간은 당시 조선 혹은 한국에 절실하게 요청되는 항목이 아니었다. 다만 종교 세력과 정치 세력 사이에 일정하게 타협하여 상호지분을 인정해주자는 것만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원칙으로 내세우는 것은 그만큼 분리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최근 세계 곳곳에서 정교분리 원칙의 보편적 규범성이 동요하고 있다. 그동안 정교분리가 “원칙”의 지위를 누리면서 지녀왔던 절대성의 후광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정교분리 원칙을 하나의 권위적 담론으로 활용하는데 그치지 말고, 정교분리 원칙이 우리에게 어떻게 수용되었고, 정착되어 왔는지 그 과정과 맥락을 면밀하게 살피는 것이 시급해지고 있다.

장석만_

본 연구소 편집위원장 skmjang@gmail.com
주요 논문으로 <민족과 인종의 경계선:최남선의 자타인식>, <인권담론의 성격과 종교적 연관성>, <한국신화 담론의 등장>등이 있고, 저서로 ≪종교 다시읽기≫(공저), ≪한국 근대성 연구의 길을 묻는다≫(공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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