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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21호-종교, 소통, 그리고 `밀양`(송현주)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1. 4. 14. 14:04

종교, 소통, 그리고 '밀양'


2008.9.23

얼마 전 인터넷에서 재미있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요지인 즉 한 가지 신문만 읽는 사람은 행복한 반면, 논점이 다른 여러 개의 신문을 읽는 사람은 불행하다는 것이다. 한 가지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입장을 정리하면 마음이 편안한데, 공연히 여러 관점에서 이것 저것 생각하게 되면 마음이 복잡해져 평안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한 종교에 몰입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화된 종교의 논리로 삶을 해석하며 사는 사람들은 단란한 일상의 행복을 지켜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의 종교에 빠져 신심이 깊어지면 옆을 돌아볼 필요가 없다. 삶을 해석하는 논리도 단순해진다. 그만큼 마음은 행복하고 정신은 명쾌하다. 그 논리로 세상 모든 문제가 설명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런데 이 논리에 방해가 되는 다른 논리체계가 불쑥 끼어들면 어떻게 될까. 기존의 논리체계에 도전하는 다른 논리를 용납하지 못하면 그것은 적으로 간주될 것이고, 그것과 화해하려 하면 수많은 고뇌를 만들어 낼 것이다. 내 삶의 평안한 체계가 깨어지는 것이다.

사실 삶은 매우 복잡하다. 많은 요소들이 거미줄처럼 얽혀있어 하나의 가치, 하나의 의미로 해석하기 곤란하다. 이 복잡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기에 벅차기 때문에 인간은 의도적으로 단순함을 지향하여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려 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단순화의 논리가 지나치면 타인과의, 또는 세상과의 소통을 저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소통’이 화두가 되고 있다. 무언가 서로 대화를 잘 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다, 또는 서로 잘 이해를 못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소통의 부재 혹은 단절의 시대에 종교가 오히려 또 하나의 소통단절의 원인이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종교가 사람들 사이의 내면의 화합이나 소통을 가능케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관계를 가로막는 벽으로 기능하는 경우다.

소통을 가로막는 원인의 하나인 종교적 단순화 속에는 심각한 인식론적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 인간이 과연 신의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인간이 신의 뜻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믿는 순간 그것은 교만이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는 신의 뜻을 알고자 고민하는 자의 모습보다 신의 뜻을 이미 알았다는 확신에 차있는, 그래서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종교인의 모습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신에게 인간의 욕망을 성취해달라며 강요하고 떼쓰는 ‘신의 도구화’ 마저 주저하지 않는다.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파스칼, 《팡세》(1670))

3백여년 전 파스칼은 17세기 유럽의 하늘로부터 신의 부재를 느끼고 공포를 표현했다. 그 독백이 우리에게 여전히 감동을 주는 것은 절대자에 대한 인간지성의 한계를 드러낸 그 진실성 때문이다. ‘숨은 신(Dieu cach)'으로 표현된 이 명제는 20세기 중반 다시 영화에서 재현된다.

“신앙은 짐(고통)이오. 절대로 올 것 같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같소.” (잉그마르 베르히만,〈제 7의 봉인〉(1957, 기사의 독백)

이 영화가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것 역시 그 누구도 신의 현존을 확신할 수 없다는 인간의 겸허한 고백을 절실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밀양〉(2007)은 은총을 남발하는 값싼 구원의 신을 거절하겠다는 여주인공의 인간선언을 보여준다. 자신의 종교를 통해 신의 뜻이 ‘모두’ 확인되었다는 종교적 교만에 대해, 종교의 논리로만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설명하고자 하는 인식론의 단순성에 대해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종교가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소통 보다 오히려 그것을 가로막는 것은 아닌지 하는, 종교와 소통의 역설적 반전의 현실을 가르쳐 주는 ‘비밀스런 태양’이다.

송현주(순천향대학교 교수, songclou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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