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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233호- 오늘날의 에로틱 영성을 향하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2. 11. 28. 17:41

오늘날의 에로틱 영성을 향하여

 

2010.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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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본 연구소 하반기 심포지엄(‘섹슈얼리티와 종교’라는 주제로 12월1일 개최할 예정)을 위해 심포 발표자들이 모인 10월 20일 한종연 월례포럼 집담회에서 김윤성 심포팀장이 Georg Feuerstein, Sacred Sexuality: The Erotic Spirit in the World’s Great Religions, Rocester, Vt: Inner Traditions, 2003.의 책 결론부분을 정리하여 발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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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정체성의 재발견-


저자는 현대사회가 가시적인 것만 볼 뿐 그 너머의 비가시적인 영적이고 성스러운 차원은 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정신 신체적 에너지를 가지고 하는 인간의 영적 작업은 우리를 더 큰 체현인 신비에 좀 더 직접적으로 와 닿게 해준다. 이 같은 정신 신체적 에너지는 가시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 소우주와 대우주, 섹슈얼리티와 영성을 연결하는 다리다. 이 에너지의 역동성을 좀 더 온전히 인식함으로써 우리의 의식은 일상적 감각의 감금적인 장벽을 돌파하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저자는 이런 영적 작업은 매우 어려우며, 전문적 지도 없이는 자칫 위험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세계(=우리의 더 큰 몸)를 우리와 동떨어진 것으로 보는 선입견을 버리고, 세계의 실재를 공간을 차지하는 물체들의 집합이 아닌 무한한 에너지 그물망으로 보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이런 견해만이 이 세상의 실재와 부합하며, 매혹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제 막 그 깊이를 보기 시작한 세계 및 타자들을 이어주는 무한한 새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이들을 보면 볼수록, 우리는 그들의 개별성을 넘어서 그들이 출현하고 그 속으로 궁극적으로 사라져 들어갈, 모든 것을 포괄하는 영광스러운 신비(Mystery)를 볼 수 있다. 또 현대인이 잃어버린 예지력(叡智力)도 함께 얻을 수 있다. 우리가 개별적인 것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인정하면, 물질 너머 차원에서 의식적으로 기능할 능력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성스러움, 그리고 시공을 넘어서는 우리의 영적 정체성을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은 거의 신경증 상태에 있으며, 자신이 몸의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산다. 현대인은 마음, 생각, 의도 안에서만 살아갈 뿐 운동감각 안에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이와 달리 몸의 에너지적 본성을 경험하려면 지금-여기 몸의 현존을 경험해야 한다. 서구문명은 산 몸(lived body)을 무시하고 경멸하게 만드는데, 그 뿌리는 기독교다. 썩어 없어질 몸 대신 영원을 보라고 가르친 기독교. 물론 비-기독교인도 사라진 몸이라는 주술에 걸려있기는 마찬가지다. 모리스 베르만(Morris Berman)은 서구사회의 몸에 대한 병적인 태도의 역사적 뿌리를 폭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 몸을 잃어버리면, 이즘(-ism)이 필요해진다. 즉, 몸의 생생한 실재를 느끼지 못하면, 자신을 위해 지적 확실성을 만들어내고 싶어진다는 얘기다. 결국 이데올로기란 육체적 살아있음에 대한 원초적 경험의 대체물이다. 반대로, 우리가 의식적으로 몸 안에, 몸으로서 살게 되면, 우리는 몸을 다르게 경험하게 되며, 이는 세계와 우리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그때 우리는 이데올로기라는 목발에 의존하기를 멈추고, 몸의 내적 지혜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땅으로 내려오기-


성사적(聖事的) 초월로서 섹스는 역사가 길다. 그것은 집단적 통찰 제공과 개인적 성취는 드물고 막다른길의 경험과 명백한 실패의 역사이기도 하다. 성사적 섹스는 위험을 수반하는 길이다. 그것은 활력과 자기통제를 겸비한 영웅적 인간을 요구한다. 성스러운 섹슈얼리티의 가장 큰 함정은 엑스터시가 자아-인격의 성취를 목적으로 한다는 오만한 착각이다. 이 경우 타자의 인격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결국 자신도 망치게 된다. 이 같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실용적 접근은 자아를 강화하기에는 진실로 자기-기만적이다. 복락의 실현은 자아가 몸-마음에 도사리고 있어서는 결코 성취될 수 없다. 초월의 욕망은 이기적 동기를 가지고는 추구되어서는 안 된다. 모리스 베르만은 영적 전통의 진짜 목적은 상승이 아니라 개방성, 감수성(vulnerability)이라고 하였다. 이는 위대한 경험이 아니라 극히 일상적인 경험을 요구한다. 카리스마는 쉽지만, 진짜 활동이 놓여 있는 현존, 자기 기억은 아주 어렵다는 것이다. 영성이란 의식의 전환된 상태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체현, 영혼의 육화에 관한 것이다. 몸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성스러움의 신전인 몸 안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이 고차적 가치는 전체성, 비-이기적 사랑, 창조성, 자발성의 이상으로 고양된 우리 존재를 감사고 있다.


오늘날 진짜 도전은 우리가 모두 아바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종교들은 이를, 시공을 초월하고 우주적 몸이 되는 것을 추구해온 셈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 자신의 불가피한 죽음, 우리 종(種)의 예정된 멸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적 변화와 사회의 변화를 향해 나아가도록 요구받고 있다. 이 과업은 일상에서 시작된다. 영성이 기이한 위업에 관한 것이라는 통념은 일상적 삶과 대립되는 금욕주의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는 일방적이고 가부장적인 견해다. 이와 달리, 우리는 단지 우리의 내적 초점의 방향을 돌려 우리가 되고자 하는 지점의 조건에 푹 잠긴 우리 자신을 의식적으로 감지하기만 하면 된다.


-일상에서 성스러움 찾기-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 안에, 몸으로서 온전히 존재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무수한 다른 존재들과 함께 육체적 실재를 공유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오늘날의 영성은 생태적이어야만 의미가 있다. 개인의 몸-마음과 무수한 타자들의 몸-마음을 이어주는 게 바로 에로스다. 생태적 영성은 생명의 단일성에 대한 깊은 인식에 토대를 둔다. 이 단일성은 사랑 행위에서 기념된다. 에로스는 탁월한 연결 에너지다. 에로틱한 열정을 통해 우리는 습관적 자아의 편협함을 극복하고 다른 존재들의 핵심에 다다를 수 있다. 전체성(whole)이야말로 성스럽다(holy). 우리는 성스러움을 ‘따로 떨어진 것’으로 여기는 데 익숙하지만, 이런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이는 고집스런 합리주의적 지성의 산물이며, 궁극적으로 이해 불가능한 우주를 억지스런 범주 속으로 구겨 넣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주의의 사제들은 신의 죽음을 말하고, 우리는 우리 안과 주변의 성스러움을 감지하고 그에 반응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다행히 오늘날 이런 이데올로기적 부조리를 교정하려는 노력이 일고 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탈현대적 삶 속에서 성스러운 회복하려 애쓰고 있다. 그 성공여부는 우리 개인들이 얼마나 기꺼이 도덕적 영적 삶을 추구하는지, 성스러움을 일상 속에서 실현하는지에 달려있다. 그렇지만 성스러움을 찾기 위해 멀리 순례를 떠날 필요는 없다. 그냥 자기 자리에 있으면 된다. 성스러움은 우리 안에, 우리 주변에 있으므로 그걸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런 내적 작업은 몸으로 시작된다. 몸을 영혼의 적으로 여겨서는 곤란하다. 그럴 경우 절단된 신(神)만 경험할 뿐이다. 그런 시각은 몸이 위대한 신비의 일부라는 걸 보지 못한다. 이 실패로부터 배우자. 몸-긍정의 영성에서 몸과 세계는 투명해진다. 우리 자신이 바로 우리가 찾던 집(Home)이고 그 집은 신성함으로 가득한 처소다.


-신, 여신, 그리고 친밀성-


저자는 비의주의와 신화에 대한 관심이 부활하는 걸 좋은 징조로 본다. 원형에 관심 갖게 해준 정신분석학자 융(Carl Gustav Jung), 신화를 자기-이해와 우주적 단일성에 대한 열쇠로 보게 해준 신화학자 캠벨(Joseph Campbell), 페미니스트 영성운동(여신숭배, Wicca*) 등을 극찬한다. 그리고 이런 훌륭한 전통을 신-탄트라가 계승하고 있다고 말한다. 신-탄트라, 남녀의 의례적 결합, 미투나*에서는 남신과 여신이 신화의 캔버스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온다. 성공할 경우 이 성스러운 의례는 참여자의 실제적 변화를 가져다준다. 탄트라에서 스승의 지도에 따른 경이로운 정확성에 따르는 성사적 절정억제는 누미노스한 에너지와 조화로 가득한 강력한 순간이다. 탄트라는 개인의 성장에 관한 인간적 이상이 아니라, 자아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친밀성을 갈망하며 개인에 대한 존중을 희망한다. 탄트라는 자기 애적 유사-관계성을 넘어선다. 친밀성은 우리가 체현을 받아들이는 데 달려 있다. 다른 사람을 알기 전에 먼저 자신을 알아야 한다. 우리 영혼의, 마음의, 몸의 숨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 그리고 타인의 감정과 함께 현존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친밀성은 상호 인격적 감정의 영역에서 수행되는 에로틱한 명령이다. 감정 없는 초월, 차가운 융합은 세계와 타자를 배제한다. 에로틱한 초월, 뜨거운 융합은 결정과 창조성의 통로다. 에로틱한 힘은 타자를 지배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생명-에너지를 강화하고 공유하는 것이다. 에로팅 파워의 통합적 상징은 머리, 엄지, 성기가 아니라 심장, 우주의 중심인 심장이다.


-신경증 너머의 의례-


메리 더글러스는 현대가 반-의례주의적이라고 지적한다. 과연 그럴까? 현대인은 성스러운 의례를 스포츠 등 온갖 세속적 의례들로 대체했을 뿐이다. 의례는 구조를 제공한다. 하지만 성스러운 내용이 없다면, 의례는 무의미한 행위로, 신경증으로 전락한다. 그것은 자발성과 창조성을 저해한다. 그렇다고 의례가 소용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의례는 절실하다. 의례는 성스러움의 현존을 인식하고 기념하는 행위다. 의식적으로, 성스러운 실재와 소통 속에서 행해질 때, 모든 행위는 의미 있고 생명을 고양시키는 의례가 될 수 있다. 물론 성생활도 그렇다. 앞에서 살핀 역사적 사례들이 바로 그 증거다. 이들로부터 배우고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개입하는 권위가 아니라 안내, 속 좁은 스승 마인드가 아니라 누구에서든 배우려는 제자다운 자세, 강박적인 자기-감시가 아니라 자기-지식, 원리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일관성 등이다. 특히, 새로운 영성은 가슴-머리, 몸-마음, 하늘-땅, 신-피조물, 자기-타자의 대립을 극복해야 한다. 생명이란 다채로운 팔레트라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실재는, 누미노스(Numinous)한 것은 모든 것 안에 거하며, 그것이 모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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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카(Wicca)는 영어 문화권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널리 퍼진 신흥종교 또는 종교운동이다. 위카는 영국 마법법(魔法法)이 폐지된 이후, 제랄드 가드너라는 영국 공무원에 의하여 1954년 처음 공표되었다. 그는 이 종교가 유럽의 기독교 이전의 종교 운동에서 비롯되었으며 수백년 동안 비밀리에 존재해 온 마법 문화의 현대적 존재형태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위카는 종종 “구 종교”라고 인식되기도 한다. 가드너의 주장의 진실성은 독자적으로 입증되지는 않으며 위카 이론은 1920년대 이후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위카는 자연주의적 성향과 여성중심적이고 생태주의적 관점 덕분에 더욱 각광받으며 그 교세를 급속히 확장하였다.


* 미투나(Mithuna)는 산스크리트어로 한 쌍의 남녀, 나아가서 그 성적 결합을 의미한다. 미투나상은 인도미술의 각 시대에 걸쳐서 다수의 조형 예를 보이며, 종교미술의 관능적인 일면을 대표하고 있다. 보드가야나 산치 등의 고대 초기의 불교조각에서는 단순히 남녀가 병립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데, 굽타 왕조 시대에는 키스하거나 몸을 접촉시킨 것이 있으며, 엘로라, 카주라호, 브바네슈와르, 크나라크 등의 힌두교 조각에서는 성적 결합의 다양한 체위를 나타낸 것도 많다. 힌두교에서는 성적인 에너지도 신성한 것으로 보고, 그것을 한쌍의 남녀로 상징했다. 또한 남신은 본질을, 신비(神妃)는 현상을 나타내고, 남신과 신비와의 결합은 본질과 현상과의 합일을 나타냈다. 또한 신과 인간과의 포옹은 종교적 환희의 상징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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