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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과 사회정의,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2012.12.4


제8차 종교문화 탐방을 다녀와서..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은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봉쇄 수도원이다. 수녀원은 사람들이 머무는 피정 숙소와 분리되어 봉쇄구역 안에서 수도자들이 생활하고 있다. 도로에서 올려다보았을 때, 산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수녀원의 적벽돌 건물은 하나의 성(城)처럼 보였다. 수녀원에 들어서자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깊은 산중에 피어나는 붉은 열매였다. 인적도 없이 푸른 하늘과 함께 도드라지는 붉은색이 참 아름다웠다. 이곳에서 나는 15년 전에 두 주간을 머물며 수도자들과 함께 노동하고 기도하며 수도생활을 체험했다. 오랜 시간동안 잠시잠시 이곳의 기도 소리를 그리워했다. 하루를 마치고 바치는 끝기도 후의 성모찬송가는 ‘영혼을 정화하는 샘물’과도 같았다. 나는 다시 느끼고 싶었다.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은 일본의 북해도 트라피스트 수녀원을 모원(母院)으로 1988년에 마산 수정리에 자리 잡았다. 수도자들은 침묵 안에서 오전 3시 30분에 일어나 하루 7번의 시간경을 바치고 기도와 노동을 통해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바치고 있다. 그간, 경제적 자립을 위해 안경 사업을 시작으로 수의, 이콘 판넬 작업 등을 거쳐 현재 쨈을 만드는 작업을 주요 사업으로 하고 있다. 실제 수녀원 안에서 맛본 쨈의 맛은 감미로왔다.

 


성당의 천정 건축 구조는 여느 일반 건물과는 많이 달랐다. 대들보에 해당하는 목재 지주는 가늘었고, 지붕을 받치는 목재가 대칭 구조를 이루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전(前) 원장인 장 요세파 수녀는 일본인 전문가에 의해 성당이 설계되고 지어졌다고 알려주었다.


도착한 후, 우리는 한국 가톨릭문화연구소 박문수 선생의 발표, “한국 수도원의 현황과 전망”과 수녀원 측의 “한국 시토회 소개” 강의를 들었다. 발표 시간 내내, 발표자와 수강자 모두의 쟁쟁한 관심과 열의가 강의실 공간을 가득 메웠다.


박문수 선생은 한국 가톨릭교회와 수도회의 정착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80년대 후반까지 한국 가톨릭교회는 수도회의 도움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중반에는 여성신학 연구의 활성화가 이루어졌다. 1950-1960년대에는 여성 엘리트들이 다수 수도회에 입회했으나 이후 사회 각 영역에서 여성 역할의 증대화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수도회 내에서도 수도자의 역할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일어났다. 특히 1980년대 중반에는 시민사회가 성장하여 교회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등이 주요 골자다. 또한, 박문수 선생은 1994-2000년 동안 수도회 평가 작업을 하며 만난 1,500여명의 수도자들을 통해 수도자의 정체성과 내적 변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발표자로 나온 장 요세파 수녀는 시토회에 대한 역사적 개관과 수도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 베네딕도 규칙은 인간 존재 안의 사막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은거하며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 서방 수도회의 기초가 되었다. 시토회는 이 규칙을 적용한 수도회로 본 수도회는 엄격한 규칙을 지키는 엄률 시토회다. 우리 안의 사막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가장 근원적이며 본질적인 수도생활의 원천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안에서 가난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수도생활의 정신은 의미가 없다. 이미 세상은 힐링이 열풍이고 영성이 대세를 이루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과거에는 이 부분을 교회가 떠맡았으나 이제는 세상 안에서도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안에서 관상 수도회가 존속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장 수녀는 봉쇄 수도원에 들어오는 기도 부탁 안에서 세상과 만나고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난다고 한다. 장 수녀의 진지한 문제의식과 논의는 계속 되었다.


엄률 시토회 트라피스트 수녀원은 봉쇄 수도원 안에서 정주(定住) 생활을 원칙으로 하나 4년 여간의 수정만 STX 조선소 건립 반대를 위해 봉쇄를 풀고 수정리 주민들과 항의 데모에 나섰다. 당시 트라피스트 수도회가 봉쇄를 풀고 거리에 나선 것은 모든 것을 다 잃은 할머니 안에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정의와 영성이 분리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이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동료 수녀들을 설득하고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수녀원 내부에서 겪은 갈등을 통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공유하고 살아가는 삶에 대한 통찰을 나누었다. 또한, 인간이 자기 비참을 보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기도하는 과정에서 늘 만나게 되는 잡념과 자기 생각, 자기감정에 휩쓸려 그것이 자신인 줄 알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오랜 기간 수도생활을 통해 굳건히 성장해 간 그녀의 내면과 진솔함 안에 잠시 머물며 한순간 자유로운 바람이 내 안을 스치고 지나가는 듯 했다. 이번 피정을 통해 나는 수녀원 안에서 인간의 얼굴을 본 것인가?


끝기도를 마치고 우리는 캄캄한 성당 안에서 기도했다. 다음날 5시 30분 아침기도와 묵상, 아침미사 중에 거행한 영성체 시간 동안에는 같이 간 일행 중 한 분이 실신했다. 모두들 걱정했으나, 수녀님과 신자 분들의 신속한 대응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깨어난 후, 잠깐의 대화에서 이 분은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한 순간에 느꼈다고 한다.


이튿날에는 미사 후에 ‘십자가의 길’을 둘러보았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예수의 빈 무덤을 상징하는 수녀회의 작품이었다. 동행한 수녀님이 이끼 낀 돌 사이 틈으로 보이는 작은 공간을 가리키며 우리 삶 안에서 부활하는 예수님을 상징한 것이라고 한다.


십자가의 길을 마치고 마산교구에서 운영하는 마산가톨릭 교육관에 갔다. 사방으로 탁 트인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피정과 교육 시설을 겸비한 큰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경관과 시설은 훌륭했으나 교육관 구석구석에 놓인 그림이나 공간 배치와 구성에서는 왠지 완성되지 못한 엉성함이 느껴졌다. 트라피스트 수녀원 안에서 느낀 영성과 기도의 숨결 때문이었을까. 나는 빨리 수녀원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마산 가톨릭교육관을 보고 트래킹 코스인 연육교를 다녀온 후에 우리는 수녀원에 돌아와 마지막 식사를 나누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성(聖)과 속(俗)을 한 번에 느끼게 해준 미묘한(?) 피정, 가톨릭교회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자주 잊고 사는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내 안에 새겨준 귀한 시간이었다. 종교문화연구소가 성(聖)과 속(俗)의 다리가 되어 15년의 시간을 이렇게 이어줄 줄이야 내 생애 처음 알았다.


최현주_
천주교 미래사목연구소 연구원 및 월간<사목정보> 영문편집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종교학과 박사과정
religiosa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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