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먹고 먹일 것인가

    : 21세기 한국불교의 또 하나의 화두      

 


 

 

           news  letter No.483 2017/8/15

 

 

 

 

 

 



     “스님이 고기 먹어도 될까?” 바로 어제 포털사이트를 통해 접한 뉴스 기사의 제목 앞부분입니다. 기사의 내용을 보니 지난달 20~23일 대한불교조계종 백년대계본부에서 개최한 ‘백년대계 기획 워크숍’에서 “티베트 스님들은 수행을 잘하는데 고기를 먹는다.” “율장에 따르면 일부 육식은 가능하다.”는 참석자 일부의 문제제기에 대해 “채식 문화가 세계적으로 융성하고 있는데 불교가 역행해서는 안 된다.” “(육식으로) 세계적 불평등이 생기는 것” 등의 반론이 오갔던가 봅니다.(《연합뉴스》, 2017.8.14, “‘스님이 고기 먹어도 될까?’.. 불교계는 논쟁중”.)


       그런가하면 올 6월 말에는 미국 뉴욕 맨해튼의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에서 백양사 천진암의 주지 정관스님이 뉴욕 주요 매체 기자들에게 사찰음식에 대해 설명한 일이 있다고 하네요. 이 행사는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 평창올림픽 조직위원회, 강원도 등 4개 기관에서 추진한 것이랍니다. 최근 뉴욕에서 ‘웰빙’이나 채식주의 바람을 타고 사찰음식이 가장 주목받고 있다는 점에 착안한 행사라는군요.(《연합뉴스》, 2017.6.23, “사찰음식 설명하는 정관스님과 에릭 기퍼트 셰프”.) 조금 더 검색해 보니 정관스님은 한국전통사찰음식연구회 부회장이자 Netflix 프로그램 ‘셰프의 테이블’ 시즌 3-1화에 출연한 것으로 유명세를 타는 중이신가 봅니다. 한국의 사찰음식에 대한 세계인의 사랑이 목하 불을 뿜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에서 운영하는 사찰음식 전문점 ‘발우공양’은 지난해 11월 미슐랭 가이드의 별 하나를 받기도 했다네요.(《경향신문》, 2017.7.6, “‘미슐랭 별’ 즐겁지만, 사찰서 ‘탐식’은 금물”.)


       ‘발우공양’은 저도 몇 번 이용한 적이 있습니다. 진짜 발우처럼 4개의 사발로 구성된 식기에 밥과 국, 그리고 서너 종류의 반찬과 물을 담아 먹는 뷔페 방식이었죠. 가격도 직장인의 점심 식대 수준으로 저렴했습니다. 벌써 5~6년 전의 일이니 그런 메뉴가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당시에도 벌써 공간을 달리 하여 판매하는 프리미엄 메뉴의 식대는 일반인이 접하기에 높은 수준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오늘 해당 식당의 사이트를 들어가 보니 여름 메뉴 가격이 세금포함 3만원에서 9만5천원 사이를 오가네요.


       이번 세기에 들어 한국의 불교계에서는(적어도 조계종단에서는) ‘음식’이라는 화두를 다시금 꺼내든 모양새입니다. 승단 내부에서는 육식금지의 오랜 계율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고민하고, 일반인에게는 한국 전통의(혹은 전통이라고 믿어지는) 사찰음식을 채식이라는 세계적인 트렌드에 맞추어 소개하는 양상입니다. ‘백년대계 기획 워크숍’에서 오간 논의의 일부처럼 사실상 초기 인도불교에서 육식이 반드시 금지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승려 자신이 직접 도살을 하거나 도살의 내용을 알고서 육식을 한 경우만 금지될 뿐이었지요.(《맛지마니까야》 중 〈지와까 경(Jīvaka Sutta)〉.) 승단의 육식금지가 일반화된 것은 대승불교의 동아시아 전승 이후부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금계가 얼마나 엄수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요.


       교계에서의 논의가 자꾸 ‘무엇을 먹을/먹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로 흘러가는 것 같아 이쯤에서 음식 자체에 대한 초기불교의 태도를 확인하고 싶군요. 위에서 언급했듯이 초기불교에서는 육식에 대한 금지가 구체적이지 않았습니다. 식사에 대한 계율들은 음식 자체에 대한 태도라기보다 승단을 질서 있게 유지하고 재가신도들과의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제반 문제들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의미가 강했지요. 사실상 음식과 식사에 대한 엄격한 태도는 음식 자체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그 맛과 양에 탐착함으로써 수행에 방해가 되는 것을 우려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부처는 음식에 대해 합리적이고 기능주의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극단적인 절식을 포함한 극심한 고행으로 생존의 위기에까지 봉착했던 부처가 함께 고행하던 동료들로부터 빠져나와 수자타 처녀가 제공하는 식사를 하고 기운을 차린 후 확인한 것은 “나는 덩어리진 음식을 먹고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물렀다.”(《맛지마니까야》 중 〈삿짜까 긴 경(Mahā-saccaka Sutta)〉)는 것이었으니까요. 부처는 극도의 절식으로 인한 허기가 오히려 감각적 욕망을 자극한다는 사실과, 적절한 음식의 섭취야말로 수행을 지속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상적인 음식의 섭취가 음식에 대한 탐착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물리적 에너지의 획득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주목하였던 것이지요.


       저는 이 부분에 주목하고 싶군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에너지의 근원으로서 음식을 바라보는 기능주의적인 태도 말이지요. 그것을 불교는 수행의 지속을 위한 물리적 토대로 받아들였습니다. 탐착으로 이어질 수 있는 향유가 아니라면, 그래서 그 향유를 위한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추구와 열망의 태도가 아니라면, 육식을 하든 채식을 하든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수행을 위한 물리적 토대로 육식이 정히 필요한 것이라면, 실현하기 어려운 육식금지의 계율을 걸어 놓고 암암리에 그것을 위반하기보다는(혹시 그런 경우가 있다면!), 아예 현실에 대한 인정과 계율의 과감한 재구성으로 정직함을 회복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물론 충분한 논의의 결론이 채식엄수로 귀결된다 해도 그 또한 의미 있을 것입니다. 채식이 충분히 현실적일 수 있고 필요하다고 결론난다면, 그렇게 결정하고 지키면 되겠지요. 모쪼록 한국의 승단이 수행을 지속함에 있어 건강하고 정직한 태도를 지니길 바랄 뿐입니다.


       세계적인 채식 트렌드에 발맞추어 사찰음식을 소개‧권유하는 추세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고 싶습니다. 승단의 육식금계 논의가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 관한 것이라면, 사찰음식의 소개와 유포는 ‘무엇을 먹일 것인가’에 관한 것이겠지요. 사실 불교에서 먹임의 주체는 승단이 아니라 재가였습니다. 승단이 원만한 수행을 위하여 먹는 주체라면, 재가는 그 승단을 잘 먹임으로써 승려들의 수행을 지원한 공덕을 돌려받고자 했지요. 재가는 승단에 음식을 공양하는 것 자체로 공덕을 쌓을 뿐 아니라, 그 대가로서 공양을 받은 승려들로부터 설법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먹음과 먹임, 무엇을 먹을 것인가와 무엇을 먹일 것인가의 문제는 불교에서 승단과 재가에게 분유된 수행과 공덕의 짝패였습니다. 수행과 공덕은 승단과 재가 사이에 호혜적으로 교환되는 가치이자, 수행이 공덕이 되고 공덕은 수행이 되는 순환의 기제이기도 했습니다. 먹이는 행위가 먹이는 자에게는 공덕인 동시에 수행이 될 수 있고, 그로써 먹는 행위는 먹는 자의 수행을 위한 토대이자 먹이는 자를 위한 공덕의 축적이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 새로이 승단이 재가에 대한 먹임의 주체가 되는 현상을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불교적 음식문화의 확산이 중생에 대한 제도 또는 포교의 일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다만 그것이 민족주의나 자본주의에 편승하는 것은 아니기를 바랍니다. 국가기관에서 한국문화의 세계화를 도모하는 데에 불교계가 앞장 설 필요가 있을까요. 아니, 한국문화는 왜 의도적 의식적으로 세계화가 되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한국문화란 과연 무엇일까요. 한국 불교계가 그 문제를 두고 충분한 고민과 논의를 해 봤으면 좋겠습니다.(과문한 탓인지, 그에 대한 깊은 논의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아직 못 들어서요.) 또 미슐랭 가이드의 별점이란 서구 유한계급의 입맛과 취향에 맞춰진 것일 가능성이 크지요. 거기에서 점수 좀 따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할까요. 분위기의 고급화 전략, 그에 따른 식대의 고부가가치. 설마 이런 것들이 사찰음식 소개와 유포의 최종 목표인 것은 아니겠지요. 진정 중생의 건강과 구제가 목적이라면 음식의 가격이 많이 비쌀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교계의 의도와 의지가 어디까지나 선할 것으로 믿습니다.


       한가득 심중의 말을 풀어놓고 나니, 어쩐지 이런 이야기들이 종교학자의 발언으로 적절치 않은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종교의 규범으로부터 자유롭게, 종교적 인간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기술하기. 종교학자의 소임을 현재의 저는 그렇게 정리하고 있기에, 혹시나 이 말들이 뜻하지 않게 새로운 규범을 제시하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이 글은 한 일반인, 또는 어떤 냉담자 불교신자의 인상비평 내지 넋두리라고 해 두겠습니다.

 

 

 

 

한용운(1879∼1944)은 《조선불교유신론》(1910)에서 승려의 결혼을 허용할 것을 주장하며, 결혼금지가 세상의 도리에 어울리지 않는 까닭의

 

로 인간 본연의 욕망인 식욕‧색욕의 엄금이 오히려 교화에 해로움을 들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승려의 육식이 별도로 주장되지는 않았기에,

 

필자는 2017년 8월 15일 발행된 뉴스레터의 내용 중 한용운이 이 책에서 대처식육(帶妻食肉)을 주장했다는 부분을 삭제한다.

 

                                                                                                                                                                                             (2017.8.17. 수정 재게)

 

 

 

 

 


민순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주요 논문으로 〈조선 초 법화신앙과 천도의례: 천태종의 전개와 관련하여〉, 〈조선 초 조계종의 불교주도적 자의식과 종파 패러다임의 변화〉, 〈정도전과 권근의 불교이해와 그 의의〉, 〈조선 세종 대 僧役給牒의 시작과 그 의미〉, 〈조선전기 승인호패제도의 성격과 의미 -중앙집권적 승적관리의 측면을 중심으로-〉, 〈조선 초 불교 사장(社長)의 성격에 관한 일고(一考)〉, 〈조선전기 도첩제도의 내용과 성격 -『경제육전』 체제와 『경국대전』 체제를 중심으로-〉, 〈전환기 민간 불교경험의 양태와 유산: 대한불교진각종과 대한불교천태종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