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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484호-왕릉 정자각(丁字閣)에 대한 단상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7. 8. 22. 12:59

 

왕릉 정자각(丁字閣)에 대한 단상      

 

 

       news  letter No.484 2017/8/22

 

 

 


       왕릉을 답사하면 명당의 좋은 기운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 나 같이 둔한 사람은 쉽게 그 좋은 기운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나는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나 석물에 마음을 뺏겨 그들을 사진에 담기에 바쁘다. 지난 2년 동안 운 좋게 나는 경기도에 있는 왕릉을 두루 다니며 볼 기회가 있었다. 이전에도 왕릉에 올 기회가 있었지만 석물이나 건축을 제대로 보진 않았다. 어쩌면 이에 대한 연구는 미술사나 건축사의 영역이라 여겨 외면한 측면도 있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고, 또 보는 가운데 유사한 것과 다른 점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나름 흥미를 끌었다.


       왕릉의 건축물은 봉분을 비롯하여 정자각(丁字閣), 수복방(守僕房), 수라간(水刺間), 비각(碑閣), 재실(齋室) 등 매우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 당연 으뜸은 정자각이다. '정자각'이란 위에서 바라보면 '丁'자 모양으로 생긴 집이란 뜻이다. 실제 건물은 가로로 ‘一’자 형태이지만 그 앞쪽 가운데에 지붕을 내어서 행랑 같이 만든 형식이다. 능마다 세워진 정자각 중에서 나의 짧은 미학적 안목에도 가장 멋져 보이는 것은 숭릉(崇陵)의 정자각이다. 숭릉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이다. 정전이 좌우 5칸이라 3칸으로 된 것보다 폭이 넓어 날개를 펼친 것 같다. 배위청 역시 3칸으로 길게 뻗어 부족함이 없다. 좌우 5칸의 정자각을 서오릉의 익릉에서 보고 감탄한 적이 있다. 익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경사가 정자각에 위엄을 더하였다. 또한 지붕과 기둥의 비율이 비슷하게 느껴져 육중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 숭릉은 높고 기둥 덕분에 집 전체가 날렵하고도 화려한 역동감이 느껴진다. 그 날렵함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팔작지붕에서 비롯한 것이지 않을까라고 생각도 들었다.


       이런 건축미 외에도 숭릉의 정자각은 왕릉 조성에 새로운 전환점을 보여주는 곳이다. 현종의 국장 때부터 발인 후 능에 도착한 시신이 정자각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 이전 국장에서는 재궁(梓宮, 왕 또는 왕후의 관棺)이 능에 도착하면 정자각이 아니라 영악전(靈幄殿)이라는 임시 장막에 머물렀다가 지하 현궁(玄宮, 왕릉의 지하 묘실墓室)에 묻혔다. 이는 정자각을 흉례의 부정적 기운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다. 그런데 숙종은 현종의 능을 조성하면서 영악전을 만들지 않고, 재궁을 정자각에 곧바로 안치하였다. 이로써 정자각은 재궁을 안치하는 빈전(殯殿)의 역할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자각은 흉례와 길례가 시간을 두고 교차하는 공간이 되었다. 결국 정자각은 죽음의 부정과 제사의 길함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무덤의 성격을 담아내었다.


       한편, 정자각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혼령은 어디에 있을까? 『국조오례의』에서는 정자각을 '침전(寢殿)'이라 규정하였다. 침전이란 혼령이 일상적으로 기거하는 곳을 가리킨다. 침은 묘(廟)와 상대되는 공간이다. 묘가 제향 등의 공적인 의식을 거행하는 곳이라면 침(寢)은 일상적으로 기거하는 곳이다. 이것은 생활공간과 업무공간이 구분되었던 생시 모습을 모방한 것이다. 그러하여 침전에는 의복을 봉안하고 침소의 형태를 모방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대행왕의 혼령은 평소에 정자각에 머물고 있을까? 이 물음을 보다 구체적으로 한다면 혼령은 평소에 무덤에 있을까, 정자각에 있을까로 되물을 수 있다. 전자에 의하면 평소 혼령은 무덤에 있다가 제향 때 정자각으로 이동하는 형세이고, 후자는 정자각이 그의 생활공간이 된다.


       이와 관련되어 조선 성종대 재미있는 논쟁이 있었다. 조선초기에는 왕릉의 봉분에 탈이 생겨 수리를 할 때면 가까운 곳에 장막을 짓고 정자각에 있는 평상을 그곳에 옮긴 후 수리를 하였다고 한다. 이는 혼령이 정자각에 상주한다는 관념의 표출이다. 이와 달리 당시 좌참찬 임원준(任元濬, 1423~1500)은, 혼령이 능에 있고 정자각은 비어 있으므로 혼령을 정자각으로 옮겨 모신 후 능을 수리하면 된다고 하였다. 논의 결과 임원준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즉, 평상시 혼령은 무덤에 있다고 간주된 것이다.


       정자각의 내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운데에 큼직한 제상(祭床)이 있고, 그 뒤에 평상(平床)의 자리가 있다. 제향 때 혼령이 임하는 곳이다. 그 뒤쪽 벽에는 여닫이문이 있는데 이를 신문(神門)이라 한다. 제향 때 신문을 열면 대개 봉분이 보이게 되어 있다. 정자각과 봉분 사이에는 신교(神橋)와 신로(神路)가 있다. 신이 오가는 다리와 길이라는 뜻이다. 이에 의하면 평소 혼령은 현궁에 거하였다가 제향 때면 정자각으로 오는 구성으로 짜여 있다. 침전이라고 보다 제향 공간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는 유교 이데올로기와 무관하게 시신을 떠나지 못하는 혼령의 속성이 반영된 것일 수 있다. 건물은 산 자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죽은 자의 공간이다. 우리는 공간을 통해서 혼령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에 건축은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짓는 것이다.

 

 


이욱_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주요 저서로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조선왕실의 제향 공간-정제와 속제의 변용》, 《조선시대 국왕의 죽음과 상장례-애통존숭기억의 의례화》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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