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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519호-담 쌓기와 토대 희생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8. 4. 24. 16:45

 

담 쌓기와 토대 희생제의

            

                   news  letter No.519 2018/4/24                  

 

 

 

 

 

         
      "튀링겐의 전설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람들은 리벤슈타인 성을 견고한 난공불락의 성으로
      만들기 위해 어미에게 돈을 주고 아이를 사왔고, 성벽을 만들 때 그 속에 아이를 집어넣었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는데,석공들이 일할 동안 아이는 케이크를 먹고 있다가 외쳤다. “엄마, 
 난 엄마가 아직 보여요.” 좀 있다가 아이는 소리쳤다. “엄마, 난 엄마가 아직 조금 보여요.”
 석공들이 마지막 돌을 쌓아올렸을 때아이는 울부짖었다. “엄마, 이제는 엄마를 전혀 볼 수 없어요.” 
                                                                                    E. B. 타일러, 『원시문화』 중에서.

 


       1. 담이 무너졌다. 시골집을 보러 왔다가 첫눈에 반했던, 초록 덩굴식물이 우거져 있던 우리 집 예쁜 담이 무너졌다.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바라던 숙원사업으로 마침내 하천공사를 하게 되었고, 하천 경계에 위치한 담을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포크레인의 삽질 몇 번에 사라진 담벼락으로 마음은 황량해졌다. 이제 새로 담을 쌓아야 한다. 생각할 일들이 많다. 누가, 어떤 재료를 사용해서, 어떻게 담을 쌓을 것인가. 저렴한 철제 펜스부터 붉은 벽돌담에 이르기까지 선택지는 많지만, 재료의 선택과 기술자 및 인부를 부르는 일은 모두가 자본에 의해 결정되는 일이다. 결국 담 쌓는 일은 얼마나 많은 돈을 들여야 하느냐의 경제적 문제가 되고, 그러니 골치가 아파졌다.


       2. 문득 『원시문화』에 담 쌓기와 관련된 내용이 있었던 게 기억났고, 책을 다시 펼쳐보다가 위의 이야기를 다시 읽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우리말로 옮기면서, 그것이 한낱 전해오는 전설이라 해도 나는 마음이 아팠다. 타일러에 따르면, 전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는 성벽을 견고하게 만들고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어린 아이를 산 채로 벽 속에 유폐해야 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돈이 궁한 어미에게 어린 아이를 사와서 –얌전히 있으라고- 케이크와 장난감 몇 개를 쥐어주었고, 인부들은 그 주위로 빠르게 벽을 쌓아 올렸다. 아이는 자기 주위로 벽이 올라가는 동안 케이크를 먹으면서, 그래도 계속 눈으로 어미를 찾으며 어미를 부른다. 그러나 아이의 눈높이를 넘어 점점 더 벽이 올라가고, 마침내 완전히 갇힌 아이는 울부짖는다. “엄마, 이제는 엄마를 전혀 볼 수 없어요.” 산 채로 갇힌 아이는 그곳의 영에게 바치는 희생물이 되거나, 자체로 성벽을 지키는 수호 귀신이 될 것이다.

       타일러가 수집한 세계 각지의 민담과 전설을 읽다보면, 한때 담이나 성벽 등을 쌓을 때 사람들이 매우 중요시한 것은 담 쌓기 자체라기보다는 담 쌓기에 선행하는 의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이른바 ‘토대 희생제의’가 그것이다. 벽이나 다리를 세우고 교회나 주요 건물을 지을 때 토대가 견고해지려면 인간의 피나 산 채로 유폐될 희생자가 필요하다는 관념이 세계 도처의 민간전승에서 나타날뿐더러, 그러한 목적을 위해 사회적 약자인 어린아이나 여자, 노예, 심지어 술 취한 거지가 죽임을 당하거나 산 채로 벽 속에 가두어졌다는 이야기가 광범위하게 전해진다. 희생제의의 역사에서 흔히 나타나듯이, 그러한 희생자의 대체물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독일에서는 텅 빈 관을 벽 안에 넣었고, 덴마크에서는 교회의 제단 아래 벽 속에 양을 넣었다고 한다. 또한 산 사람 대신 양이나 닭 등을 죽여서 그 피를 토대에 ‘먹이는’ 이야기들도 나타난다. 이러한 잔인하고 끔찍한 이야기들은 왜 세계 도처에서 되풀이해서 등장한 것일까?

       타일러가 제시한 설명은 토대 희생제의를 수행한 자들의 마음 상태에 초점을 맞춘다. 타일러에 따르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담을 쌓을 때 중요했던 것은 토대를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영들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생명을 바쳐서 영들을 달래거나 혹은 희생물 자체를 해당 건축물의 수호 귀신으로 만들기 위해 주춧돌에 피를 먹이는 관습이 세계 도처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한편, 그러한 토대 희생제의의 실제적 효과에 주목할 때, 우리는 다른 각도에서 현상을 바라볼 수 있다. 르네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희생제의의 기능, 곧 “도처에 퍼져 있는 [내적] 분쟁의 씨앗들을 희생물에게로 집중”시키는 효과에 주목했다. 그의 말은 토대 희생제의가 실행된 사회의 상태를 생각해보게 한다. 이렇게 볼 때, 토대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바쳐진 어린아이나 여자, 노예, 혹은 그 대체물인 닭이나 양의 피는 약자를 희생시킴으로써 집단 내부의 갈등을 봉합하고 사회적 통합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상징적 장치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한 논의는 뒤로 미루자. 어떤 해석을 따르더라도, 우리는 토대 희생제의에서 약자를 대상으로 한 피의 ‘폭력’을 통해 폭력 너머의 평화와 안전을 희구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저변에 놓여 있는 (쌓아올린 담, 교회, 성벽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읽을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건축물의 토대를 사람이나 닭의 피로 적시는 토대 희생제의의 관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만 쌓아올린 무언가가 무너질까 두려워서 사회적 약자를 희생시켜서 자신들의 안전/안정을 희구하는 현상은 오늘날에도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런 굴레를 벗어날 순 없을까.


       3. 담 쌓는 것 같은 ‘사소한 일’과 관련된 절차에서도, 사람이 무엇을 중시하는지가 드러난다. 사소한 일에 의미가 부여되고 얽히면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 우리는 골치 아픈 경제적 계산만으로 담 쌓기를 고민하다가, 방향을 급선회하기로 했다. 새로운 담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담장의 새로운 의미였다. 그리고 토대 희생제의의 상징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의미는 약자들 사이의 서로 돕는 관계 속에서 나온다.

      중요한 일에 중요한 만큼 공을 들인다. 옛 사람들이 담 쌓기 전에 생명을 희생시켜 영들에게 바쳤다면, 혹은 그러한 명분으로 갈등을 미연에 봉합했다면, 우리는 담 쌓기 전에 음식을 장만해서 주위의 (가진 것 없는) 친구들을 초대하기로 했다. 농번기라서 한창 바쁠 때지만 친구들은 짬을 내서 와주었고, 우리는 밥을 나누어 먹으며 담에 대해 함께 궁리했다. 간단히 결론을 적자면, 우리는 인부를 고용하지 않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느리고 어설프더라도 직접 담장을 만들기로 했다. 담이 무너졌고, 벌거숭이마냥 우리는 다시 지극히 약하고 무능한 채 오도카니 남겨졌다. 그러나 우리는 약함으로 다시금 서로와 연결되었고, 새로 세워진 담장을 볼 때 우리는 아마 고마운 친구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될 것이다. 얼기설기 담을 쌓으면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틈새로 세상을 볼 것이다.

 

 


유기쁨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저서로 <<생태학적 시선으로 만나는 종교>> 등이 있고, 최근 논문으로는 <잊힌 장소의 잊힌 존재들 : 생태적 위험사회의 관계 맺기와 종교>, <현대 종교문화와 생태 공공성 : 부유하는 ‘사적(私的)’ 영성을 넘어서>, <장소에 기반을 둔 풀뿌리 종교생태운동의 모색 : 지리산 실상사의 사례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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