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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폴에 대한 회상: 나의 떠도는 삶을 생각한다


                                news  letter No.581 2019/7/2 

 

 

    


나이폴(Vidiadhar Surajprasad Naipaul: 1932-2018)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로서 작년 8월 11일에 작고했다. 우리에게 별로 낯익은 이름도 아니고 뚜렷한 인상도 남기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는 각별한 영향을 끼쳤다. 영국 국적의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뿌리는 인도에 있다. 그는 중남미의 트리니다드 토바고 섬 출신의 인도 이민자의 후손이다. 할아버지가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트리니다드에 이주해 왔다. 구한말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이주한 우리의 선대와 다름이 없다. 아버지는 트리니다드 섬의 신문기자 노릇을 했고 나이폴은 그곳 현지 대학교를 졸업하고 영국에 발을 디디게 된다. 작가로 등단하기 전, 그의 배경과 이력은 이것이 모두다.

 

이민자의 자식으로 간신히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연구 장학생으로 선발된 그는 무엇 하나 확신을 지니고 미래를 설계할 수 없었다. 이민자의 미래란 늘 불안정하고 자신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는 일, 그것을 일기처럼 기록하는 일은 그가 유일하게 확신을 지니고 진행한 작업이었다. 그것은 자신을 은폐하며 동시에 자신을 표출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특히 자신의시각에 비친 사물을 표현하는 일은 자기 세계의 구축과 자기 삶의 의미를 객체화시켜 주었다. 그의 서술은 뛰어났다. 그래서 소설을 썼고 작가가 되었다.


그의 소설의 소재는 트리니다드 이민자들의 우스꽝스런 행태였다. 그는 주변에 널려 있던 삶의 모습을 하나씩 포착했다. 양복점의 옷 수선공, 가구수리공 겸 대장장이, 의사지망생이었으나 위생관리인 시험에 3번씩 낙방하여 거리의 청소부가 된 젊은이 등등. 모두 그가 매일매일 접한 주변 삶의 모습들이다. 주인공들의 이름마저 <<카사블랑카>>의 주역을 맡은 미국 영화배우 ‘보가트’나 영국의 유명한 시인 ‘워즈워드’처럼 자신들이 되고 싶어 한 인물 이름이다. 그의 출세작이라 할 <미구엘 거리>(Miguel Street)는 그렇게 태어났다. 그는 소년기의 추억과 이민 온 땅에서의 소외감, 그리고 구질구질한 과거를 되살리는 기억술 같은 작품을 썼다. 그 속에 나오는 이들은 우스꽝스럽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민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유머 감각과 미소 없이는” 달리 어떻게 평가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나이폴은 이런 제3세계 주변인에 대한 관찰과 기록을 통해 작가로 성공했다. 그의 세밀한 관찰력은 적확했기에, 소설보다는 오히려 논픽션적 문명기행의 글에서 더 뛰어났다. 그래서 그의 문명론적 기행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그의 문화비평은 소설을 닮아 구체적이고 상황적이고 직설적이었다. 그의 가계의 뿌리인 인도문화에 대한 서술, 그리고 자신의 출생지인 서인도제도에 대한 기록은 잔인할 정도로 현장을 꼬집었다. 예컨대 <인도: 상처받은 문명>(India, A Wounded Civilization), <믿는 자들 가운데서: 이슬람 여행>(Among the Believers, An Islamic Journey), <에바 페론의 귀환: 트리니다드의 살생>(The Return of Eva Peron with the Killings in Trinidad)은 종교에 갇힌 전통 문명에 대한 적나라한 까발림이고, 현장에 대한 혹독한 비판이었다.


자신을 배출한 문명, 자신의 모태를 바라보는 나이폴의 시각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자신이 저 버리고 떠난 고향에 대한 나이폴의 감회는 “오, 고향/민족이여”라는 표제 아래 향토적인 것에 코를 박거나, 거꾸로 “퇴락의 문명”으로 저주하는 배설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나이폴을 통해 오히려 내 문화와 내 삶의 모습을 마주보게 되었다. 미주 이민 초기의 나는 오직 가족의 생계만을 위해 몰두해야 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인가 나는 그동안 접어두었던 내 자신을 자각하고 나의 한심한 모습을 돌이켜 보게 되었다. 나이폴의 관점은 나를 일깨웠다. 미주 이민자인 나는 그에게 동류의식을 느꼈고 그의 작품은 나의 거울과 같았다.


자기가 살고 있는 현장의 모순은 쉽게 눈에 띈다. 그러나 그걸 함부로 내 뱉으면 독이 되어 돌아온다. 그것이 미주 동포들이 내뱉는 배설물 같은 한국비판론, “미국/서양은 그렇지 않은데”로 말문을 열고 자신이 떠나버린 한국을 씹어뱉는 화법이다. 나도 그런 현장에 위치하고 있었다. 누군가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나 촌평을 발설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듣고 있다가, 스스로 우스꽝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한인의 이런 이민 생활 태도는 나이폴이 꼬집었던 그들의 태도와 별로 다르지 않다.


고국의 일류고와 명문대학 출신이어도 이 이민자들의 하이테크는 세탁업일 뿐이다. 한인 무역의 대종은 식료품상과 잡화가게일 터이고, 이 업종의 길드조직 책임자는 한인사회의 유지가 된다. 그들 대부분은 한인회장이고, 평통위원으로 선임되며, 그중에는 한국과의 정치적 연계를 자랑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또한 기독교는 언필칭 한인 이민자에게 정신적 위안과 삶의 보람을 주는 종교로 알려져 있다. 어느 지역을 가도 교회는 그 지역의 어느 단일한 한인 업종의 수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교회라는 업종이 이민사회에 범람해 있고 목사직은 과잉 상태다. 이렇게 보면 한인 이민 사회에 <미구엘 거리>와 같은 나이폴 소설이나, 종교에 대한 그의 문명비평론을 능가할 소재는 널려있는 셈이다. 내가 그의 소설과 기행문에 매료될 충분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매혹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우리가 속한 제3세계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특히 서구적 시각에서 낙후된 지역의 모순을 지적하는 일은 쉽다. 예컨대 서구와 비슷한 민주주의를 한다고 하면서 드러내는 모순덩어리의 정치를 희화화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런 측면에 대해 나이폴이 퍼붓는 매서운 지적은 서구적 입장에 서서 제3세계를 까발리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했다. 비서구 지식인 가운데 그런 사람이많기 때문이다. 자신을 세련된 서구문명과 일체화하고 비서구 지역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비판하는 자들, 곧 “서구 따르기”의 자리에서 비서구 지역의 “결핍”을 질타하는 분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한참 비판의 대상으로 떠오른 지만원씨는 미디어에 돌출되었을 뿐, 실제로 이런 분들은 도처에 존재한다.


그러나 내 자신이 바로 그런 비서구 지역 출신이고 그 문명의 소출일 경우, 그런 나의 고국과 문명을 비판하면 “배신자”나 “매국노”로 매도된다. 나이폴 역시 이 트랩에 걸려있다. 그가 영국의 기사 작위를 받고, 서머싯몸상,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맨부커상 등 수많은 상을 타자 그에 대한 비판의 화살이 날라 왔다. 역시 맨부커상을 수상한 살만 러쉬디(Salman Rushdie)의 비판이 가장 혹독했는데 그를 한마디로 “서양의 개”라고 비판했다. 두 사람 모두 인도에 뿌리를 두고 이슬람 문명에 대한 비판을 한 점에서는 같은 처지에 서 있다. 하지만 살만 러쉬디는 파트와(Fatwa) 즉 살해의 표적이 되면서도 이슬람 비판을 거침없이 했다. 자기 문명에 대해 똑같이 비판했지만 그들의 방식이 전혀 다른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이자 팔레스타인의 변호자로 자처한 에드워드 사이드도 “대단히 의도적으로 스스로를 서구적 증인”이기를 자처한 작가로 나이폴을 몰아세웠다.


그러나 이런 험악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이폴의 편을 선택하였다. 나는 그의 사물을 보는 시각과 그의 자세에 공감했다. 그가 손쉽게 수용할 수 있었던 이념들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이거나, 아니면 제3세계에 대한 변호, 또는 핍박받는 소수인의 입장을 변호하고 나서는 노엄 촘스키적 변호론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나이폴은 이런 이념들을 외면한 듯, 무엇보다 자신의 눈에 띄는 주변을 세밀히 관찰하고 그것들을 담백하게 서술하려 했다. 그리고 사물과 사건에서 일어나는 모순과 충돌을 예각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사이드와 러쉬디는 그런 프레임마저 또 한 번 “너의 이념의 표백”이 아닌가 하고 힐난했다. 또 다른 어느 평자는 나이폴에게 “당신은 허공에서 글을 쓰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라며 혹독한 비판을 날렸다. 사물의 표출은 보는 사람의 특정한 입장 없이는 표현이 불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나이폴은 타자를 무시하고 타인을 향한 분노를 터뜨린 다음 되돌아오게 마련인 후유증을 앓는 대신, 오히려 자신을 무시하고 자조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렇게 자기를 웃기게 만들고 웃을 도리 밖에 없는 자신의 문명을 노출시켰다. 내가 내 문화와 내 자신을 희화화한 것이다. 그렇게 세밀히 관찰하고 뼈아프게 서술하고 허탈하게 희화화 할 수 있는 것은 나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나의 입지”는 박탈되고 내 자신이 그런 대상이 되고 만다. 나를 웃기게 만든 일을 다시 되돌려 생각하게 하는 작업, 모순을 느끼며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은 누구를 향한 것인가? 내 자신에 대한 모멸감인가? 소위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역행인가?


서구적 비판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반격으로 나선다면 사이드 혹은 러쉬디의 주장에 동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이폴이 적나라하게 노출시킨 제3세계의 낙후성과 모순은 타자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자기를 향하고 있다. 나의 현실의 아픔의 노출이다. 그것이 오늘의 제3세계 지식인의 현주소이기도 하고 우리들 자의식의 틀이기도 하다. 그것이 우리의 현장이고 나이폴의 현실이었다고 생각한다. 뒤틀린 심정에서 반격을 가하고 자기변호를 강화한다면 아마 손쉽게 또 다른 사이드와 러쉬디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현장의식의 처절함은 오히려 자기 안에서 극복의 가능성을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자기모멸을 받아드리는 일이 식민지 근대성의 갖가지 이유를 만들었다면 과연 나이폴의 글과 자세는 어느 곳에 위치시킬 수 있을까? 나이폴처럼 “나를 우습게 만드는 일”이 과연 자기모멸일까, 아니면 자기극복을 위해 필요한 몸짓일까? 내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나의 화두이다.


 


이민용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주요 논문으로 <서구불교학의 창안과 오리엔탈리즘>, <학문의 이종교배-왜 불교신학인가>, <불교에서의 인권이란무엇인가?>, <백교회통-교상판석의 근대적 적용> 등이 있고, 역서로《성스러움의 해석》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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