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경계의 현대종교
: 불교와 요가의 결합, 도전인가 기회인가?
news letter No.582 2019/7/9
제5회 ‘UN 세계요가의 날(International Yoga Day)’ 공식 한국행사가 2019년 6월 16일(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진행되었다. 2014년 9월 27일 제69차 UN총회에서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제안함에 따라, 그해 12월 193개 회원국 중 175개국의 찬성으로 6월 21일이 ‘세계요가의 날’로 제정·선포되었다. 2015년 제1회 ‘세계요가의 날’을 시작으로 매해 전 세계의 수억 명의 요가인이 이 날을 기념하여 요가시연과 수련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광화문광장에서 진행된 제5회 ‘세계요가의 날’에는 국내외 54개 단체 2,225명의 요가인이 참가했으며, 일반 관람객도 무려 5,000명이 참관하는 등 페스티벌 형식으로 성황리에 진행되었다.(홈페이지 http://idayofyoga.or.kr/home/index.php) 대한민국 대통령도 대한민국정책브리핑을 통해 이 날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낼 정도였다.
요가가 이처럼 세계인과 한국인의 주목을 끈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2014년 ‘UN 세계요가의 날’ 제정 요청을 한 모디 인도총리의 연설문에서 잘 드러난다. “요가는 고대 인도 전통으로부터 가치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유산입니다. 요가는 몸과 마음의 합일, 생각과 행동의 합일, 계획과 성취의 합일을 이뤄 내며, 인간과 자연의 조화이자 건강과 웰빙(health and well-being)에 대한 전체적인 접근방식(holistic approach)입니다. 요가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우리, 세상, 그리고 자연이 하나라는 것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가 정신을 통해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이 바뀌고 의식이 형성됨으로써, 우리가 기후변화(climate change)에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세계요가의 날’이 제정되도록 다 함께 노력합시다.”
이 연설문에서 관심을 끄는 점은 ‘탈종교성’과 ‘세계화’이다. 요가가 해탈을 지향한 인도의 종교적 수행 전통에서 유래했지만, 인도의 종교적 세계관을 이루는 업(業, 카르마), 윤회, 브라만 등의 단어는 배제한 채 설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가가 인도의 전통으로부터 해체되어 탈전통화(detraditionalize), 보편화(universalize)의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요가는 건강·웰빙·환경 등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과 가치에 부응하여 자신을 전지구화(globalization)하고 탈종교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세계요가의 날’ 행사에서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세계적으로는 물론, 한국에서도 요가가 점차 불교와의 융합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가의 세계적 유행과 함께 불교 내부에서도 요가와의 융합을 모색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2004년 〈불교와 요가(Buddhism And Yoga)〉1)라는 글에서 안느 쿠쉬맨(Anne Cushman)2)은 서로 어색한 관계에 있던 ‘요가’와 ‘불교명상’ - 즉 비파사나(Vipassana), 선(Zen), 티벳불교수행 - 이 점차 동반자적 관계로 인식되고 있다고 소개하였다. 그녀는 불교와 요가의 융합을 시도한 책 가운데 프랭크 쥬드 보치오(Frank Jude Boccio)의 《마음챙김을 위한 요가(Mindfulness Yoga, 2004)》(학지사, 2009), 요가와 티벳 불교를 20년 넘게 수행한 신디 리(Cyndi Lee)의 《요가의 몸, 붓다의 마음(Yoga Body, Buddha Mind, 2004)》, 티벳 승려 계를 받은 마이클 로치(Michael Roach)의 《티벳의 요가문헌(The Tibetan Book of Yoga, 2004)》을 완성도 높은 책들로 소개하고 있다.
불교와 요가의 융합은 세계적인 흐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요가 수행에 대한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한국불교도 요가와의 융합 가능성을 모색해왔다. 한국불교학회가 2011년 2월 동계워크숍을 “요가수행과 불교명상”이라는 주제로, 2012년 2월 동계워크숍을 “불교수행과 요가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진행했던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후에도 언론과 학계에서 불교와 요가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모색이 시도되었다. 제도적 차원에서는 4년제 사이버대학인 원광디지털대학교(2002년 3월 개교)에서 ‘요가명상학과’를 개설했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에서는 아예 2014년 3월 “융합요가학과”를 신설하고, 국내에서 요가를 대중화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원정혜 박사를 겸임교수로 초빙했다.
그렇다면 기존 종교의 경계를 허무는 이런 흐름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이와 같은 현상이 불교적인 것(정체성)에 부합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등장하리라는 것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실제로 노르웨이 오슬로(Oslo) 대학의 노토 텔(Notto R. Thelle)은 〈불교의 인간화: 불교의 서구적 적용의 측면(2010)〉3)에서 ‘과연 그것을 불교라고 볼 수 있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으로 존 카밧진(Jon Kabat-Zinn)의 ‘마음챙기기(Mindfulness)’ 명상처럼 전통적·종교적 요소를 뺀 불교의 서구화·현대화가 종교 특유의 에너지를 줄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으로 평가했다.
이와 달리, 스웨덴 달라나(Darlarna) 대학의 프리스크(Liselotte Frisk)는 이런 변화가 불가피하고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마음챙김 수행: 불교로부터 포스트세속사회의 세속적 주류로(2012)〉4)에서 ‘종교’란 고정된 개념이 아님을 강조한다. 모든 종교(적 요소)들이 새로운 환경에 처하게 되면 새로운 세속적 해석에 따라 변해온 것은 당연하며, ‘불교’와 ‘요가’ 역시 마찬가지라고 해석한다. 나아가 오늘날의 문화를 종교와 세속의 구분이 무의미한 ‘포스트-세속성(post-secularity)’의 시대라고 부르며, 종교개념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워질 것을 제안한다.
한국에서도 ‘불교’를 고정된 종교적 실체로 본다면 불교와 요가전통 사이의 융합이나 대화에는 장애가 등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질문을 바꾼다면 대답은 달라질 것이다. 질문을 바꾼다면 문제의 본질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주로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불교의 정체성에 대해 물어왔다. 그러나 이제 “불교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물음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열린 시야와 개방적 시도는 어쩌면 과거에 여러 종교가 새로운 문화와 지역에 적응하기 위해 현지문화를 포용하며 스스로를 재구성해냄으로써 활력을 되찾았던 사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일지도 모른다.
한국불교의 현대화·대중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20세기 초반부터 100여 년간 계속되어 왔지만 불교가 그에 부응하는 성과를 냈는지는 미지수다. 정체성만 고집할 경우 변화하는 현대성과 분리되어 삶 속에 의미가 충만한 종교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 불교의 핵심이 무엇인지 그 중심만 잃지 않는다면, 요가를 통해 나타나는 대중의 요구 – 그것은 동시에 현대인들이 상상하는 새로운 이상적 인간형의 모델이기도 할 것이다 - 와 결합하는 것은 불교의 외연을 넓히고 불교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작은 계기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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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s://tricycle.org/magazine/buddhism-and-yoga/
2) 쿠쉬맨은 프린스턴 대학 비교종교학 학부 출신으로, 요가와 불교 명상을 결합한 소위 ‘마음챙김요가(Mindful Yoga)’의 지도자이자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3) “The “Humanization” of Buddhism: Aspects of Western Adaptations of Buddhism”, Ching Feng, n.s.,10.1-2(2010-2011).
4) “The practice of mindfulness: From Buddhism to Secular mainstream in a post-secular society”, Scripta Instituti Donneriani Aboensis, 2012; 24.
송현주_
순천향대학교 교수
논문으로 <서구 근대불교학의 출현과‘부디즘(Buddhism)’의 창안>,<한용운의 불교·종교담론에 나타난 근대사상의 수용과 재구성>, <근대 한국불교의 종교정체성 인식: 1910-1930년대 불교잡지를 중심으로>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