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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583호-서울 이야기 첫 번째, 살곶이와 뚝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9. 7. 16. 20:54

서울 이야기 첫 번째, 살곶이와 뚝섬


  news  letter No.583 2019/7/16 




서울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의 백운동 계곡(현 서울 종로구 청운동 6-6, 자하문터널 남쪽 출구 부근)에서 시작되어 서촌 일대를 흐르는 백운동천(白雲洞川)은 북악산 동남 자락(서울 종로구 삼청동 1-11 일대)에서 시작되어 경복궁과 삼청동 사이를 흘러내려온 중학천(中學川, 일명 삼청동천 三淸洞川)을 만나 하나의 물로 합쳐진다. 이 물이 바로 이름도 맑은 청계천(淸溪川). 오늘날 복원된 청계천의 시발점인 종로구 서린동이 과거에도 백운동천과 중학천이 합류하여 청계천으로 시작되던 지점이었다. 청계천은 계속해서 서울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똑바로 흘러가다가 동대문 밖에서 북으로 남으로 한 번씩 부드럽게 굴곡한 끝에 성동구 마장동(馬場洞) 일대에서 그 동네를 크게 감아 돌며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고,(남동쪽이라고는 하지만 약간만 동쪽을 향할 뿐 거의 남향으로 직하하니 정확히는 남남동 방향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여기에서 다시 2.5km쯤을 더 가다다 중랑천으로 합류한다. 중랑천은 멀리 의정부 수락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서울의 동쪽 외곽을 남하해 내려오다가 마침 이 부근에서 얼마 전 방향을 틀어 북서진하고 있던 터. 크게 보아 서진하고 있던 중랑천에 남하하고 있던 청계천이 만나고, 하나가 된 이들은 서쪽으로 조금 더 흐르다가 다시 남서 방향으로 구부러져 이내 한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청계천의 중랑천 합류 지점에서부터 중랑천의 한강 합류 지점까지의 거리는 3km가 채 안 된다. 바로 여기, 청계천이 중랑천과 합류하는 지점의 한양 도성 쪽 땅의 이름이 살곶이이다(성동구 사근동). 그리고 중랑천을 사이에 두고 살곶이의 맞은편에 위치한 넓고 낮은 땅 일대가 바로 뚝섬이다(성동구 성수1동 일대).


살곶이. 그 이름이 순 한국어인 것을 한눈에도 알겠지만, 동네 이름치고는 참으로 생경하다. 살곶이보다야 귀에 많이 익을지라도, 뚝섬이라는 이름 역시 특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알고 보면 이 둘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그 존재를 드러내는 유서 깊은 지역이다. 물론 『실록』에서는 한자로 이름이 표기된다. 살곶이의 한자식 표기는 ‘箭串’이다. ‘箭’이 ‘화살 전’자라는 것은 잘 알려진 것이지만, ‘串’이라는 글자는 많은 한국인에게 익숙하면서도 낯 글자일 것이다. 최근 중국음식인 양꼬치가 크게 유행하면서 ‘羊肉串’이라는 간판이 많이 눈에 뜨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확한 뜻과 음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은 것 같다. 자전에 따르면 ‘串’은 ‘꿸 관, 꿰미 천, 꼬챙이 찬’ 정도의 뜻과 한국어 발음을 지니며,(중국어 발음은 한어병음으로 ‘chuàn’이다.) 경우에 따라 ‘땅이름 곶’으로 소개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살곶이’ 등 몇몇 경우를 고려한 한국식 용례인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箭串’이란 ‘살곶이’라는 한국어 이름을 한자로 옮겨 놓은 것임을 알게 된다. 화살을 꽂아놓은 곳이라니, 무슨 사연인가?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가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두 아들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5번째 아들 태종 이방원이 너무 괘씸하고 미워 이방원을 향하여 쏜 화살이 이곳에 떨어졌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은 이성계가 이곳에서 매 사냥을 하던 중 그의 화살에 맞은 새가 이곳에 떨어져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 밖에 조선시대에 이곳이 군사들의 활쏘기 훈련장으로 사용되었다는 설, 또는 이곳의 물살이 세어서 흙이 뾰족하게 쌓였으므로 물살의 ‘살’과 흙 또는 땅이 튀어나온 곳을 의미하는 ‘곶’을 이어 붙여 살곶이라는 이름이 되었다는 설 등이 전한다. 마지막의 경우를 제외하면 대체로 이 이야기들은 화살을 매개로 하여 사냥이나 군사훈련 등 전쟁이나 군대와 관련된 기의(記意)를 품고 있는데, 실제로 『실록』에서도 이곳이 조선시대 내내 왕실의 사냥터나 임금의 행행(行幸)을 수반한 대규모의 연회장소 또는 군사훈련장으로 이용되었으며, 때로는 이곳에서 임금이 군대를 친열(親閱)하기도 했던 사정을 전한다.


한편 뚝섬의 한자 이름은 ‘독도(纛島)’이다. 이 이름은 임금의 어가나 대장군의 앞에 세우는 깃발인 독기(纛旗) 또는 독기에 드리는 제사인 독제(纛祭)에서 유래한다. 조선 태조 때 큰 독기가 이곳 뚝섬 부근으로 떠내려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며, 이에 나라에서는 여기에 독제소(纛祭所)를 설치하여 봄ㆍ가을로 제사를 지내면서(세종 3.7.19) 각 도의 절제사들이 의무적으로 참석하게 하였다(태조 3.1.28). 즉 뚝섬이란 ‘독제를 거행하는 섬’이란 뜻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름과 달리 뚝섬은 사실상 섬이 아니다. 북쪽과 서쪽을 중랑천이 에두르고 남쪽은 한강에 접해 있어서 물 쪽으로 돌출한 지형을 이루지만, 동쪽은 광진구를 거쳐 아차산으로 이어지는 뭍이다. 다만 삼면이 물에 둘러싸이며 살곶이 쪽에서 바라보기에 섬과 같은 느낌을 자아내어 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 같다. 독제소라는 기원에서 알 수 있듯이 뚝섬도 조선시대에 군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가에서는 이곳의 넓고 평평한 지리적 특성을 이용하여 이곳에서 목장을 운영하였고,(근래에도 과천으로 이전되기 전까지 이곳에 경마장이 있었다.) 군대의 열무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은 살곶이라는 지명이 과거에는 지금처럼 청계천과 중랑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한양 도성 쪽만 일컫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중랑천을 넘어 뚝섬 일대까지를 모두 아우르는 것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조선 전기에 지어져 오늘에 이르는 살곶이다리(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는 오늘날의 행정구역 상 살곶이로 되어 있는 사근동과 건너편 뚝섬을 연결하는 다리이므로 살곶이라는 명칭은 다리의 양쪽 모두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한편 뚝섬에는 마장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공원(마장동체육공원, 서울 성동구 성수동1가 671-4)이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이 지역이 과거 목장으로 사용되었던 내력을 간직하는 유흔일 것이다. 그런데 마장동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살곶이가 포함된 사근동의 북쪽에 위치한 1.05km² 넓이의 행정구역 이름이기도 하다. 이것을 보아도 조선시대의 뚝섬 목장은 현재의 뚝섬 안에만 위치했던 것이 아니라 이 일대에 넓게 위치하고 있었으며, 오늘날 행정구역 상의 살곶이-뚝섬-마장동 전체가 조선시대에 사냥, 행행, 열무, 군사훈련, 목장 등을 겸비하는 광대한 군사시설 지역이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실제로 『영조실록』에는 “호랑이가 살곶이다리의 마장(馬場)에 들어왔다”는 기사가 있다. 영조 32.7.12.)


그렇다면 이 일대는 어떠한 지리적 이점이 있었기에 군사시설 지역으로 이용되었던 것일까. 성동구와 뚝섬 일대는 대부분의 지역이 해발고도 100m 이하의 저지대에 해당한다. 넓고 평평한 들판으로 이루어져 대규모의 인원이 동원되기에 좋은 지형을 이룬다. 뿐만 아니라 한양 도성의 동쪽 경계인 동대문으로부터 불과 10리(4km) 남짓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복잡한 도심으로부터 충분한 거리를 두고 있을 뿐 아니라 너무 멀지도 않아 접근성도 좋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이 이 지역을 조선의 군사시설 단지로 사용되도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지대가 낮다는 것은, 그것도 여러 하천이 중첩되어 있는 지역에서 지대가 낮다는 것은, 비가 많이 올 경우 필연적으로 하천이 범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곳은 우기의 상습적인 범람 지역으로(지금도 장마 때마다 중랑천이 불어나는 것을 떠올려 보라!) 조선전기에는 홍수 때 이곳을 건너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사례가 줄을 이었다. 이에 나라에서는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지점의 하류에 살곶이와 뚝섬을 연결하는 다리를 짓고자 하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아마도 돈과 기술력의 한계 때문이었으리라.) 이 시도는 번번이 성공하지 못하거나, 완공되더라도 쉽게 무너지곤 했다. 먼저 세종 2년(1420년) 군대를 동원하여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다리의 기초만 다지고 장마를 맞아 중단하였다가 끝내 완공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세종 2.5.6 ; 세종 2.5.16 ; 세종 2.5.25). 단종 때에는(1454년) 농민을 시켜 수리하게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기사도 보인다(단종 2.3.26). 다시 성종 6년(1475)에 한양과 지방을 오가는 행인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동왕 14년(1483)에 완성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살곶이다리이다.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전한다. 성종이 살곶이다리의 공사를 진행할 당시 자금과 인력의 부족으로 난관에 부딪혔을 때 어느 이름 모를 승려가 인원을 동원하여 많은 돌을 채벌해서 다리는 만들었는데, 그 길이가 300여 보를 넘고 안전하기가 집 안에 있는 것과 같아서 행인이 지날 때 마치 평지를 밟는 것과 같았다는 것이다(『용재총화』 제9권). 이어지는 이야기에는 임금이 이 승려를 유능하게 여겨 공사의 완공을 맡겼더니 도리어 여러 해가 지나도 성과가 없었더라는 후일담도 있지만 그 정확한 사정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조선시대의 불교 승단이 국가의 공무를 대리하며 노동력을 제공하였던 사정을 에둘러 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전기에 승려들은 기와 제작기관인 별와요(別瓦窯)나 서적 간행기관인 교서관(敎書館) 등에서 고급의 기술력을 도맡아 담당하거나 국가의 공납 처리를 대납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공적 업무를 대신하며, 일종의 공무원과도 같은 직능을 일임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국가의 조직적 요구와 승단의 자발적 도움이 어느 정도의 비율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심도 깊은 연구가 요청되지만, 어쨌든 성종대 살곶이다리의 공사에서 존재감을 알리는 저 승려의 사례는 그 같은 조선시대 국가-승단 간 관계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후 살곶이다리는 강원도와 경상도 지방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중요한 관문으로 기능하였다. 동대문을 나와 이 다리를 건너면 광나루를 통해 강원도로, 송파를 통해서는 충주로 길이 이어졌다. 또한 태종과 순조의 능인 헌릉ㆍ인릉과 성종과 중종이 모셔진 선릉ㆍ정릉으로 가는 길 위에 있었기에, 조선의 역대 임금들은 선왕을 참배하러 가는 길에 수시로 이 다리를 건너곤 하였다. 대한제국의 순종황제 국장 행렬이 금곡 유릉으로 향할 때에도 이 다리를 건넜다. 물론 뚝섬에서의 친열을 위한 왕들의 어가행렬이 이 다리를 통과했던 것 역시 말할 나위가 없다. 다리는 안타깝게도 1926년 대홍수 때 일부가 물에 떠내려간 뒤 오랫동안 방치되어왔으나, 1972년에 서울시가 무너진 다리를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전한다. 현재 살곶이 다리는 조선전기 완공 당시의 석재 일부를 간직한 채(사근동 쪽 교각과 상판) 본래의 자리(서울 성동구 성수동1가)에서 조선시대의 돌다리 중 가장 길고 오래된 다리로 현존하며 위용을 자랑한다.





민순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주요 논문으로 〈조선 초 법화신앙과 천도의례〉, 〈조선 초 조계종의 불교주도적 자의식과 종파 패러다임의 변화〉, 〈정도전과 권근의 불교이해와 그 의의〉, 〈조선 세종 대 僧役給牒의 시작과 그 의미〉, 〈조선전기 승인호패제도의 성격과 의미〉, 〈조선 초 불교 사장(社長)의 성격에 관한 일고〉, 〈조선전기 도첩제도의 내용과 성격〉, 〈전환기 민간 불교경험의 양태와 유산〉, 〈참법(懺法)의 종교학적 기능과 의미〉, 〈조선전기 수륙재의 내용과 성격〉, 〈한국 불교의례에서 ‘먹임’과 ‘먹음’의 의미〉, 〈전통시대 한국불교의 도첩제도와 비구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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