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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579호-반야심경과 분류체계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9. 6. 18. 17:57

반야심경과 분류체계


              news  letter No.579 2019/6/18       

 


불교에 문외한인 사람도 귀에 익숙한 《반야심경》의 구절이 있다.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다. 바로 앞 구절이 비슷한 의미의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인데, 그만큼 이 부분이 《반야심경》의 강조점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텍스트를 읽어보면, “색즉시공”의 측면이 두드러지는 반면 “공즉시색” 혹은 “공즉시오온”의 측면은 다만 뒷면에 잠재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느낌이 틀리지 않는다면 의문이 든다. 왜 양쪽의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한쪽 측면은 전면에 부각시킨 반면 다른 쪽 한편은 뒤로 물리는 듯한 포즈를 취한 것일까?

아마도 《반야심경》이 만들어졌을 때의 상황과 연관되지 않을까 한다. 《반야심경》은 기본적으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주장하지만 텍스트에서 공의 측면에 보다 강조점이 두어진 듯한 인상을 받는 것은 색의 측면이 지나치게 강조된 시대적 맥락에서 《반야심경》이라는 텍스트가 형성되었기 때문이 아닐는지. 이런 점은 두 가지 측면 가운데 어느 쪽을 보다 강조하느냐를 놓고 불교사상사에서 끊임없이 각축을 벌인 과정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공(空)의 측면이 “너무” 강조되고 있다고 여겨진 경우에는 가차 없이 그 불균형을 견제하기 위해 색(色)의 측면을 부각시키는 논점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반야심경》의 유명한 구절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분류체계의 관점에서 풀이해 보면, “분류체계는 영원불변한 것일 수 없지만, 분류체계가 없는 삶도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도덕경》에서 무욕(無欲)과 유욕(有欲), 경계선 너머의 묘함을 보는 것(觀其妙)과 경계선을 보는 것(觀其徼)을 대응시킨 것도 분류체계의 차별상과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가 바리새파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한 것은 율법이라는 분류체계 자체라기보다는 율법의 고정화로 삶이 불필요하게 억압되었기 때문이었다.

분류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원래 없던 구분선이 그어져서 분할이 생긴다는 것이고, 이는 항상 특정한 맥락을 지닌다. 일단 구분선이 만들어지면, 한편으로 그 분할을 소중하게 여기고 지키려는 힘이 나타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분할 자체를 뒤엎어서 새로운 구분선을 만들려는 힘도 작동한다. 구심력과 원심력의 양 방향의 힘 모두에 지고의 가치가 부여될 수 있는데, 이런 점은 성스러움에 관한 두 가지 이론이 잘 보여준다. 분류가 없는 삶은 있을 수 없지만, 고정불변의 분류도 있을 수 없다.

19세기 후반 우리가 수용하기 시작한 새로운 학문은 서구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에서 나타난 것이었으므로, 조선시대의 공부법과 매우 다른 것이었고, 생소한 지식의 분류법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책으로 새로운 분류법이 채택되었고, 지식의 전면적 개편이 일어나게 되었다. “science”라는 용어가 “科學”으로 번역된 것을 보더라도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새로운 지식의 구분선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했는가 하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여러 가지 하위 영역으로서의 “科”를 거느리는 “科學”으로서 “science”에 대한 인식을 성립시켰기 때문이다. 이 구분선이 바로 근대적 학문 영역(discipline)의 경계선이 된 것이다.

지금 서구 학계는 1970년 이후 구체화된 학문의 소통 및 융합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학문 영역의 구분선을 그대로 두고 소통만을 강조하는 간(間)학문적(interdisciplinary) 관점의 부족함이 이미 널리 알려져서, 그 구분선도 지울 수 있다는 초학문적(transdisciplinary) 관점이 확산되고 있다. 여기에서 이런 상황에 대응하는 우리의 세 가지 태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서구 학계의 이런 흐름을 잠시의 유행으로 간주하고, 백 년의 역사가 보증하는 근대적 지식 분류법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다. 우리의 관점을 바꿀 만한 “괄목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태도이다. 두 번째는 서구 학계의 새로운 변화를 좇아 우리도 그들이 하듯이 바꾸는 것이다. “백 년 전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들을 따른다.”는 태도이다. 세 번째는 앞의 두 가지 태도를 비판하면서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지식의 새로운 분류체계가 등장하는 조건을 검토하는 것이다. 이는 “그어진 구분선은 변화된 조건에서 바뀌기 마련이다.”라는 태도이다.

세 번째 관점에서 볼 때 첫 번째의 태도는 짐짓 서구의 모방에 저항하는 듯이 보이지만, 자신의 게으름을 무마하려는 수법일 뿐이다. 첫 번째 관점은 분류법이 늘 변하기 마련이라는 점에 대해 충분한 인식을 못하고 있다. 두 번째는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으나, 자신의 맥락을 철저히 도외시한다는 점에서 헛수고로 그칠 수밖에 없게 된다. 서구가 보편성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서구학계의 흐름만 따라가면 된다는 환상 속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백 년 전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들을 따른다는 관점은 백 년 전의 조상들이 사상적인 고투를 하면서 새로운 지식분류법을 수용한 과정을 망각하는 처사에 다름 아니다.

새로운 분류체계의 등장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작동하던 기존 체계와 길항 관계를 벌이면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분류체계의 등장과 퇴장은 내재적이다. 분류체계가 만들어지는 순간, 와해의 조건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분류체계에 집착하는 일은 이미 그 내부에 싹터있는 변화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첫 번째는 구제 불능의 둔감함에 빠져있고, 두 번째는 남의 삶을 사느라고 자신의 삶은 내팽개쳐 놓고 있다. 분류체계의 등장과 퇴장은 겹쳐져 있다는 것과 서구의 “후마니타스”도 하나의 “안트로포스”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장석만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종교’를 묻는 까닭과 그 질문의 역사: 그들의 물음은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던지는가?>, <인권담론의 성격과 종교적 연관성>등이 있고, 저서로 《한국 근대종교란 무엇인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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