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폴 루이 란츠베르크와 투우장의 신비
news letter No.580 2019/6/25
경기장에 들어간 황소는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는 기뻐하며 어두운 감옥을 빠져나와 힘차게 달리면서 혈기 넘치는 힘의 생명력을 만끽한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부심을 느끼면서, 그는 자기 자신을 닫힌 무대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이 무대는 여전히 그에게 드넓은 평원처럼 느껴지고, 이제 그의 세계가 된다. 그는 경기장의 모래를 위로 흩뿌리면서 이리저리 돌진하고, 자신의 힘에서 생기는 기쁨 말고는 다른 감각을 갖고 있지 않다.
첫 번째 적수들이 투우장으로 들어온다. 여전히 경기가 진행 중이다. 황소에게 싸움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투쟁이 삶과 자기 자신의 힘에 대한 그의 자각을 강화시킨다. 시작부에서 일어나는 짜증나게 하는 이 작은 일들은 단지 그의 화를 돋울 뿐이다. 이러한 도발을 통해 강자의 격분이 극에 달한다. 투쟁은 그의 일상적인 존재 아래 숨겨져 있던 공격하는 동물을 불러낸다. 경기의 한계선을 넘어서는 불쾌한 일은 없다. 그러나 천천히 고통스러운 요소가 유입된다. 경기가 조작된다. 적수는 너무 교활해서 성나게 한 뒤에 달아난다. 둘 가운데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적수는 나쁜 놈이기 때문에 강자가 된다. 천의 붉은색이 분노를 자극한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싸움을 위한 행복한 핑곗거리가 되지 못한다.
말을 탄 적들이 들어오면서 싸움은 황소에게 진지한 일이 된다. 황소보다 높은 쪽에서 기마 투우사인 삐까도르(picador)들이 창으로 그를 찌르고 멀리서 그에게 상처를 입힌다. 황소는 공격을 한다. 그는 격분하며 평소에 없던 힘을 보여준다. 그의 격분은 이제 숭고하고 맹목적이고 고통스럽다. 이 광란은 삶의 절망에 의해 은밀히 자극받지만, 이 절망에 대한 부단한 승리에 의해 끊임없이 강화된다. 황소의 집요한 공격에 의해 최악의 고통을 겪는 것은 무고한 늙은 말이다. 교활한 삐까도르는 피로 물든 과업을 마치고 나서 사라진다.
이 순간 황소는 여전히 강하다. 그러나 이제부터 계속해서 그의 자제력은 약해진다. 그는 실제보다 강해 보인다. 생에 대한 지배력이 흔들린다. 창을 맞은 상처는 깊고, 피가 계속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제 막간극에 의해 교전이 지연된다. 황소는 장식되어야 하고, 또한 다시 상처를 입어야 한다. 날카로운 미늘이 달린 장식된 작살인 반데리야(banderilla)로 이 용맹스러운 투사를 장식하는 일은 존경이자 조롱이다. 반데리예로(banderillero)는 이 치명적인 작살로 황소를 장식하는 사람이며, 궁지에 몰린 황소의 바로 이러한 위엄과 느림 때문에, 자신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무기를 꽂는 데 성공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거의 희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이 영웅적인 짐승을 핑계 삼아 반데리예로가 우아한 춤을 춘다.
그 다음에 신비의식의 최고 사제인 마따도르(matador)와 함께 경기장 안으로 죽음이 들어온다. 보라! 저것은 천의 무시무시한 붉은색 아래 감추어진 아름답고 탄력 있는 피할 수 없는 칼이지만, 칼을 맞을 운명을 지닌 자에게만 감추어져 있다. 다른 사람들이 이 죽음을 주시하고, 약해진 황소는 고통을 겪기 시작하며, 이 고통을 넘어서면서 막간극의 희비극 후에 아직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더 깊은 위엄에 도달한다. 비극이 시작된다. 또는 오히려 전체 장면의 비극적인 의미가 마침내 폭로된다. 선한 황소는 끝까지 투사로서 고귀한 존재로 남는다. 나는 그가 여전히 승리를 믿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의 지성은 없을지라도, 황소에게는 다가오는 순간에 대한 모호한 자각이 없지 않다. 일생을 구성하는 지난 20분의 모험에 의해 이 자각이 무디면서도 선명해졌다. 양쪽에서 투쟁과 공격, 철수와 복귀가 있었다. 성공과 패배가 있었다. 싸움은 순전히 육체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의지를 굳히면서 마따도르가 황소를 농락하며 지배하려 하고,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유일한 자세를 취하도록 황소를 조종한다. 마따도르가 죽음의 붉은 깃발을 흔들고, 마치 여왕의 마법에 걸려 죽어가는 연인처럼 이 깃발이 황소를 지배하고, 황소는 깃발을 뒤쫓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갑자기 황소가 살해된다. 그의 육중한 몸이 절망의 당당한 마지막 외침처럼 칼을 맞는다. 몇 초 동안 그는 저항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칼과 동일시되고, 칼의 원천, 즉 칼을 휘두르는 마따도르와 동일시되면서, 매우 오랫동안 현존하고 있던 죽음, 바로 그 죽음이 온다. 죽은 동물이 마치 물건처럼 치워진다.
투우장에서 황소는 인간을 대신하고, 인간은 대천사나 악마의 역할을 맡는다. 다른 존재를 향한 운명의 역할을 떠맡음으로써, 인간은 운명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자기 자신의 복수를 한다. 이번만은 다름 아닌 인간이 자기가 무엇을 수행할 것인지를 알고 예상한다. 따라서 두 시간 동안 그는 대리자의 죽음의 지배자가 됨으로써 자기 자신의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잊을 수 있다. … 이번만은 정복할 수 없는 적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인간이 자기가 승자라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의 심층에서 그는 자기가 황소라는 것을 안다. 그는 마따도르의 초인간적인 냉정함이 허구적이라는 것, 매우 비극적인 운명의 결과를 가진 이 투쟁이 자기 자신의 투쟁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래도 인간은 진실을 마주한 채 절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죽음에 대한 승리의 가능성이 없다면, 인간의 희망은 결코 완전할 수 없을 것이다.
'뉴스 레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582호-탈경계의 현대종교 : 불교와 요가의 결합, 도전인가 기회인가? (0) | 2019.07.09 |
---|---|
581호-나이폴에 대한 회상: 나의 떠도는 삶을 생각한다 (0) | 2019.07.02 |
579호-반야심경과 분류체계 (0) | 2019.06.18 |
578호-공간의 팔림세스트, 이미지의 팔림세스트 (0) | 2019.06.11 |
577호-종교현실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 (0) | 2019.06.04 |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 Total
- Today
- Yesterday
TAG
- 유교
- 종교학
- 종교문화비평
- 코로나
- 종교
- 갑골문
- 불복장
- 앤 카슨
- 죽음
- 기후변화
- 원시문화
- 연구원 이야기
- 신화
- 임현수
- 정진홍
- 점복
- 신종교
- 한국종교문화연구소
- 기후위기
- 기독교
- 비평
- 연구원
- 무속
- 한종연
- E. B. 타일러
- 민족종교
- 순례
- 불교
- 종교개혁
- 개신교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