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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580호-폴 루이 란츠베르크와 투우장의 신비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9. 6. 25. 18:04

폴 루이 란츠베르크와 투우장의 신비

 


news  letter No.580 2019/6/25       

 

 



‘신 없는 인간’의 삶은 어떠한 모습일까? 《죽음 경험과 자살의 도적적 문제(The Experience of Death & The Moral Problem of Suicide)》라는 책에서 폴 루이 란츠베르크(Paul-Louis Landsberg)는 이러한 우울한 삶의 구조를 묘사하기 위해서 투우장으로 간다. 투우는 고대적인 신비의식의 유물이라고 일컬어진다. 투우장에서 인간은 황소의 죽음에서 자신의 죽음을 본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황소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이때 역설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구경하는 자, 즉 죽음 밖에 서 있는 자가 되기도 한다. 투우는 죽음에서 인간을 잠시 떼어놓은 후에, 마치 하나의 사물처럼 죽음을 관찰하고 지배하게 한다.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 죽음이 되어 죽음 밖에 서기도 하고, 마침내는 자기가 사실은 황소라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란츠베르크는 삶의 단계를 투우의 장면에 비유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경기장에 들어간 황소는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는 기뻐하며 어두운 감옥을 빠져나와 힘차게 달리면서 혈기 넘치는 힘의 생명력을 만끽한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부심을 느끼면서, 그는 자기 자신을 닫힌 무대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이 무대는 여전히 그에게 드넓은 평원처럼 느껴지고, 이제 그의 세계가 된다. 그는 경기장의 모래를 위로 흩뿌리면서 이리저리 돌진하고, 자신의 힘에서 생기는 기쁨 말고는 다른 감각을 갖고 있지 않다.


황소가 어두운 곳에 갇혀 있다가 탁 트인 밝은 투우장으로 풀려나온다. 마치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라도 된 듯 원형 경기장을 내달리면서 황소는 생명의 충만함을 느낀다. 투우의 첫 단계는 어머니의 몸을 떠나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아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는 아직 세상을 잘 모른다. 아이는 밝은 세상 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몸에 축적된 자신의 힘을 과시한다. 아이는 세상의 빛에 도취된 채 삶의 기쁨을 만끽한다. 아이는 아직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이나 인생의 곳곳에 숨은 위험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서서히 아이에게 세상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첫 번째 적수들이 투우장으로 들어온다. 여전히 경기가 진행 중이다. 황소에게 싸움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투쟁이 삶과 자기 자신의 힘에 대한 그의 자각을 강화시킨다. 시작부에서 일어나는 짜증나게 하는 이 작은 일들은 단지 그의 화를 돋울 뿐이다. 이러한 도발을 통해 강자의 격분이 극에 달한다. 투쟁은 그의 일상적인 존재 아래 숨겨져 있던 공격하는 동물을 불러낸다. 경기의 한계선을 넘어서는 불쾌한 일은 없다. 그러나 천천히 고통스러운 요소가 유입된다. 경기가 조작된다. 적수는 너무 교활해서 성나게 한 뒤에 달아난다. 둘 가운데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적수는 나쁜 놈이기 때문에 강자가 된다. 천의 붉은색이 분노를 자극한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싸움을 위한 행복한 핑곗거리가 되지 못한다.


투우의 두 번째 단계에서는 적수들이 투우장으로 들어와서 붉은 망토를 흔들며 황소를 자극하기 시작한다. 황소는 적수들의 도발에 반응하지만, 적수들은 이리저리 황소를 피하면서 약을 올린다. 적수들은 교활한 술책으로 황소의 강한 힘을 비웃는다. 이 단계는 학교에 다니는 청소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이제 교활한 세상과 대면하기 시작한다. 이 세상은 정직과 성실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곳이다. 그는 악(惡)의 존재를 깨닫게 되지만 여전히 투지를 불태운다. 청춘은 아직은 피로감에 좌절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본격적으로 진짜 싸움이 시작된다.

 

말을 탄 적들이 들어오면서 싸움은 황소에게 진지한 일이 된다. 황소보다 높은 쪽에서 기마 투우사인 삐까도르(picador)들이 창으로 그를 찌르고 멀리서 그에게 상처를 입힌다. 황소는 공격을 한다. 그는 격분하며 평소에 없던 힘을 보여준다. 그의 격분은 이제 숭고하고 맹목적이고 고통스럽다. 이 광란은 삶의 절망에 의해 은밀히 자극받지만, 이 절망에 대한 부단한 승리에 의해 끊임없이 강화된다. 황소의 집요한 공격에 의해 최악의 고통을 겪는 것은 무고한 늙은 말이다. 교활한 삐까도르는 피로 물든 과업을 마치고 나서 사라진다.


투우의 세 번째 단계에서 말을 탄 삐까도르가 창으로 황소의 목 주변 근육을 찌르며, 황소는 피를 흘리기 시작한다. 목의 상처로 인해 황소의 공격 자세가 조금 낮아진다. 점점 지쳐가는 성난 황소는 주변에서 움직이는 다른 것들을 보지 못한 채 오직 하나의 대상만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황소는 말에게 상처를 입힐 뿐이고, 삐까도르는 전혀 상처를 입지 않는다. 이 단계는 이제 삶 속에서 고통을 겪기 시작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인간도 삶의 실제적인 투쟁 속으로 들어가지만, 결코 악을 물리치지 못한다. 적수들 가운데 하나를 무찌르지만, 결국 그 자는 죄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 항상 공격은 진짜 과녁을 놓친다. 내가 공격한 적들은 알고 보면 모두 무고한 자들이다. 우리의 적수는 “악의 가면”일 뿐이고, 우리는 결코 악 자체를 파괴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직은 싸울 힘이 남아 있다.


이 순간 황소는 여전히 강하다. 그러나 이제부터 계속해서 그의 자제력은 약해진다. 그는 실제보다 강해 보인다. 생에 대한 지배력이 흔들린다. 창을 맞은 상처는 깊고, 피가 계속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제 막간극에 의해 교전이 지연된다. 황소는 장식되어야 하고, 또한 다시 상처를 입어야 한다. 날카로운 미늘이 달린 장식된 작살인 반데리야(banderilla)로 이 용맹스러운 투사를 장식하는 일은 존경이자 조롱이다. 반데리예로(banderillero)는 이 치명적인 작살로 황소를 장식하는 사람이며, 궁지에 몰린 황소의 바로 이러한 위엄과 느림 때문에, 자신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무기를 꽂는 데 성공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거의 희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이 영웅적인 짐승을 핑계 삼아 반데리예로가 우아한 춤을 춘다.


투우의 네 번째 단계에서 황소는 상처와 영광, 조롱과 존경을 동시에 얻는다. 심지어 반데리예로가 황소의 어깨에 꽂는 작살인 반데리야가 마치 아름다운 장식품처럼 황소의 몸을 감싼다. 그리고 황소의 용맹을 기리는 이 장신구는 피로 물들어 있다. 이 단계는 성숙한 인간이 겪는 역설적인 삶을 잘 보여준다. 삶의 상처로 쇠약해진 바로 그 순간에 인간은 영광과 성공을 얻는다. 세속적인 명예는 그저 비밀스러운 또 다른 상처일 뿐이고, 상처받은 영혼에게 주는 조롱 섞인 전통적인 장식품일 뿐이다. 명예는 조작된 가짜 성공이다. 명예 안에 감추어진 상처에서 피가 흐른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것도 정복하지 못했다. 누구도 이 세상에서는 승자가 될 수 없다. 마치 영광이 그의 수중에 놓인 것처럼, 우리는 그의 승리를 꾸며 낸다. 세상은 인간에게 가짜 성공, 가짜 명예를 주면서 승리의 환상을 심어준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란츠베르크에 의하면, 적어도 황소는 이러한 가짜 영광을 믿지 않으며, 세상이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 전에 찬미하고 있을 뿐이라는 예감을 받는다. 세상은 인간의 삶을 제물로 삼아 그 에너지로 돌아간다. 인간이 얻은 승리는 그가 세상의 제물이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그 다음에 신비의식의 최고 사제인 마따도르(matador)와 함께 경기장 안으로 죽음이 들어온다. 보라! 저것은 천의 무시무시한 붉은색 아래 감추어진 아름답고 탄력 있는 피할 수 없는 칼이지만, 칼을 맞을 운명을 지닌 자에게만 감추어져 있다. 다른 사람들이 이 죽음을 주시하고, 약해진 황소는 고통을 겪기 시작하며, 이 고통을 넘어서면서 막간극의 희비극 후에 아직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더 깊은 위엄에 도달한다. 비극이 시작된다. 또는 오히려 전체 장면의 비극적인 의미가 마침내 폭로된다. 선한 황소는 끝까지 투사로서 고귀한 존재로 남는다. 나는 그가 여전히 승리를 믿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의 지성은 없을지라도, 황소에게는 다가오는 순간에 대한 모호한 자각이 없지 않다. 일생을 구성하는 지난 20분의 모험에 의해 이 자각이 무디면서도 선명해졌다. 양쪽에서 투쟁과 공격, 철수와 복귀가 있었다. 성공과 패배가 있었다. 싸움은 순전히 육체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의지를 굳히면서 마따도르가 황소를 농락하며 지배하려 하고,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유일한 자세를 취하도록 황소를 조종한다. 마따도르가 죽음의 붉은 깃발을 흔들고, 마치 여왕의 마법에 걸려 죽어가는 연인처럼 이 깃발이 황소를 지배하고, 황소는 깃발을 뒤쫓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갑자기 황소가 살해된다. 그의 육중한 몸이 절망의 당당한 마지막 외침처럼 칼을 맞는다. 몇 초 동안 그는 저항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칼과 동일시되고, 칼의 원천, 즉 칼을 휘두르는 마따도르와 동일시되면서, 매우 오랫동안 현존하고 있던 죽음, 바로 그 죽음이 온다. 죽은 동물이 마치 물건처럼 치워진다.


투우의 마지막 단계에서 등장하는 마따도르는 원래 ‘살해자’를 의미한다. 이제 황소의 마지막 싸움이 시작된다. 그러나 황소는 칼을 감추고 있는 붉은 천을 향해 질주하면서 서서히 지쳐간다. 결국 황소는 죽음과 싸움을 벌이면서도, 죽음의 마법에 홀려 죽음을 쫓아다닌다.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이 죽음의 칼이 황소의 심장을 관통한다. 이 단계는 모든 인간이 맞을 수밖에 없는 죽음의 장면을 보여준다. 죽음과 벌이는 모든 전투는 시작 전부터 패배의 운명에 처해 있다. 인간과 죽음의 싸움은 그 자체로는 고귀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하다. 투우는 인간이 겪는 비극적인 삶의 전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인간은 황소 안에서 자신의 운명을 본다.


투우장에서 황소는 인간을 대신하고, 인간은 대천사나 악마의 역할을 맡는다. 다른 존재를 향한 운명의 역할을 떠맡음으로써, 인간은 운명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자기 자신의 복수를 한다. 이번만은 다름 아닌 인간이 자기가 무엇을 수행할 것인지를 알고 예상한다. 따라서 두 시간 동안 그는 대리자의 죽음의 지배자가 됨으로써 자기 자신의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잊을 수 있다. … 이번만은 정복할 수 없는 적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인간이 자기가 승자라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의 심층에서 그는 자기가 황소라는 것을 안다. 그는 마따도르의 초인간적인 냉정함이 허구적이라는 것, 매우 비극적인 운명의 결과를 가진 이 투쟁이 자기 자신의 투쟁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래도 인간은 진실을 마주한 채 절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죽음에 대한 승리의 가능성이 없다면, 인간의 희망은 결코 완전할 수 없을 것이다.


투우는 인간들이 소를 제물로 바치던 고대적인 희생제의의 변형물로 보인다. 투우장에 들어선 인간은 소의 죽음을 통해 ‘죽음 너머’와 접촉하게 된다. 란츠베르크가 설명하듯이, 투우장에서 인간은 황소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할 수 있다. 인간은 마치 황소처럼 살다 죽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인간이 죽음의 역할을 맡는다. 황소의 생명을 손아귀에 쥔 채, 인간은 마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신처럼 황소의 삶과 죽음을 관리하고 조정하고 결정한다. 그래서 투우장의 인간은 죽음을 결정하는 신의 위치에 선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인간은 마치 자기가 죽음을 결정하는 자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투우가 진행되는 두 시간 동안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잊고 죽음 밖에서 죽음을 관람한다. 다른 존재의 생명을 지배하면서 인간은 죽음을 망각한다. 우리에게 힘이라는 것은 그런 역할을 한다. 우리는 힘을 통해 다른 생명을 지배하고 살해함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잠시 잊는다.

그러나 투우장을 나서는 순간, 인간은 마따도르가 아니라 황소가 된다. 인간은 사실은 자기가 황소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투우장에서 인간은 잠시 죽음의 역할을 떠맡는다. 그러나 투우장에서조차 인간은 자기가 황소일 것 같다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인간은 기운 넘치는 황소가 되어 세상에 나오지만, 온갖 세파에 시달리면서 서서히 모호하게 악의 존재를 감지한다. 세상은 정정당당한 경쟁이 아니라 기만과 술책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여전히 선의 존재를 믿고 세상의 정의를 갈구하면서, 인간은 황소처럼 악과 불의를 향해 돌진한다. 악과 싸우면서 인간의 몸은 점점 피투성이가 된다. 삶의 모든 목적에는 칼날이 감추어져 있다. 그리고 세상은 황소처럼 질주하는 인간의 노동과 희생을 찬미하면서, 그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준다. 인간은 부와 명예라는 장식품으로 상처뿐인 자신의 육신을 간신히 가릴 뿐이다. 세상 자체가 투우장과 비슷하다. 세상은 모든 인간을 황소로 만든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붉은 깃발을 향해 돌진한다. 힘으로 가득차 있던 황소의 몸에 구멍이 뚫리면서 마치 풍선에서 공기가 빠지듯 조금씩 힘이 빠져나간다. 모든 힘이 고갈된 황소를 향해 마따도르가 다가온다. 그리고 황소의 사체는 마치 쓸모가 다한 물건처럼 투우장 밖으로 내던져진다. ‘신이 없는 인간’의 모습은 이렇게 투우장의 황소로 전락한다.





이창익_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논문으로는 〈종교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조너선 스미스의 종교 이론〉, 〈인간이 된 기계와 기계가 된 신: 종교, 인공지능, 포스트휴머니즘〉, 저서로는 《종교와 스포츠》, 《조선시대 달력의 변천과 세시의례》, 역서로는 《종교, 설명하기: 종교적 사유의 진화론적 기원》, 《구원과 자살: 짐 존스・인민사원・존스타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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