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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大倧敎)에 대한 단상
news letter No.593 2019/9/24
저는 현재 대종교를 연구하고 있으면서도 실제 대종교 신앙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열성적이고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요. 그래서 열렬한 신앙인과는 거리가 멀어서인지 저는 종교다원주의자입니다. 대종교의 교리를 연구하는 열렬하지 못한 종교다원주의자의 입장에서 대종교에 대한 저의 단상을 대종교에 대한 간단한 소개 겸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대종교의 핵심을 일컬어 삼일(三一) 철학이라고도 말합니다. 말하자면 삼신일체(三神一體)인 일신(一神)으로서의 ‘하나’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와의 관계가 교리의 핵심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삼(三)’과 ‘일(一)’ 가운데 우선 더 중요한 것은 ‘일(一)’ 즉, ‘하나’입니다. 하지만 ‘하나’라는 단어만큼 공허한 말도 없을 것입니다.
《벽암록(碧巖錄)》 제19칙에는 ‘구지의 한 손가락[俱胝一指]’이라는 선(禪)문답이 실려 있습니다. 「본칙」에서, “구지(俱胝) 스님은 묻기만 하면 오로지 하나의 손가락만을 세웠다.”고 합니다. 「평창」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구지스님의 암자에 한 동자가 있었는데 바깥에서 어느 사람에게 “스님께서는 평소에 어떤 법으로 사람들을 지도하시느냐?”라는 질문을 받자, 손가락을 일으켜 세웠다. 동자가 되돌아와 자기가 한 행동을 스님께 말씀드렸다. 구지스님은 칼로 그의 손가락을 잘라버리니, 동자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구지스님이 소리를 질러 (동자를) 부르니 동자는 머리를 돌렸다. 이에 구지스님이 문득 손가락을 곧추세우니 동자는 훤히 깨치게 되었다. 말해보라. 동자는 무슨 도리를 보았는가를.”
이 선문답에 무슨 깊은 뜻을 감추고 있는지를 도저히 알 수는 없지만, 저는 대종교에서 말하는 ‘하나’의 지위가 이러한 선문답의 ‘한 손가락’에 비견될 만하지 않은가라는 고민을 하였습니다. 선(禪)에서는 이러한 화두가 팔만대장경의 장광설(長廣舌)보다도 수승(殊勝)한 최상승(最上乘)의 깨달음을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말과 생각을 떠난 불가사의한 신비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일심(一心)’ 또한 이 ‘하나’의 높은 지위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대종교의 삼일(三一) 철학에서 ‘하나’는 ‘일심(一心)’에서 ‘심(心)’자조차도 떼어낸 궁극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노자(老子)》에서도 “하늘은 하나를 얻어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 편안하고 귀신은 하나를 얻어 신령스럽고 골짜기는 하나를 얻어 가득 차고 후왕은 하나를 얻어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중용(中庸)의 ‘중(中)’ 또한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가 가진 개념적 내용보다도, 이 ‘하나’가 우리를 안내하는 우주적 지평, 사유의 지평, 자아의 지평은 우리 스스로가 궁극의 진리로 나아가게 만드는 방향타가 됩니다. 이 ‘하나’를 화두로 삼아 우리 삶의 모든 개별자들을 검토하다 보면, ‘하나’는 곧 ‘모든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대종교의 삼일(三一) 철학은 ‘하나’에서 ‘셋’으로 나아갑니다. ‘셋’은 곧 ‘모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는 어떻게 ‘셋’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대종교에서는 ‘하나’가 어떻게 ‘셋’이 되는지 구체적인 원리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천부경(天符經)》에서 “석삼극(析三極: 三極으로 나누어진다.)”라고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석삼(一析三)’의 원리가 무엇인가는 철학적 해석의 과제로 남겨져 있지 않은가 합니다. 저는 나름대로 《천부경》의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에서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하나에서 시작하나 시작 없는 하나”인 ‘하나’가 바로 대종교의 ‘하나’이므로, ‘하나’에는 스스로가 ‘셋’으로의 전개의 원리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긍정’과 ‘부정’과 ‘생(生)’이라는 세 계기로 해석해 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긍정’은 천(天)이 되고, ‘부정’은 지(地)가 되고, ‘생(生)’은 인(人)이 되어 석삼극(析三極)의 천지인의 전개가 설명이 되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는 그것이 ‘하나 자체’라는 점에서 ‘긍정’이고, ‘하나’는 시(始)이면서 무시(無始)라는 점에서 ‘부정’이고, ‘하나’는 결국 ‘긍정’과 ‘부정’을 포괄한 ‘하나’라는 점에서 ‘생명’인 것입니다. 이러한 천지인 삼재의 계기는 철학적 개념으로 말하자면 본질, 실존, 생명의 삼원적인 구도로도 표현할 수 있지 않나 합니다. 삼신(三神)에 있어서는 초월신(超越神)과 내재신(內在神)과 편재신(遍在神)입니다. 이러한 삼원성(三元性)이 바로 제가 선(禪)불교의 간화선 전통이라는 사유의 막다른 길에서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제3의 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대승기신론》의 일심이문(一心二門)과는 다른, 말하자면 일심삼문(一心三門)의 길이라고나 할까요.
대종교는 일제 강점기에 탄압을 받으면서 교세를 제대로 정비하기가 어려웠고 해방 이후에도 근대화의 물결에서 소외되어 교세가 계속 위축되어 왔던 지라, 교리에 있어서도 체계화가 구축되지 못한 미완성의 종교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천부경》과 《삼일신고(三一神誥)》와 같은 대종교의 주요 경전들이 담고 있는 근원적인 삼원성의 논리가 교리의 확정된 해석을 거부하고 끊임없는 재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즉 해석의 방향과 여백을 동시에 신앙적 과제로서 던져주는 종교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종교는 앞으로 끊임없이 신도들의 교리적 실천에 있어서 참여를 요청하는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종교조직에 있어서도 성직자와 신도가 분리되어 있지 않아서, 신앙생활을 오래 한 신도는 언제든지 성직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민주적인 참여의 종교라는 점이 현 시대에서의 장점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대종교는 그 옛날 우리나라의 선조들, 이 땅의 우리 할머님들이 물 한 그릇 떠 놓고 하늘에 기도를 드리던 소박한 신앙생활에 가장 가까운 종교가 아닐까 합니다. 마치 인격신과도 같은 한임, 한웅, 한검의 삼신일체의 종교가 대종교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저는 개인적으로 대종교를 인격신보다도 물활론적인 자연신과 같은 ‘그 무엇’으로서의 ‘하느님’을 믿는 신앙으로 소박하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종교다원주의자로서 우리 할머님의 하느님이던 무당의 여러 신들이던 다른 종교들의 신들이던 신앙의 본질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종교의 좋은 면만을 바라본다면 현대의 허무주의의 시대에 종교가 없는 것보다는 종교를 갖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서로 권하는 좋은 생각에는 삶에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것들이 있을 뿐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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