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남쪽 바다 작은 섬, 소록도에
news letter No.594 2019/10/1
지난 주말에 지역에서 작은 모임을 열었다. 소록도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하고, 소록도를 답사하는 이틀에 걸친 여정이었다. ‘건축과 풍화’라는 제목으로 건축학계에서 널리 이름이 알려진 조성룡 선생님이 이야기를 풀어냈고, 바쁜 농사철에도 불구하고 주민 여러 사람들이 모임에 참석해서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를 통해 건축이라는 것이 단지 물질적 재료로 텅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며, 땅과 물, 햇빛과 바람, 그리고 몸을 중심에 두고 전체적인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작업이고 그만큼 배려와 공감을 동반한 관계적 사유방식이 건축가의 자격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진과 도면을 통해서, 옛 건물과 장소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것들이 들어서는 동안 우리 사회가 겪어온 공간 변화의 양태와 속도를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풍화’라는 단어에는 자연적인 사라짐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한 건물과 장소가 지닌 자기 기능의 조절 능력과 바깥 환경의 압력을 견디는 힘이 서서히 약화되는 과정이 풍화일 것이다. 단단한 건물도 조성된 땅도 인간의 몸처럼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서서히 변형과 소멸의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더디고 오랜 시간의 흐름을 고려하면, 한 건물과 장소의 풍화 과정은 오히려 이야기가 생성되는 과정이고, 그 생명의 활동이 물질에, 곧 몸과 장소에 오롯이 새겨지는 역사와 문화의 생성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조금 더 이야기를 밀고 나가면, 쓸모가 다하고 무너진 건물이라 할지라도 그곳에는 어떤 이야기와 역사가 있고, 나아가 하나의 세계가 ‘존재’한다. 이처럼 공간에서 공간과 더불어 사유하고 이야기를 짓는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은 공간적 존재로서 항상 그렇게 의미로 채워진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소록도에는 그런 이야기와 역사를 전해주는, 풍화 과정에 있는 건물과 장소가 있다. 정확하게는, 그곳에는 한센인이 살았던 -또한 살고 있는- 여러 마을이 있다. 작은 섬, 소록도에서 한센인은 사회적 차별, 질병의 고통, 경제적 궁핍, 감시와 억압적 통제를 견디면서 자신들의 고유한 세계를 형성해왔다. 그러므로 소록도에서 풍화되고 있는 교회, 학교, 가옥, 옹벽, 축사, 어장, 과수원, 논과 밭, 그리고 각종 시설물들은 한센인의 세계를 온전히 이야기하는 매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급한 문제는 그러한 건물과 장소가 여러 동기와 이유에서 급격한 소멸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사실이다. 위기는 소록도 안팎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안으로는 소록도의 공간을 ‘성지’로 전유하려는 일부 종교의 시도에 의해서, 밖으로는 소록도 주민(한센인)의 인구 감소에 따른 향후 소록도의 경제적 활용 가치를 모색하려는 민·관의 시선에 의해서 소록도에 서서히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소록도에서 활동했던 헌신적인 몇몇 인물의 ‘영웅 만들기’는 그들의 삶의 가치와 헌신의 의미를 왜곡하고 퇴색시킬 뿐이다. 그럼에도 진행되는 ‘영웅 신화’의 서사는 소록도에서 ‘성지화’와 ‘성지순례’를 가동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영웅 신화의 서사적 틀에서 사회적 고통과 신체적 고통을 묵묵히 견뎌냈던 수많은 한센인의 ‘목소리’는 축소되고 생략된다. 다른 한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소록도를 ‘말끔하게’ 개발하여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려는 세력도 항시 존재한다. 문화적 전유이든 물리적 철거이든, 정비 사업이든 간에 삶의 흔적을 지닌 공간의 소거는 이야기의 소멸을 가져온다. 그러한 행위는 한센인의 삶에서 이야기와 역사를 제거하는, 궁극적으로는 한센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또 다른 ‘폭력’에 불과하다. 소록도를 둘러싸고 기념사업이니 문화재 관리니 활용이니 하는 허울 좋은 이유를 대면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행위를 보면, 욕망이라는 전차를 몰아대는 종교와 사회의 ‘위선과 탐욕’을 절감하게 된다(여기에 분별없이 숟가락을 얹으려는 학자들은 더 음험한 존재들이다!). 조성룡 선생님은 강조한다. “집이 허물어지면 기억도 사라집니다. 그 자리에 회한만 남겠지요. 그러니 한센인들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반성은 그들이 머물던 집의 보존에서부터 시작돼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일흔을 훌쩍 넘은 노년의 몸을 이끌고 ‘최소한의 개입’으로 소록도를 보존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과 관심을 지금도 여기저기서 호소하며 다니는 것이다.
어느 여름날 마을 정자에서 한 한센인은 내게 말했다. 아직도 항구에 가면 우리를 내쫓는 가게들이 있다고. 그 사람들이 남쪽 바다, 작은 섬 소록도에 살고 있다. 우리가 용서를 구할, 혹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사람들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박상언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배아줄기세포연구의 생명윤리담론 분석: 한국 기독교와 불교를 중심으로>,<간디와 프랑켄슈타인,그리고 채식주의의 노스탤지어:19세기 영국 채식주의의 성격과 의미에 관한 고찰>,<신자유주의와 종교의 불안한 동거: IMF이후 개신교 자본주의화 현상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