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의미
news letter No.592 2019/9/17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그린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 2004)는 극심한 고통을 강조하는 연출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국내에서도 천주교, 개신교를 가리지 않고 전 기독교인의 호응을 얻어 흥행한 바 있으며, 15년이 지난 지금도 교회에서 상영해준 덕분에 보았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이어지고 있다. 국내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호평과는 달리, 영화가 제작된 미국에서는 종교계와 학계에서 영화를 두고 큰 논쟁이 있었다. 이는 학자들의 논쟁을 수록한 몇 권의 학술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논쟁은 반유대주의와 고통의 문제로 모이는데, 이 글에서는 후자의 문제에 관해서만 말하도록 하겠다.
이 영화에서 악명 높고 영화의 특징이 잘 드러난 장면은 십자가형 직전에 이루어진 채찍질이다. 빌라도의 재판 이후 로마 병사에 맡겨진 예수는 각종 채찍질을 당한다. 병사들은 길고 날카로운 채찍, 가시가 박힌 채찍, 쇠몽둥이 등 각종 고문의 도구를 돌려 사용하면서 한 대, 한 대 채찍질을 하고, 카메라는 맞으며 숨을 헐떡이는 예수의 모습, 그리고 초인적으로 인내하며 그 장면을 보는 마리아의 모습을 건너뜀 없이 보여준다. 웬만한 관객이라면 그의 고통을 함께하며 몸서리치는 채찍질 장면은 무려 십 분 넘게 계속된다.
성서학자들이 이 장면을 비판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복음서 본문에서 이 장면은 “예수는 채찍질한 뒤에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넘겨주었다”라고 극히 간단하게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이 간단한 어구를 ‘끔찍한 십 분’으로 전환한 것에 적어도 성서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필자가 어떤 것이 복음서의 더 좋은 재현인가의 논쟁에 동참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감독 멜 깁슨이 왜 그런 처참한 묘사를 했는지는 물을 필요가 있다. 현대적 관점에서는 그가 사디스트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극히 보수적인 천주교인으로서, 중세적, 혹은 전근대적인 예수 표상을 영상화하고자 했다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문제의 채찍질 장면의 디테일은 이 영화의 제2의 원천인 안나 가타리나 엠머릭 수녀의 19세기 초의 환시(幻視)에서 온 것으로, 당대 기독교인의 신앙을 반영한 것이었다. 다양한 채찍질 도구들의 열거, 채찍질을 멀리서 지켜보며 웃음 짓는 유대인의 존재는 영화에서 논란이 되는 요소인데, 이것들은 이 영화가 성서의 충실한 재현이기보다는 성서에 대한 중세적 해석의 충실한 재현이었다는 데서 생긴, 현대적 시각과 간극이 발생하는 지점이었다. 어찌 보면 이 영화의 이면에 깔린, 고통에 대한 과거의 감수성이 현대의 관객에게 독특한 매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 중세 유럽 기독교인들에게 고통은 의미 있는 것이었고 그 의미는 단연 종교적인 것이다. 최상단에 예수의 수난이 모델로 존재함으로써 고통의 의미가 성립하였다. 중세인들에게 고통은 예수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그리하여 그것을 감내하는 것이 구원에 다가가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그의 육체적 고통을 자신의 몸에서 재현하는 것으로 여겨진 경우가 많았다. 그가 겪은 채찍질을 재현하는 채찍질수도회가 가장 선명한 사례가 될 것이다. 여기서 나열하기 벅찰 정도로 다양한, 수도원의 금욕주의 수행자들이 추구한 다양한 고통은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는 의례적 수단을 통해 추구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신자 대중에게는 연옥 관념이 고통의 의미를 형상화하였다. 연옥 불은 현실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강한 고통을 준다고 믿어졌다. 그러나 그 불의 고통을 감내한 만큼 천국으로 가는 길이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에, 고생한 만큼 구원에 가까워진다는 대중적 인식이 이 신앙을 통해 공고해졌다.
“고통은 제거해야 하는 것일까?” 많은 현대인이 그렇게 생각한다. 고통을 참는 것은 무의미하고 곰 같이 미련한 짓이라는 것이다. 그간 인류 고통의 역사에 많은 변화가 있었고, 특히 마취의 발명은 인식 변화의 중요한 계기였다. 마취를 통해 인간은 고통을 제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마취가 발명될 당시만 해도 창세기 이야기에서 불복종에 대한 징벌이라는 의미를 지녔던 산고(産苦)를 인간이 함부로 제거할 수 없다는 기독교계의 반론이 만만치 않았지만, 이제는 과거 사료에서나 볼 수 있는 주장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고통을 제어한다는 애초의 자신감과는 달리, 현대인의 실존에서 고통의 문제는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의미는 전통 종교가 제공하는 그대로는 아니지만 그 연장선상에서 형성될 것이다. 필자는 요즘 개인적 필요에 따라 고통에 관련된 독서를 조금씩 하고 있는데, 분명히 알게 된 것은 종교를 빼놓고서 고통의 의미의 역사를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사를 공부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얻게 된 것이다.
방원일_
서울대학교 강사
논문으로 <혼합현상에 관한 이론적 고찰>, <원시유일신 이론의 전개와 영향>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자연 상징》, 《자리 잡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