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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596호-학제간 과목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9. 10. 15. 13:26

학제간 과목

 

 

   news  letter No.596 2019/10/15       



 


요즘 수업하는 일이 즐겁다. 내가 일하는 연구원에는 학부가 없고 대학원만 있다. 그러니 학부의 교양 수업처럼 학기마다 새로운 학생들이 수업에 들어와서 흥미진진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 반대다. 학생이 새로운 게 아니라 선생들이 새롭다. 전공 분야가 같지 않은 선생들이 함께 들어가서 수업을 진행하는데, 그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새로 배우는 것도 많고, 여태껏 되묻지 않고 넘겼던 것들을 곰곰이 따져 볼 일도 많다. 같은 전공 분야의 사람들끼리는 다 안다고 생각하던 공부 내용을 막상 타 전공 선생이나 학도들에게 설명하려니 빈 수레 마냥 머릿속에서 낱말들이 덜거덕거린다.


우리 대학원의 교과과정표에는 ‘학제간 과목’이란 분류가 있다. 인터-디시플리너리 코스 (inter-disciplinary course) 정도의 번역일 텐데, 각기 다른 분과 학문에 속한 두 명 이상의 선생들이 한 학기 내도록 함께 수업을 진행하는 과목 유형을 말한다. 같은 대학원에 재직하고 있는 선생들끼리 수업을 통해 관심사를 공유하면서 공동 연구 프로젝트를 기획할 수 있다. “○선생, 내년에 ○○○를 갖고 함께 연구해보지 않으시겠소? 좋죠, 재미있을 것 같네요.” 또 학생들에게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말고 비슷한 주제에 관해서라면 다른 전공에서 진행되는 학문적 논의도 관심을 갖고 배우도록 권장한다. “아항, 이 문제를 ○○학에서는 뭐라고들 하는지 궁금했는데 한 큐에 정리가 되는구나.”

우리가 운영하고 있는 학제간 과목은 일반 대학교의 대학원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교과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각자 자기네 학과 자체를 운영해나가는 것만도 벅찬데 인접 학문과의 교류를 정규 교과과정에 담으려는 노력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게다가 한 학기를 몇 토막 내어 선생들이 따로 따로 수업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전체 강의 계획을 수립하고 매주 다 참석하여 토론식으로 수업을 이끌어 나가려면 어지간히 친하지 않고서는 힘들다. 우리 대학원이 규모는 작지만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의 13개 분과 학문이 골고루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있기 때문에 이런 실험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몇 해 전에 대학원 교과과정을 개편하면서 전공별로 학제간 과목을 지정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종교학에서는 종교와 문학, 종교와 예술, 종교학과 문헌학, 종교사회학, 종교인류학, 종교와 정치, 종교통계조사론 등을 포함해서 11개 과목을 학제간 과목으로 신청하였다. 이 과목들은 종교학 전공 선생이 단독으로 개설할 수 없으며, 반드시 한 개 이상의 다른 전공 선생들이 함께 해야만 협동 강의로 개설할 수 있다. 또 학제간 과목으로 지정된 경우에만 협동 강의가 가능하다. 몇 가지 점들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운용의 묘를 살리면 종교학과 인접 학문의 상호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으리라. 원래 종교학은 잡식성이니까 말이다.

이번 학기에는 인문지리학 전공의 선생께서 ‘종교와 지리학’이라는 학제간 과목을 개설하여 종교학 전공의 조아무개와 학생들을 초대하였다. 처음에 협동강의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찬스다 싶었다. 한중연 종교학은 생생한 종교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조사하는 연구를 중시한다. 그런데 종교 현장의 답사를 기획하여 실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연구 논문을 작성하기까지의 전 과정에 걸쳐서 지침을 제시하는 가이드북 내지 현장 조사 매뉴얼 같은 것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종교와 지리학’ 강의를 통해서 문화지리학에서 현장 답사를 어떻게 하는지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고, 그러한 틀로 한 학기 강의 계획을 짰던 것이다.

지금까지 ‘종교와 지리학’은 순항중이다. 학기 초반에 한 달 동안 지리지, 고지도, 근대 종교 문헌 속의 지리 정보 등의 주제를 가지고 선생들이 돌아가며 강의를 했다. 그리고는 문화지리학의 답사 방법론에 대한 발표 및 토론 수업이 막 시작되었다. 곧 가까운 곳부터 골라서 현장 답사 수업도 떠날 예정이다. 종교학 현장 조사 가이드북 제작을 위한 첫 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머지않아 빛을 보게 되리라 희망한다.

다 좋은데 ‘학제간’이라는 말 자체는 마뜩치가 않다. 국제(國際)를 본받아서 학제(學際)란 말을 만든 것 같다. ‘나라들 사이’와 같이 ‘분과 학문들 사이’의 상호 협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연구 경향 정도이겠지. 그러면 학제란 말에 굳이 토를 달아야 할까 싶기도 하지만... 가만, 누가 인터내셔널이라는 말을 국제라고 번역했을까? 언제 어디서부터 그렇게 쓰기 시작했을까? 국제든 학제든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으니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학문 세계의 베스트팔렌 체제’란 제목으로 글을 만들기로 하고 여기선 통과! 아무튼 국제 관계, 국제 교류 등의 쓰임새를 빌려 왔다면 학제 과목, 학제적 연구라고 써야 할 텐데 학제간은 또 무언가? 제(際)도 사이, 간(間)도 사이, 그러면 학제간은 역전앞처럼 중복표현 아닌가? 아무래도 학제 또는 학제간, 이런 말은 그다지 좋은 신조어는 아니다. 차라리 새로운 말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조현범_
한국학중앙연구원
논문으로 <선교사와 오리엔탈리즘>, <브뤼기에르 주교의 복건 체류>, <브뤼기에르 주교의 자취를 찾아 산서를 떠돌다>, <의례 논쟁을 다시 생각함>, <한글 활판본 『성경직해』에 나타난 번역상의 특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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