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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597호-캉유웨이[康有爲]의 기이한 부활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9. 10. 22. 19:27

캉유웨이[康有爲]의 기이한 부활


news  letter No.597 2019/10/22       

 

 




백일유신이라고도 하는 무술변법을 이끌었던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인 캉유웨이가 요사이 중국에서 기이한 형태로 ‘부활’하고 있다. 이제 캉당[康黨]이라고 하면 더 이상 무술육군자(戊戌六君子) 등을 비롯한 캉유웨이 제자나 동지였던 이들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21세기 대륙신유학자들을 떠올리게 될 정도다. ‘대륙신유학’이란 중국 본토에서 ‘강타이[港臺: 홍콩과 타이완]신유학’ 혹은 ‘해외신유학’이라고 부르는 ‘현대신유학’의 대륙적 버전을 말한다. 당대(當代)신유학이라고도 불리는 현대신유학은 5.4 운동 시기에 대두된 반전통의 흐름에 동조하지 않고, 서구 문화를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그 가치를 아우르면서 중국 전통문화의 인본주의적 가치를 선양하고 회복시키고자 했던 슝스리(熊十力)ㆍ량슈밍(梁漱溟)ㆍ장쥔마이(張君勱)ㆍ허린(賀麟) 등 중국의 일부 지식인들로부터 유래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 전통 문화와 사상의 가치를 주장하던 일부 학자들은 중국에 남아서 험난한 학문 여정을 이어가기도 하였지만, 마르크스 이념에 반대하던 이들은 중국 본토를 떠나 중국 문화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착실하게 연구 성과를 축적하였다. 주로 홍콩과 타이완에서 이어진 이 흐름은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점차 중국 본토에도 전해지고 서구의 학계에도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경시할 수 없는 유교사의 현대적 족적을 이루고 있다. 대륙학계에서도 처음에는 배우는 자세로 이 현대신유학의 성과를 수용하였으나, 1990년대 중반부터 점차 기존의 ‘강타이신유학’에 대한 비판의 태도를 보이면서 대륙 특유의 현대신유학을 모색하였고, 지금까지 30년 가까운 시간을 거치면서 ‘대륙신유학’을 점차 형성해왔다. 이 대륙신유학에서 캉유웨이는 단지 ‘부상’했다고 하기보다는 ‘부활’했다고 하는 편이 적합한 인물이다.


캉유웨이는 실패한 개혁가이자 쑨원[孫文]의 공화혁명에 반대하여 입헌군주제를 지지했던 보수적인 보황파(保皇派)의 리더였으며, 유교를 개혁하여 국교화 하려고 했던 공교운동을 이끌었으나 실패에 그쳤다는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무술변법을 함께 도모했던 동지들과 친동생이 처형당했을 때 캉유웨이는 해외로 도주했고, 망명생활을 할 때 일종의 호신부 역할을 했던 의대조(衣帶詔)는 광서제가 캉유웨이에게 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의 명성은 크게 추락하였다. 남녀평등과 자유연애 및 일부일처제를 주장했으나 실상 그 자신은 여섯 부인을 두었고, 특히 60의 나이에 재력으로 18세의 소녀를 마지막 부인으로 맞이했을 때에는 누구의 축하도 받지 못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하니, 문화대혁명 기간에 그의 무덤을 파헤치고 두개골을 장대에 매달아 끌고 다녔던 홍위병들이 한결 더 당당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캉유웨이의 인격적 결함이 우국의 심경에서 나온 그의 정치적 행보나 원대한 이상을 바탕으로 한 학문적 시도나 성과를 모두 가리지는 못하기에 중국사 전반에서 중시되긴 했지만, 중국 본토에서든 타이완에서든 캉유웨이는 특별히 주목받거나 높이 평가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21세기 중국 대륙에서 캉유웨이는 대륙신유가들에 의하여 중국유학뿐 아니라 중국의 정치와 문화 전체가 회귀해야 할 근원과 같은 의미로 소환되어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대륙신유가의 선두 주자라 할 수 있는 장칭[蔣慶]은 강타이신유학을 ‘심성유학’이라고 비판하면서 ‘정치유학’의 기치를 내세웠고, 정치와 종교를 하나의 원리로 하여 유교식 입헌군주제와 유교의 국교화를 구상했던 캉유웨이의 꿈을 21세기 중국에서 실현시키고자 한다. 천밍[陳明]은 2016년 중국과 타이완 학자들의 회담에서 강타이신유학의 정신적 지주인 ‘머우종산[牟宗三)을 넘어서 캉유웨이에게로 되돌아가자’는 도발적인 주장을 하였다. 즉, 캉유웨이는 시대의 전환점에 처하여 전통적 제국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변화시키고 제도를 건립하여 승인을 얻고, 효과적으로 내외의 도전에 대처할 것인가 하는 근대 이래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고민했으니, 현재 중국은 국가와 민족을 구축하고자 했던 캉유웨이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캉유웨이가 대륙신유가의 영웅이자 지표로서 소환된 것은 2014년 6월 캉유웨이의 고향인 광동 난하이[南海]에서 개최된 “캉유웨이와 제도화유학”토론회에서였다. 대륙신유가의 진영에 대하여 흔히 “남방에는 장칭이 있고, 북방에는 천밍이 있다[南蔣北陳]”고들 하나, 신캉당[新康黨]의 당원들은 그 토론회의 참석자들―천밍ㆍ간양[甘陽]ㆍ탕원밍[唐文明]ㆍ간춘송[干春松]ㆍ쩡이[曾亦]ㆍ천비셩[陈壁生] 등―을 비롯하여 꾸준히 출현하였고, 세부적인 의견 차이는 있다고 해도 대체로 백 년 전 캉유웨이의 구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예컨대 현재 중국 인민대학의 중국공익창신연구원 원장인 캉샤오광[康曉光]은 중국을 유교국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며 유교국가의 구축 과정이 곧 ‘유교화[儒化]’라고 말했는데, 장칭은 이에 동조하면서 유교를 중국의 국교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흐름은 이제는 무제한의 임기 권한을 가진 시진핑[習近平] 주석 이후의 일이니, 그의 취임 연설에서 말했던 ‘중국몽(中國夢)’은 대륙신유가들에 의하여 점차 근 백년 이전 캉유웨이가 꾸었던 꿈이 되어가는 듯하다.

홍콩에 모여 중국의 학술과 문화를 연구했던 머우종산[牟宗三]ㆍ탕쥔이[唐君毅]ㆍ쉬푸관[徐復觀]ㆍ장쥔마이[張君勱] 등은 1958년에 ‘중국문화선언’[본제목은 ‘중국문화에 관하여 세계의 인사들에게 정중히 고하는 선언’]을 발표했는데, 국제적으로 현대신유학의 존재를 널리 알린 이 글에서 본래 중국에서는 종교가 정치 및 윤리도덕과 분리되지 않았을 뿐, 종교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유교의 종교성 혹은 초월성에 대한 담론은 특히 머우종산의 제자인 뚜웨이밍[杜維明]을 비롯한 일부 연구자들에 의하여 지금까지도 활발히 논의되는 주제 중 하나다. 대륙신유가들은 중국의 재유교화 혹은 유교의 국교화에 주목하고 있으니, 바야흐로 ‘종교’라는 개념은 전통의 복장과 새로운 패션을 두른 채 양안(兩岸)의 현대신유가 담론 안에서 주목받고 있다. 그 중에서도 시진핑 주석의 ‘대국굴기’라는 기치와 더불어 유교의 기치도 함께 굴기하면서 캉유웨이가 부활하고 있는 기이한 현상의 귀추가 자못 궁금하다.

 




이연승_
서울대학교
논문으로〈서구의 유교종교론〉, 〈이병헌의 유교론: 비미신적인 신묘한 종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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