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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11호-빈곤의 시대, 착취와 기생의 자화상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0. 1. 28. 19:08

빈곤의 시대, 착취와 기생의 자화상



  news  letter No.611 2020/1/28   

 

 

 

 

 

 


"미안해요, 우리가 당신을 놓쳤군요"

《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 2019)는 우리에게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알려진 켄 로치(Ken Loach) 감독의 최신작이다. 이 영화는 영화 《기생충》과 함께 칸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의 후보작이었으며, 이 밖에도 최우수감독상과 남우주연상등 다양한 분야에 노미네이트 된 작품이다. 《미안해요, 리키》는 노동과 삶 그리고 인간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켄 로치의 작품 스타일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는 '긱 이코노미(gig economy)'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긱 이코노미란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기업은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는 대신, 각각의 노동자를 개별사업자로 모집하여 노동에 투입하는 계약직 임시노동을 시행한다. ‘긱’(gig)은 재즈 연주자들이 모여 즉흥적인 연주를 하는 퍼포먼스에서 유래된 말인데,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단기적으로 고용하고 해고하는 고용형태를 빗대어 쓰는 말이기도 하다. 긱 이코노미 노동의 대표적인 형태가 배달 혹은 택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주인공 리키 역시 여러 노동을 전전하다 풍운의 꿈을 안고 프리랜서 택배업에 뛰어들게 된다. 하지만 이런 노동 형태는 노동자의 복지와 노동조건에 상관없이 최대한의 이윤을 산출하기 위한 자본의 탐욕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이윤의 생성과 극대화라는 기계적 구조에 편입될 뿐, 인간으로서 삶을 구현하기 위한 노동에는 참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긱 이코노미 노동은 인간적인 권리와 배려가 상실된 노동,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부품화된 노동을 의미한다. 비록 노동자들이 ‘열심히’만 하면 풍족할 수 있다고 꿈꾸지만, 이 비정규직 계약 노동은 애초부터 노동에 대한 정당한 교환은 고려하지 않는다.

리키는 택배업을 위해 밴을 구입해야 했고, 비싼 가격의 밴으로 인해 과중한 빚을 지게 된다. 또한 쌓여가는 물품에 따라 기획되는 노동인 택배업은 노동자 개인의 일신상 이유를 용납하지 않는다. 하루 할당된 배당량은 반드시 그날 처리되어야 하는 '지표'이다. 따라서 그가 일신상의 이유로 하루 일감을 처리하지 못하면, 자신의 택배 물품을 처리하기 위해 대체 노동자를 고용해야 하고 그 비용도 부담해야 하며, 벌금도 내야 한다. 그래서 오로지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기술이란 '열심히' 밖에 없는 리치는 가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를 뒤로하고 택배 업무에만 매진한다. 잠깐의 배뇨와 약간의 여유로운 식사 시간마저 반납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일상이란 그리고 삶이란 다채로운 변수를 존재조건으로 하고 있다. 그런 변수는 일주일에 5일, 하루 16시간의 장시간 노동으로 쌓이는 피로만큼이나 삶의 균열을 가속화 한다.

노동이란 삶을 유지하고, 그 속에서 인간다움의 권리를 누리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하지만 자본의 이윤 원리로만 인식된 노동은 인간다움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며, 개인의 무너지는 삶에는 관심이 없다. 주 80시간의 노동으로 '열심히' 살지만 꿈꿨던 풍요에서는 멀어지고 한 층 더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노동현실, '열심히'라는 마술 같은 주문의 힘은 한낱 동화책에서 떠도는 메아리에 불과하다.


빼앗기는 '소비'

노동의 착취가 일상화된 사회는 필연적으로 노동자의 빈곤을 일상화한다. 하지만 자본이란 생산과 소비의 야누스적 양면을 가지고 있다. 이윤이란 착취를 통한 생산이 소비로 환급되지 않으면,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자본은 노동을 착취하고 소비를 통해 빈곤을 가중시킨다.

영화 초반 리키는 회사의 로고가 찍혀있는 셔츠를 입기 전까지 프로축구팀의 저지(유니폼 상의)를 착용한다. 리키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 저지를 입고 있는데, 이건 그가 맨유의 팬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어느 뉴캐슬팀의 저지를 입은 수취인과의 작은 말다툼에서 확인된다. 이 장면은 영국 사회의 문화현상에 대한 상징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영국에서 축구는 대표적인 여가활동이다. 많은 사람들이 비싼 티켓을 구입해서 매주 열리는 축구경기를 직관한다. 특히 한해 600파운드(약 한화 90만원)가 넘는 시즌권을 구입하고, 매년 다른 에디션의 저지(약 10만원에서 30만원에 이른다)를 구입한다. 이 밖에도 각 구장 팬숍에서는 다양한 물품을 판매하고 있다. 이렇게 소비되는 판매량은 실로 엄청나다. 한 맨유팬은 연봉의 절반 이상을 맨유를 위해 쓴다고까지 말한다. 결국 수백억 원에 달하는 선수들의 몸값과 비용은 고스란히 가난한 노동자들의 주머니를 기반으로 산출되는 것이다. 이런 소비는 아버지가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팀의 물품을 수집하며,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축구장에 갈 때부터 반복되던 일이다.(아마도 그 아버지는 그 아버지의 손을 잡고 축구장에 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반복은 여가와 취미라는 이름으로 각인되어 노동자의 삶에 고정되고 지갑을 열게 만든다.

이런 소비를 통한 빈곤은 문화적 소비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는 직접적인 생산품의 소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현대인의 필수품 가운데 하나인 핸드폰이 그것이다. 리키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아들과 딸 모두에게 핸드폰이 있다. 핸드폰은 가중된 노동시간으로 대화를 할 수 없는 가족에게는 최소한의 의사소통 장치이다. 이것마저 없으면, 그들은 알림도 당부도 없이 예고 없는 대면을 위해 한없이 기다려야 한다. 따라서 핸드폰은 개인화된 시대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타인과의 접촉을 위한 필수품이기도 하다. 그런 필수품으로서의 핸드폰이 리키 가족에게는 아이폰이다. 아이폰은 삼성 핸드폰과 더불어 세계시장을 주름잡는 양대 브랜드다. 이 거대 글로벌 기업은 일상적으로 상품을 홍보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과 내용으로 광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광고는 대중들의 선호에 큰 영향을 미치며, 상품과 소비자 간의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적 유대감의 지속은 한 상품에 대한 취향과 선호를 결정하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상품을 결정하는 선택 기준이 된다. 하지만 그런 선택에는 비용이 든다. 특히 아이폰은 큰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매일 같이 불어나는 리키의 빚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폰은 그들의 삶에 비집고 들어와 가족을 이어주는 또 다른 일원으로 작동하며 큰 비용을 지불하게 만든다. 아이폰은 그렇게 얇은 노동자의 지갑을 열게 하여, 빚과 할부로 유지되는 빈곤의 삶을 확장시킨다. 그래서 리키는 일을 쉴 수 없다. 일을 해도 빚은 줄어들지 않고, 하루를 쉬면 더 많이 쌓여가는 부채가 그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리키는 배달을 하는 도중에 강도를 만난다. 그는 크게 맞아서 한 쪽 눈은 보이지 않고 골절상으로 몸도 성치 않다. 하지만 치료비도 개인부담이며, 잃어버린 물품에 대한 비용도 지불해야 한다. 더욱이 일을 쉬면, 벌금을 내야하고 언제 해고 될지 모른다. 그래서 온 가족의 극단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절망의 눈물과 함께 밴에 오른다. 쉴 수 없고, 멈출 수 없는 노동은 소모품으로 전락해버린 노동자의 현실이며, 잊힌 인간의 권리와 존엄에 대한 단면이다.

이미 노동은 인간다움의 도구가 아니다. 오직 노동은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이윤의 극대화는 당연히 가진 자의 부에 편입된다. 그렇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노동은 공정하게 거래 되지 않고, 노동의 불균형을 초래하며 항시적인 실업상태를 야기한다. 이제 출구 없는 가난이 일상화되고, 인생을 설계 할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 빈곤한 일상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가진 자들의 ‘선의’뿐이다.


선의, 기생 그리고 고정된 현실

미국 억만장자인 로버트 스미스는 모어하우스 대학 졸업식에 연사로 참석해서 졸업생들의 학자금 대출금을 모두 갚아주겠다고 약속한다. 그 액수는 무려 480억 원이다. 또한 디즈니랜드의 상속녀 애비게일 디즈니는 노동자들의 소득 불평등을 지적하면서 부자증세를 청원하고, 성인이 된 후 지금까지 자신의 재산 가운데 813억원을 사회에 환원하였다. 여기에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의 전처인 맥킨지는 이혼하면서 받은 위자료 44조원 가운데 절반을 기부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게 필요 이상의 과분한 돈이 있고, 이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물론 이들은 훌륭하다. 하지만 노동의 불공정한 거래 그리고 고용 없는 경제시스템 속에서 상시적으로 나타나는 실업과 빈곤의 일반화는 가진 자들에게 종속된 삶을 만들어 낸다. 철저하게 가진 자들의 선의에 기대어 살아가는 기생적 삶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구조적 부조리에 기반한, '정치적 올바름'이 없는 선의란 얼마나 순진한가? 그러한 선의는 빈곤한 자들을 가진 자에게 종속시켜 부의 위계를 한층 더 강화하고 가난을 확대한다.(대한민국에서는 그런 선의마저 가진 재벌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빈곤의 문제를 들여다 본, 또 다른 영화에 주목해야 한다. 공교롭게도 2019년 칸영화제에 같이 출품되어 황금종려상의 영광까지 안은 《기생충》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 영화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기생의 의미와 고정된 현실이다.

영화는 빈곤이 일상화된 기택(송강호)의 집에 기우(최우식)의 친구 민혁이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민혁은 '좋은' 대학에 다니는 대학생이고 영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그런데 민혁은 이 아르바이트를 개인적 사정으로 그만두어야 한다. 그래서 이를 기우에게 넘기려고 한다. 기우는 4수생으로 대학생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위조'를 통해 과외선생으로 일하게 된다. 기우가 일하게 되는 집은 벤처기업으로 젊은 나이에 성공한 동익(이선균)의 집이다. 이 집에서 집안의 모든 일을 결정하고 꾸려나는 것은 아내, 연교(조여정)의 몫이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연교의 캐릭터이다. 그녀는 한없이 순수하고 착하다. 그래서 잘 속고, 잘 믿는다. 착하다는 것, 순수하고 잘 믿는다는 것은 빈곤이 일상화되어 '계획이 없이' 살아가는 기택의 식구들에게는 절호의 찬스이다. 그들의 '착함'과 '선의'는 기택의 식구들에게 충분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그래서 기택의 가족은 재빠르게 '촉수'를 뻗쳐, 연교의 가족에 ‘찰싹’ 달라붙는다. 착함과 선의로 가득한 연교의 집은 기택의 식구들에게 숙주 삼아 기생하기에 딱 좋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의 위계란 하늘과 땅의 차이이고 애초부터 변경될 수 없는 것이다. 숙주로서 가진자들에게 선의는 있지만 구원은 없다. 어느 날, 주인집이 가족 여행으로 비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넓고 쾌적한 집에서 자신들의 빈곤한 현실을 잊고 부유함의 환상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폭우가 퍼붓고 예정에 없이 주인집 식구들이 귀가하게 된다. 폭우가 세상을 삼킬 것처럼 쏟아지고, 큰비는 대홍수의 그날처럼 세상을 쓸어버릴 것 같다. 그러나 대홍수의 파괴는 하늘에 있는 '부'에는 미치지 못하고, 땅에 떨어진 빈곤에만 영향을 미친다. 쫓기듯 나와 끝도 없이 내려가는 저 빈곤한 땅은 부의 위계를 명확히 보여주며, 어쩌면 세상의 구원이 부에만 있을지도 모른다고 암시하는 것 같다.

노동의 불공정한 교환과 고용 없는 경제시스템은 노동자들의 착취를 기반으로 부를 축적하는 구조이다. 결국 신자유주의적 경제 시스템 속에서 가진 자와 못가진 자들 간의 기생관계는 고정되고 빈곤한 대중들은 생존을 위해 가진 자들에게 더욱 종속될 수밖에 없다. 이는 불공정한 교환으로 노동이 거세된 신자유주의 시대의 필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가 다 끝나도록 바뀌지 않는 빈곤한 대중의 처지는 기우의 공상 속에서만 변화될 뿐이다.

 



 


도태수_
한국학중앙연구원
논문으로 <근대적 문자성과 개신교 담론의 형성>, <근대 소리 매체(라디오, 유성기)가 생산한 종교적 풍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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