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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민족종교’ 다시 읽기
news letter No.613 2020/2/11
최근 필자는 다른 활동을 자제하며 ‘한국민족종교협의회’에서 한국의 민족종교와 그와 관련된 민족문화들을 학술적으로 정리하는 작업, 즉 ‘한국민족종교문화대사전’을 편찬하고 있다. 2016년 5월부터 시작한 이 사업은 올 상반기에 마무리될 것 같다. 2,000여 표제어에 원고지 14,000매의 분량에 달한다. 종교와 문화에 관련된 인문학자 150여명이 집필자로 참여하였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민족종교문화에 관한 지식을 모아 학문의 장에서 누구나 활용할 수 있도록 관련 지식을 표준화하고 체계화하는 것이 이 작업의 목표다. 그런데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여러 사람으로부터 2가지 질문을 자주 받았다. 하나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시대에 민족이나 민족종교는 철지난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민족종교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전자의 물음은 민족이나 민족종교의 시대적 유용성에 관한 질문이다. 1990년대 이후 우리사회에 등장한 탈민족론자들의 주장과 맞닿아 있다. 지금은 민족적 저항이 필요한 일제강점기도 아닌데, 민족종교를 정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궁금한 모양이다. 민족이나 민족주의(민족의 정체성과 통합, 그리고 자치)는 서구에서는 이미 철지난 것이 맞다. 그리고 개인보다 공동체가 강조되는 만큼 개인의 자유나 권리를 제약하는 민족주의의 우익적 성향에 대한 우려도 함께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서구의 경우 민족이나 민족주의는 근대국가의 형성과정에서 독립 국민국가를 만들기 위해 잠깐 등장했다가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하면서 사라졌다. 제국주의는 더 이상 민족이나 민족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같은 서구의 역사적 경험으로 볼 때 민족은 문화적 실체가 아니라 ‘상상의 공동체’라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지적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족이 분열되고 자치(自治)조차 하지 못한 경우, 문화공동체로서의 민족이 정치공동체로서의 국가를 대신하려고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더구나 오랫동안 문화·역사적 공동체로서 정치공동체를 함께 유지해 온 한국에서는 민족 개념이 국가와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호국의 길은 민족을 지키는 길이었다. 그 만큼 우리의 삶의 단위는 민족과 밀착된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민족이나 민족주의는 서구와 다르고, 일본이나 중국과도 상당히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종교의 장에서도 민족종교라는 이름이 사회정치적으로 요청되고, 민족의 통합과 자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민족종교는 끊임없이 소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후자의 물음은 민족종교에 대한 개념의 모호함과 인식의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종교는 보편적인 것인데, 구태여 민족종교라는 개념이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더하고 있다. 그 모호함과 혼란은 신종교, 자생종교, 토착종교 등의 개념과 서로 중첩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통용되고 있는 민족종교의 개념이 너무 추상적이고 이념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좀 더 종교적인 특성을 고려해 구체적인 민족종교 개념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근대 민족주의를 수용한 종교라든지, 민족의 고난을 극복하고 미래 비전을 제공하는 종교로만 규정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적어도 민족종교라고 한다면, 어떤 신앙형식을 활용하든지간에 역사의 주체로서 민족을 상정하고,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민족현실에 대한 진단과 미래 전망을 가지며, 민족공동체에 전승되고 있는 토착적 종교성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어야 한다. 이 경우 민족종교는 세계종교의 하위 개념으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종교적 특성을 가진 독자적인 종교영역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런 기준을 가지고 보면, 한국의 민족종교는 역사의 주체로서 단군, 시대정신인 개벽, 그리고 민족의 종교성인 신명으로 그 특성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셋이 어우러진 종교가 바로 한국의 민족종교다. 기독교의 신앙형식을 가진 종교라도 이 세 요소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면 훌륭한 민족종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장의 민족종교는 종교마다 강조점이 다르고 셋의 어울림도 조금씩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의 민족종교에는 민족의 상징을 표상한 단군의 종교도 있고, 시대정신을 강조한 개벽의 종교도 있으며, 민족의 종교성을 담은 신명의 종교도 있다. 나아가 개벽과 신명이 어울려 동학이 되고, 민족의 상징과 개벽이 어울려 대종교가 되며, 민족의 상징과 신명이 어울려 증산교가 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의 민족종교는 우리 삶의 단위인 민족의 역사와 혼이 담겨있는 종교들이고, 한민족의 미래 전망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 민족사의 수난과 함께 고초와 시련을 겪어온 종교다. 일제강점기 애족운동에 앞장선 것이 민족종교요, 독립군 양성을 위해 만주에서 많은 학교를 세운 것도 민족종교다. 3·1혁명을 시작한 것도 천도교이고, 민족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에 큰 공헌을 한 것도 대종교다. 이런 민족종교의 위상을 되살리고 계승·보존하는 일은 민족의 생존, 나아가 남북통일과 평화의 초석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민족종교가 국내문제에만 함몰되었거나 외래문명에 비타협적 자세로 일관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일찍부터 서구 물질문명에 동양의 정신문화를 접합함으로써 새로운 도덕세상을 열어가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른바 영육쌍전(靈肉雙全)이고, 과학과 도학의 합덕(合德)이다. 동서의 상극적 갈등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는 길은 새로운 도덕문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원상생(解冤相生)의 원리를 기반으로 동서합덕(東西合德)도 주창하고 있다. 이들 민족종교문화를 한국의 문화사에 올곧게 정착하는 것이 과거 일제 식민사관의 청산은 물론 미래 민족통합과 인류평화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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