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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12호-전염병을 피하여 거처를 옮기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0. 2. 4. 21:19

전염병을 피하여 거처를 옮기다


news  letter No.612 2020/2/4   

 

 



1623년에 옥담(玉潭) 이응희(李應禧, 1579~1651)는 전염병이 걸린 아내와 자식을 집에 두고 어머니만을 모시고 다른 마을로 피신하였다. 그때 자신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처자식 소식은 매우 걱정이 되고(妻孥消息堪疑惧) / 친구들 서신은 끊어져 적막하구나(親舊音書斷寂寥)/담장 틈으로 매양 약만 넣어줄 뿐이니(墻隙每令投藥物)/집안에는 땔나무나 있는지 늘 염려되네(家間長念絶薪樵)” (이응희 지음, 이상학 역, 《옥담유고(玉潭遺稿)》, 소명출판, 2009,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 DB 참조) 염병에 걸려 격리된 자와 이를 피하여 다른 지역으로 옮긴 자, 그 사이 담장의 틈이 가족이란 관계 속에서 애잔함을 전한다.

병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옮겨 머무는 것을 피우(避寓) 또는 피접(避接)이라 하였다. 그 무엇보다 전염병이 발생하였을 때 사람들은 다투어 안전한 곳을 찾아 도망하였다. 원인을 알 수 없이 어린 아이고 장정이고 열병에 허덕이다 죽어가기 시작하면 죽음의 슬픔에 앞서 극도의 두려움이 엄습한다. 고칠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최선의 방법은 감염되기 전에 피신하는 것이다. 이규경(李圭景, 1788 ~ 1856)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종두변증설〉에서 영남 사람은 두창을 호랑이처럼 두려워해 마을에 두창이 생기면 이를 피해 도망가 늙어 죽을 때까지 걸리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1724년(영조 즉위)에 서울에 마마가 극성을 부리자 경연 검토관이었던 홍정상(洪廷相, 1677-1730)은 체직을 청하는 글을 올렸다. 그는 어머니의 성화를 못 이겨 마을 우물이 조금이라도 깨끗하지 않으면 도망 다녔기에 깊은 산골짜기 안 간 데가 없었으며 쉰 나이에 이르도록 마마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부인동 향약으로 유명한 최흥원(崔興遠, 1705-1786)도 1746년(영조 22) 1월에 전염병을 피해 집을 나갔다가 6월에 돌아오고 다시 11월에 피접하여 다음해 5월에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

피하는 것이 능사지만 피하기 어려운 상황 역시 있다. 그 어려운 상황이 대부분 생계와 연관되겠지만 가끔 종교 의식과 관련이 있다. 유럽 기독교과 달리 조선시대 사람들은 일요일마다 교회에 모일 일이 없었다. 대신 관례(冠禮), 혼례(婚禮), 상례(喪禮), 제례(祭禮) 등의 의례가 있을 때면 모였다. 관례나 혼례는 전염병이 돌 때를 피하여 날을 잡으면 된다. 그러나 정한 날을 연기하지 못해 혼례를 치를 때가 있는데 그것은 여러 마을을 통과해 신부집으로 가야하는 신랑뿐 아니라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위험한 일이었다. 제사가 있을 때면 친지들이 모인다. 과연 조상신이 후손들을 보호해줄 수 있을까?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없다. 집안에 우환이 있다며, 또는 마마신을 노엽게 할 수 없다며 조상 제사를 그만 두는 경우가 많았다. 제사를 지내더라도 천연두를 앓지 않은 사람은 참여하지 못하게 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상례를 피하기란 쉽지 않았다. 조선시대 상례는 시신을 매장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3년 동안 매일 음식을 올리며 망자를 추모하였다. 전염병에 감염된 사람을 간호하는 일이나 사망한 시신을 거두어 염습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남을 것인가 도망갈 것인가? 효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유교 사회라도 이 죽음 앞에서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자(朱子)는 이런 상황에서 “전염되지 않으니 반드시 피할 필요가 없다”고 거짓말하는 것보다 “비록 전염되지만 피하는 것은 부당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전자가 ‘이해(利害)’로 말한 것이라면 후자는 ‘은의(恩義)’로 말한 것이라 했다. 퇴계 이황은 주자의 주장을 염빈(斂殯) 때로 한정했다. 즉, 염빈을 마친 상태라면 물러나 피해야 된다고 하였다. 주자를 최고로 신봉하더라도 전염병이 창궐한 상황에서 부모의 시신을 부여안고 지킨 사람이 얼마나 될까?

병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동서고금에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염병 환자를 격리시키지 않은 이웃이 있으면 원망했고, 먼 곳에서 전염병을 피해 자기 마을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양반들은 전염병의 일선에 종들을 내어 보내고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였다. 나라에서는 길가에 늘어진 시신을 치우는 일에 승려들을 동원하였다. 그럼에도 피붙이의 끝을 놓지 않으려는 자식과 애비, 어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의 긴 시간을 이겨내었다. 주자의 언설이 완전한 답이 될 수 없지만 외면할 수도 없다. 전염병이 성해질수록 오염된 자와 오염되지 않은 자를 가르는 벽이 견고해지듯이 산 자가 지켜야 할 가치 역시 뚜렷해진다. 격리와 회피 속에서 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지켜야 하는 가치와 사랑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옛날처럼 전염병의 소식에 급하게 산으로 도망갈 필요가 없다. 의약이 발전하였고 검역체계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였다. 도망 갈 수도 없다. 우리의 삶이 그들보다 더 척박한 현실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감염균이 득실거리더라도 전철을 타고 도시에 들어가야 한다. 그럼에도 감염에 의해 격리되거나 이들 곁에서 돌보는 사람들의 아픔과 노고를 생각하면서 ‘은의(恩義)’를 외면하지 말 것이다. 전염병이 육체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도 할퀴고 가기 전에 끝나길 바랄 뿐이다.

 



 


이욱_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주요 저서로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조선왕실의 제향 공간-정제와 속제의 변용》, 《조선시대 국왕의 죽음과 상장례-애통•존숭•기억의 의례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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