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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10호-머리카락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0. 1. 21. 21:43

머리카락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news  letter No.610 2020/1/21   

 

 

 

 


종교학에서 정신분석학은 그리 인기 있는 연구 분야가 아니다. 아마도 정신분석학의 ‘과도한 환원’ 작업에 대한 여러 고전적 비난이 그 원인일 수 있다. 최근에 나는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은 정신분석학적 연구가 종교학 연구자에게 가하는 ‘성적 수치심’이라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개인사(個人史)를 넘어서 사회정치적 맥락에 가닿지 못하는 성적 언설을 ‘관음증’이나 ‘노출증’으로 매도하는 일정한 학문적 분위기가 감지된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정신분석학이 제시하는 ‘과도한 해석’은 언제나 우리의 학문적 소심증을 되돌아보게 한다.

예컨대 우리는 할례가 초래하는 ‘정신적 변형’은 이야기하지만, 할례의 현장에서 흐르는 ‘피’와 성기에 가해지는 ‘상처’에 대해서는 해석을 중지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추상적인 몸에 대한 이야기에는 익숙하지만, 몸을 이루는 각각의 신체 기관의 종교적 역할이나 의미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다. 입이 아니라 미각을 이야기하고, 귀가 아니라 청각을 이야기하고, 눈이 아니라 시각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몸은 그저 감각으로 추상화된다. 최근 물질주의적 종교 연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물질과 정신’의 이원성이라는 굴레를 좀처럼 탈피하지 못하는 것 같다.

최근 들어 시간이 날 때마다 20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정신분석학적 연구 성과들을 살펴보고 있다. 요즘에는 몸과 관련하여 ‘할례’, ’빙의’, ‘머리카락’ 같은 주제와 관련하여 자료와 생각을 축적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종교와 머리카락이라는 주제와 관련한 몇몇 연구를 간략히 소개함으로써, 종교학의 연구 방향에 대해 작은 생각거리를 던져보려 한다.

먼저, 종교학자인 데이비드 치데스터(David Chidster)가 ⟪종교: 물질적 역학⟫이라는 책에 실린 ⟨성스러움⟩이라는 글에서 이야기하는 머리카락부터 살펴보자. 인도의 티루파티에 있는 스리 벤카테스와라 신전에서는 매년 천 만 명의 신자들이 신의 축복을 기원하며 삭발을 하고 신에게 ‘머리카락 희생제의’를 올린다. 이 ‘머리카락 희생제의’는 헤어 스타일로 표현되는 인간의 허영심을 희생하는 의례로 여겨진다. 이 신전에는 500명의 이발사가 있고 매일 찾아오는 5만 명의 순례자가 있다. 이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보자. 그렇다면 이렇게 잘려나간 천 만 명의 머리카락은 어떻게 처리되는가? 잘려나간 성스러운 머리카락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신전의 중요한 수입원이 된다.

신전의 사제들은 머리카락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며 머리카락을 경매에 부쳐 수출하는데, 대부분은 케라틴(keratin) 생산을 위해 중국에 팔리고, 나머지는 가발과 위브(weave, 연장된 모발) 제작을 위해 유럽과 미국으로 팔린다. 유대인 여인들의 가발에 사용하는 머리카락이 힌두교 신전에서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스라엘에서는 정통 랍비들이 이러한 가발은 우상숭배라고 판결한 적도 있다. 치데스터는 머리카락을 통해 ‘성스러움의 상업화’라는 문제로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성스러움의 판매’는 종교가 침묵 속에서 행하는 필연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치데스터는 머리카락 자체보다는 ‘성스러운 물질’의 흐름이 낳는 여러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의 논의를 길게 살펴볼 여유는 없다.

다음으로 정신분석가인 찰스 버그(Charles Berg)는 ⟪머리카락의 무의식적 의미⟫라는 책에서 체모(體毛), 즉 털의 다양한 의미를 살피고 있다. 그는 “우리가 옷을 입은 사회적 상태에서 드러내는 머리카락이 사회가 우리에게 허용하는 유일한 남근, 즉 우리가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남근”이라는 시각에서 논의를 전개한다. 그에게 머리카락은 “가시적인 남근”이며, 머리카락은 노출증과 거세 불안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이처럼 그는 머리카락과 관련된 일체의 행동에서 ‘거세 불안’과 ‘노출증’을 읽어낸다. 사회에 의해 심각한 거세를 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머리카락을 빗으로 눕혀 단정하게 하고, 서둘러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매일 면도를 한다. 또한 실제보다 머리숱이 많아 보이는 헤어스타일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는 탈모, 흰머리, 빳빳하게 세운 머리카락, 빠지는 머리카락을 모두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한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종교학 연구자에게 큰 울림을 주지 못한다.

찰스 버그는 임상 자료뿐만 아니라 인류학, 민속학, 전설 등에 등장하는 머리카락 이야기를 자기 이론의 증거로 제시한다. 예컨대 트로브리안드 섬에서는 장례식 때 애도의 일환으로 머리털을 모두 밀어버린다. 찰스 버그는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거세=머리카락의 제거”라는 등식 속에서 독해한다. 또한 그는 죽은 자와 함께 머리카락을 매장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관습, 턱수염을 면도하면 초자연적 힘을 잃는다고 믿어지는 마사이 족의 추장, 사춘기 소년과 소녀의 머리카락을 죽은 자, 신, 강물 등에게 공물로 바치는 머리카락 희생제의, 정화 의식을 위해 잘리는 머리카락, 초야를 치르기 전까지 처녀의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관습 등을 예로 든다. 또한 그는 성인식에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턱수염을 면도하는 일종의 ‘대체 할례’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찰스 버그는 머리카락이라는 예를 통해서 가장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인간 행동조차도 기실 무의식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

마지막으로 머리카락에 가장 관심을 많이 기울인 인류학자인 에드먼드 리치(Edmund Leach)의 이야기를 잠시 들어보자. 리치는 ⟨주술적인 머리카락⟩, ⟨성서의 머리카락⟩ 같은 글을 쓴 바 있다. 리치가 머리카락에 관심을 가진 것은 주로 찰스 버그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찰스 버그가 주로 프레이저의 글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리치의 글은 시작된다. 이미 1886년에 빌켄(G. A. Wilken)은 머리카락과 애도의례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빌켄에 따르면, 애도의례에서는 보통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삭발을 하거나, 아니면 머리카락을 헝클어진 채 방치하고 턱수염도 자라도록 내버려둔다. 다만 찰스 버그와 달리 빌켄은 머리카락이 섹슈얼리티가 아니라 퍼스낼리티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대릴 포드(Darryl Forde)도 나이지리아의 야쾨족에 대한 연구에서 삭발과 음핵절제의 상징적 연결, 그리고 머리 기르기와 임신의 상징적 연결을 보여준다. 또한 미얀마에서는 미혼 여자는 머리를 짧게 하고, 기혼 여자는 머리를 길게 길렀다고 한다. 그리고 사춘기나 결혼에 의해 성적 지위가 변할 때 조발(調髮, hairdressing)의 방식이 달라지는 것도 거의 일반적인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머리카락과 섹슈얼리티 사이의 관계를 입증하는 인류학적 증거는 차고 넘친다. 굳이 이런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힌두교와 불교에서 삭발이 독신(獨身), 또는 성적 절제를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에드먼드 리치는 동일한 자료를 놓고 인류학자와 정신분석가가 얼마나 다른 해석을 내놓을 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 예컨대 리치는 “머리카락이 의례를 강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례적인 상황이 머리카락을 강력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정신분석가에게는 섹스가 제일 앞에 오지만, 인류학자에게는 신(즉 사회)가 제일 앞에 온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리치는 머리카락 자체의 고유한 성스러움이 아니라 머리카락을 성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의례적 맥락을 탐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찰스 버그와는 다른 해석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리치는 의례적 상황이 특정한 상징을 ‘신과 사회의 집합표상’으로 전환시킨다고 말하면서, “가장 진부한 것조차도 가장 강력한 성스러운 존재로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의례의 본성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에드먼드 리치는 인류학자가 이미 알고는 있지만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사실에 대해 정신분석학이 그럴듯한 설명을 제공해준다고 말한다. 즉 적어도 정신분석학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에 대한 습관적인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우리가 정말 그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에 대해 다그쳐 묻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학이 정말 정신분석학보다 더 그럴듯한 해석, 더 적합도가 높은 해석을 내놓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이창익_
한신대학교 강사
저서로는 《종교와 스포츠》, 《조선시대 달력의 변천과 세시의례》 , 역서로는 《종교, 설명하기: 종교적 사유의 진화론적 기원》, 《구원과 자살: 짐 존스·인민사원·존스타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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