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새해입니다
news letter No.609 2020/1/14
이렇게 되풀이 새해맞이를 한지가 여든 번도 훨씬 넘었습니다. 너무 긴 세월을 소모했다는 사실에 자괴감조차 듭니다. ‘또’라는 말을 떼어내기까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는지요. 지금은 아니어서 다행스럽기도 합니다만 또 한편 그 아님이 무척 안타깝기도 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전에는 별로 느끼지 못했던 일들입니다.
이를테면 ‘어제의 효용은, 지난해의 그늘은, 과거의 흔적은, 역사적 존재의 현존은, 내게 언제까지, 그리고 어디까지일까?’ 하는 생각이 그러합니다. 겪었던 일들, 만났던 사람들, 일어난 사건들, 사소한 일상들이 생생한데, 쉼 없이 저를 스쳐 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지난 일들, 사람들, 사건들, 일상들은 이제 없습니다. 남은 것은 그렇게 스쳐 감을 일컫는 나 자신뿐입니다. 나는 아직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사라진 것의 효용도, 그늘도, 흔적도, 현존했던 사실도 여전히 지금 여기 있는 나에게 있습니다. 어제도 지난해도 과거도 역사적 현존도 나와 무관하지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서로 이어져 있었다는 것, 그래서 내가 그 안에, 또는 그가 내 안에 있었다는 것은, 그 있음의 양태가 어떤 모습으로 얽힌 것이든, 내게 여전한 현존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어제는 오늘에 스며 있어 사라진 것이 아니며, 지난해는 올해의 석양이 다하기까지 그림자를 지우지 않을 것이고, 과거라고 일컫는 긴 흔적은 더 다듬어진 새김(刻)으로 지속할 것이며, 역사적 실재들은 웅장한 바위의 모습으로 나와 더불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문득 궁금한 것은 그러한 있음의 실상입니다.
어제나 지난해나 과거나 역사가 그렇게 있다는 그 있음이 정말 그러한 것들의 있음의 실상일까 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를테면 어제는 어제의 나에게 오늘이었는데 이제는 오늘의 나에게 어제여서 이미 더불어 있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어제의 오늘은 어제의 저와 만나고 갈등하고 대화하고 다툼하던 주체입니다. 그런데 그 오늘이 내 오늘의 어제가 되면서 그 주체성이 내 삶의 울안에서 온전히 사라졌습니다. 비록 어제가 오늘의 내게 어제의 오늘로 여전히 있다 하더라도 그 어제는 내가 간과해도 아무 일 없는 막연한 객체로 있을 뿐입니다. 나와 더불어 있을 수 있었던 그들의 주체성을 이미 그들은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역사를 일컬어 ‘과거와의 대화’라고 한 말은 고이 받아드리기 어렵습니다. 침묵하는 주체와의 대화, 침묵이 필연인 주체와의 대화란 이미 대화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발언이 가능하고 다른 한쪽은 발언이 불가능한데 그 관계를 아직 대화라는 틀로 서술하는 것은 발언 가능한 쪽에서 발언 불가능한 쪽을 마구 다루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모습으로밖에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역사란 현재의 전횡(專橫)에 의해 만들어진 현재의 산물 이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실재하는 과거이지조차 않습니다. 과거는 이미 현재에 의해서 무산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라진 것의 효용이나 그늘이나 흔적이나 현존이라는 것들은 사라진 것의 현존하는 모습이 아니라 실은 지금 여기의 살아있는 주체가 지은 것 이상이지 않습니다. 사라진 것은 사라진 채 이미 없습니다. 그것이 사라진 것의 지금 여기 있음의 실상입니다.
설익은 무지한 생각임을 스스로 모르지 않지만, 해를 되풀이하다 보니, 이른바 기억이나 과거에 대한 회상의 길이가 스무 해 전에서 서른 해 전으로, 다시 거기에서 마흔 해나 쉰 해 전으로, 또 이에 이어 일흔 해 전으로 거슬러 오르면서 이제는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숱한 회상 안의 주체들이 더 쌓여가는 데, 내 회상을 터 삼아 지난 세월을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이 이리도 오만할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회상조차 마음대로 숨을 쉴 수 없구나 하는 것을 저리게 느낍니다. 자칫 참람(僭濫)한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이런 제 모자란 생각이 비단 감상(感傷)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보다 반세기도 더 젊은 세대의 학자들에게서 학문적으로 다듬어진 이러한 ‘감상적 고뇌’가 공감적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Brent Nongbri의 Before Religion: A History of a Modern Concept(Yale University Press. 2013)은 처음부터 ‘이미 낡았다’고 평한 사람도 있고, 아직은 ‘설익은’ 저술이라고 평한 사람도 있지만, 저에게는 그 책의 문제의식이 더할 수 없이 반가웠습니다. 특히 2장 Lost in Translation: Inserting “Religion” into Ancient Texts 와 7장의 Modern Origins of Ancient Religions 의 주제가 제 물음을 선명하게 공명해준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구체적인 서술내용에서는 공감을 주저하게 하는 부분도 적지 않고, 또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현재가 과거를 짓는다는 자기 논리전개의 기저(基底), 그 과정에서 과거는 현재가 자기를 서술하는 데 대해 속수무책이라는 것의 암묵적 지적(비록 이러한 자기 이해를 잔뜩 감추기는 했어도)은 지기(知己)를 만난 듯했습니다. 고대 경전에 현대의 개념들을 마구 집어넣어 재단하는 일의 어처구니없음을 이야기한다든지, ‘고대종교의 기원은 현재’라는 역설적인 서술이 제게 그런 정서를 지니게 했습니다. 묻고 싶은 것을 묻는 정직성이 배어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새해입니다. 그만큼 과거의 몸집은 커집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내가 살아있는 한, 그 과거의 현존을 짓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비록 그것이 전횡이나 폭력으로 읽힐지라도 그것이 바로 ‘살아있어 오늘을 사는 삶 주체’의 운명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생존방식이고 존재의미인 거죠. 지난 것 되 짓는 것은 지금 여기에 있는 자의 특권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주 무례한 새해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가 올해는 ‘전횡과 폭력을 주저하지 않는 염치없음’을 감행하는 상상력을 발휘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살아있는 주체라는 사실을 저리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이렇게 거칠게 말씀드려 죄송합니다만 달리 표현할 길이 제게 없습니다.
새해, 더 높고, 더 넓고, 더 깊고, 더 넉넉하시길 기원합니다.
아. 더 따듯하시기도요.
정진홍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
저서로《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 종교담론의 지성적 공간을 위하여》,《열림과 닫힘: 인문학적 상상을 통한종교문화 읽기》,《경험과 기억-종교문화의 틈 읽기》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