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책, 면역, 공동체
news letter No.677 2021/5/11
지난달에 주한 벨기에 대사 부인이 용산의 옷가게에서 직원을 폭행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계기로 외교관 가족의 면책특권 문제가 세간의 화제로 등장하였다. 대사 부인이 자발적으로 조사받으러 출두하지 않는 한, 사실상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다. 벨기에 정부에 부탁하여 면책특권을 박탈하도록 하거나 그 부인을 한국에서 추방한 후 인터폴을 통해 압송해 오는 것밖에 없다. 외교관과 그 가족은 주재국에서 치외법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1) 이런 면책특권은 1961년에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체결된 협약에 의한 것인데, <외교관계에 관한 빈 협약>(Vienna Convention on Diplomatic Relations)이 그것이다. 그에 따르면 외교사절은 주재국의 행정적, 사법적 조치를 받지 않고,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도 체포, 구금될 수 없으며, 공관도 불가침의 위치를 누린다. 한 마디로 외교관과 그 가족은 해당 국가의 권력이 미칠 수 없는 ‘신성성’의 영역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해당 국가의 국민이라면 당연히 짊어져야 할 의무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외교관의 면책(diplomatic immunity)은 대단한 특권이다. 그런 특권이 부여되는 까닭은 외교관이 그냥 하나의 자연인이 아니라, 국민국가의 화신(化身)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외교관은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 그들의 피부는 자기 나라의 국기(國旗)로 만들어져 있고, 그들의 심장은 그 국가(國歌)에 맞춰서 쿵쾅댄다. 외교관은 주재국의 사람들과 결코 같은 등급이 아니다. 외교관과 등급을 견줄 수 있는 자는 오직 다른 외교관밖에 없다.
대사 부인의 폭행 사건이 다른 때에 일어났다면 아마도 별 흥미를 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백신 접종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외교관 면책이 거론되니까 면역과의 연관성이 상기되면서 관심을 갖게 된다. 면책과 면역에서 면(免)은 “피하다,” “빠져나오다,” “벗어나다”라는 뜻이므로, 책임과 역병에서 면제됨을 나타낸다. 책임에서 벗어나고, 염병에 걸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외교관은 자신이 국민국가를 구현하고 있기에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감당하는 책무를 같이 할 수 없는 자이며, 백신을 맞은 이는 염병과 싸울 전투력을 보강하였기에 드디어 그 횡포에서 벗어나게 된 자이다. 면책과 면역이 모두 강조하고 있는 바는 “더불어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재국의 장삼이사가 맡는 책임을 도대체 같이 할 수 없으며, 염병의 하수인 노릇하는 자들과 같이 할 수 없다. 두 용어에 해당하는 영어가 모두 “이뮤니티”(immunity)인 점도 주목할 만하다. 면역학적인 것보다 외교적인 것이 시기적으로 앞서 나타났으므로 “이뮤니티”의 외교적 맥락이 면역학적 사고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기본 분위기는 아(我)와 비아(非我)를 날카롭게 구분하고, 비아 진영과의 대결에 집착하는 것이다.
여기서 요새 각광을 받고 있는 로베르토 에스포지토(Roberto Esposito: 1950~)의 논의를 잠깐 살필 필요가 있다.2) 그에 따르면 “코뮤니타스”(Communitas)와 “이뮤니타스”(Immunitas)라는 라틴어는 “무누스”(munus)를 공유하면서 서로 반대의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 “무누스”는 의무, 증여, 선물 등을 뜻하는 말로서, 무누스를 같이 하는 것이 코뮤니타스이고 같이 하지 않는 것이 이뮤니타스이다. 코뮤니타스 즉 공동체는 구성원 모두를 배려하고, 이질적 타자에게 조건 없이 무누스를 베풀어서 성립한다. 반면 이뮤니타스는 그런 의무를 거두어들이고, 문을 걸어 잠근 것을 나타낸다. 문을 잠가놓고 작당하여 꾸민 것을 코뮤니타스라고 부르는데 익숙한 이들에게는 이런 관점이 낯설게 여겨질 법하다. 에스포지토의 관점에 의하면 이질성에 열려있지 않고, 동종순혈의 패당으로 일관하게 되면 새로운 공동체의 성립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며, 자기(自己)면역(autoimmunity) 질환과 같은 파괴적인 징후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코뮤니타스와 이뮤니타스는 서로 상반된 방향성을 가지고 있으나, 그렇다고 상극적인 두 실체라고 볼 수 없다. 이뮤니타스가 전혀 없는 코뮤니타스는 상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코뮤니타스에는 자신의 경계를 지키는 이뮤니타스가 작동하고 있지만, 문제는 이뮤니타스가 강박적으로 자신의 경계선에 집착할 때 생긴다. 비아(非我)를 적(敵)으로 여겨 배척하는데 골몰한 탓에 어느새 아(我)까지 적대하고 공격하여 스스로 자신을 파괴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면역의 파괴적 증상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예컨대 기독교 및 무슬림 근본주의가 자행하는 폭력, 이민 배척운동, 경제위기 상황에서 약자에 대한 가혹한 처우 등에서 모두 결국에는 자기 발등을 찍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코비드-19의 상황도 여기에 빠질 수 없다. 염병의 시대에 사회 주변부의 약자들은 벼랑에 몰리고 있고,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어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으며, 국제적으로도 빈국과 부국의 격차는 점점 확대되고 있다. 이런 파괴적 자기면역 경향이 지속된다면 그동안 이른바 “노장사상”의 방식을 내면화하여 착취의 부작용을 은폐하는데 능수능란했던 신자유주의 체제도 더 이상 지탱하기가 쉽지 않게 될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내용 가운데, 면책과 면역의 면(免)에서 강조한 것은 “함께 하지 않음”, “구별하여 배척함”의 측면이었고, 이어서 서술한 것은 이뮤니타스 및 자기면역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면(免)의 본래 상형문자 뜻을 살펴본다면 면(免)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상형문자 면(免)이 보여주는 것은 아기를 해산하는 임신부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 경우에 면은 벗어남, 피함 등의 소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기보다, 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생산한다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마찬가지로 어머니가 자궁 속의 태아를 이물질로 간주하여 이뮤니타스의 측면만이 부각된다면, 아기가 세상에 나와 새로운 코뮤니타스가 만들어지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우리에게 많은 상처를 남기고 있는 코비드-19의 상황에서도 우리가 값지게 배울 점은 있다. 코비드-19의 지금을 살아가면서 2018년에 예멘인들이 난민 신청을 했을 때, 우리들이 취했던 태도를 상기해 보는 것도 쓸모 있다. 현재에는 북한에 대한 증오심으로 잠재화되어 있지만, 상황이 바뀌어 한민족패권주의와 인종주의적인 편견이 두드러지게 될 때를 걱정하는 것도 헛일은 아니다. 이 모두 자기면역의 파괴적 귀결을 면(免)해보고자 미리 준비함이며, 서로 얽힌 채 기대며 살고 있는 우리의 취약한 존재를 다시 확인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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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일 외교관의 가족이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당연히 한국법의 적용 대상이 된다.
2) 삼부작 《코뮤니타스Communitas》(이탈리아본 1978, 영어본 2004), 《이뮤니타스Immunitas》(2002, 2011), 《비오스Bios》(2004, 2008). 그의 책 가운데 한국에서 번역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2015년에 김상운의 번역으로 《진보평론》과 《문화과학》에 그의 저술 일부분이 소개되었다.
장석만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근대성의 이면(裏面)’으로서의 점복, 그리고 그 너머>, <‘종교’를 묻는 까닭과 그 질문의 역사: 그들의 물음은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던지는가?>, <인권담론의 성격과 종교적 연관성>등이 있고, 저서로 《한국 근대종교란 무엇인가?》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