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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76호-비는 내리지 않는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1. 5. 4. 19:44

비는 내리지 않는다

 

newsletter No.676 2021/5/4

 

 






이번 학기에 《중론(中論)》을 읽고 있다. 기원 후 200년을 전후하여 인도에 생존했던 중관불교(中觀佛敎) 철학자 용수(龍樹, Nagarjuna, AD.150?~250?)의 대표적인 논서다. 주지하다시피 이 책은 이른바 ‘팔불중도게(八不中道偈)’로 알려진 다음의 유명한 문구로 시작한다.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구마라집 한역, 이하 동일)


“(새롭게) 생겨나지도 않고 (완전히) 소멸하지도 않으며, 항상되지도 않고 단절된 것도 아니다.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어디선가) 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론가) 나가는 것도 아니다.”(김성철 역, 《중론》, 경서원, 1996-개정판, 이하 동일) 여덟 번 부정함으로써 중도(中道)의 이치를 설파한 노래라고 해서 이름이 ‘팔불중도게’다. 이어지는 게송에서 “능히 이런 인연법을 말씀하시어 온갖 희론을 잘 진멸(鎭滅)시키시도다.[能說是因緣 善滅諸戱論]”라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이는 인연연기법(因緣緣起法)에 대한 설명이기도 한 모양이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연기법은 이렇게 중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용수의 《중론》 오리지널 버전에는 단지 위와 같은 5언 4구의 게송 500수만 실려 있을 뿐이다. 여기에 후대의 중관학파 논사 청목(靑目, 4C 전반 추정)이 주석을 달았다. 팔불중도게에 대해 청목은 곡식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모든 곡식은 이전의 곡식으로부터 나온 것이니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전 곡식으로부터 다음 곡식이 생겨나므로 완전히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곡식의 싹이 틀 때 씨앗은 변하여 없어지므로 상주하지 않는다. 하지만 곡식에서 싹이 나온다는 것은 씨앗이 완전히 단멸되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한편 곡식과 싹은 서로 다른 것이므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역시 같은 곡식의 싹이고 줄기이고 잎이므로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 씨앗에서 싹이 트는 것은 다른 곳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싹이 씨앗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므로 간다고도 말할 수 없다.

많은 현대인이 동일율과 모순율 그리고 배중율의 논리체계 속에서 사유하므로, 청목의 저 같은 비유는 생명 순환의 다양한 측면을 자의적으로 갖다 붙이며 이것과 저것[이것 아닌 것]을 모조리 부정하는 말장난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모순율을 정면으로 깨뜨리는 중관철학의 저러한 시각은 멀게는 진정한 진리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기에 오직 “neti neti”의 부정어로밖에 이야기될 수 없다는 우파니샤드의 언어관을 계승하며, 가깝게는 논리학을 발전시키다 못해 끝내 논리 자체를 부정하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인도 육파철학의 니야야 학파의 영향력 하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네 번이나 되풀이된 모순율의 부정이 바로 생명의 순환을 들어 설명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곡식은 그 선대로부터 나와 후대로 이어지므로 생멸(生滅)과 상단(常斷)의 이분법으로부터 자유롭다. 이 곡식에서 이 싹이 움트므로 이들은 동일성과 분리가능성의 여부로부터도 자유롭다. 즉 《중론》의 사유체계는 세대 간 생명의 순환과 성장의 원리로부터 바로 사물에 대한 고정된 실체론적 인식이 아닌 변화와 흐름의 과정으로 세상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변화와 흐름의 과정으로 보는 세상. 이것은 부처가 연기의 이치로 바라보는 세계관이기도 하다.

변화와 흐름으로 바라보는 세계는 서술어의 세계다. 이는 명사의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다. 무아(無我) 즉 고정된 실체론에 대한 부정은 바로 명사에 대한 부정에 다름 아니다. 팔불중도게가 포함된 제1장 관인연품(觀因緣品) 다음으로 이어지는 제2장 관거래품(觀去來品)에서는 이 명사적 시각에 대한 타파가 주된 내용을 이룬다. 가장 인상적인 게송은 이것이었다.

若言去者去 云何有此義 若離於去法 去者不可得
만일 가는 놈이 간다고 말한다면 그런 이치가 어떻게 있겠느냐. 가는 작용을 떠나서는 가는 놈은 있을 수 없다.

관거래품 아홉 번째 게송이다. 가는 놈이 간다는데 그게 왜 말이 안 되나? 가는 놈 즉 행인이라는 명사(noun)가 간다는 행위를 동사(verb)한다. 주어[명사]가 서술어한다.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인류의 언어구조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가는 놈이라는 명사에는 이미 간다는 서술적 행위가 전제되어 있다. 명사에 이미 서술어가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행인이 간다는 것은 동어반복이 된다. 논리적 모순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행인은 행인일 뿐 가지 못한다. 간다고 서술하려거든 행인이라 명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선생은 가르치지 않고, 학생은 배우지 않는다. 바람은 불지 않으며, 비는 내리지 않는다. 선생은 가르치는 자이고 학생은 배우는 자이다. 바람은 불어오는 공기이고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다. 하지만 그렇게 명사로 명명되는 한 그들은 서술어로 서술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인류는 언어로 사유하고, 대부분의 언어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품사가 명사다. 다시 말해 인류는 모든 서술적 행위를 명사적으로 응집함으로써 변화와 흐름의 과정을 고정된 실체로 인식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명사적이고 실체론적인 인식은 이미 언어 습관으로부터 확고해져버린 인류의 사유방식이기도 하다. 《중론》이, 불교가, 깨뜨리고 싶은 건 바로 그 명사적 세계관인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좋단 말인가. 어찌어찌한다는 행위의 서술어조차 우리는 또 ‘동사’라는 명사로써 명명하지 않는가. 명사적 세계관 다시 말해 고정된 실체로 세계를 보는 방식은 실로 인간에게는 여읠 수 없는 인식의 태도인 것 같다. 언어로 사유하는 인간이기에 그렇다. 인간의 언어가 명사를 위주로 하여 인류와 함께 발달해 왔기에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인식을 시작하고 지성을 갖게 된 인간이 수시로 망각하는 것, 바로 세계는 고정된 실체의 명사가 아니라 변화와 흐름의 서술어라는 사실을 우리는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상기하고는 이내 망각한다. 그리고 또 상기한다. 끊임없이 망각하게 되어 있기에,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끝내 이룰 수 없으나 마침내 닿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게 종교의 숙명이다. 희망의 속성이다.

 







 


민순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박사학위 논문으로 〈조선전기 도첩제도 연구〉가 있고, 논문으로 〈조선 세종 대 승역급첩의 시작과 그 의미〉, 〈한국 불교의례에서 ‘먹임'과 ‘먹음'의 의미-불공(佛供)・승재(僧齋)・시식(施食)의 3종 공양을 중심으로〉, 〈불교의 자비행에 내포된 행복 메커니즘-진화심리학과 공리주의적 윤리학의 관점을 중심으로〉, 〈불교에서 점복이 다루어지는 방식에 대한 일고찰-《점찰경》에 나타나는 방편의 위계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 법화계 불교종단의 역사와 성격〉, 〈여말선초의 승군 개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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