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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78호-법당에 불이 나면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1. 5. 18. 16:09

법당에 불이 나면

 

news letter No.678 2021/5/18

 

 

 


대개는 어떤 글을 쓰기 위해서 자기 생각의 흐름을 조절하게 되는 측면이 있지만, 오늘은 생각이 일어나는 대로 가다듬지 않고 말해보려 한다. 실은, 지금 두서없이 떠오르는 몇 가지 질문들은 아직 내 머릿속에 그 어떤 정향(orientation)이나 답안을 갖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지난 3월 가을 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산 내장사에서 어떤 승려가 홧김에 불을 질렀고 그래서 대법당이 완전히 타버렸다고 한다. 법당이 불에 타는 뉴스의 영상을 보면서 맨 처음 내게 떠오른 생각은 불교경전 중 법화경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중생의 온 세계가 불타는 집과 같다’는 화택(火宅)의 비유였다. 설법 그대로, 불이 난 집을 리얼하게 목격한 것이다. 소위 일미화합(一味和合)의 승가공동체라는 절집에서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리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인 것일까, 승려라는 그 방화범의 까닭모를 분기(憤氣)가 실제로 타오르는 불꽃 열기처럼 내게 전해지는 듯싶었다.

그러다 갑자기 내 안에서 부글부글 불편한 심기가 끓어올랐다. 그 절은 수년 전에도 화재를 입었고 법당을 다시 짓는 불사(佛事)에 막대한 자원이 쓰였는데, 또 다시 국민들의 혈세와 기부금을 끌어다가 절 짓기를 해야 할까, 아니다, 당장은 짓지 말아야 한다. 세금으로 지은 건축물을 잘 관리하지 못해서 소실(燒失)하였으니 내장사[조계종]는 오히려 그 책임을 지는 뜻에서 지원받은 금액을 전부 국가에 반환하고, 당시 불교인들이 보시한 금액도 모두 사회로 돌려주는[廻向] 것이 옳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지금은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온나라 경제가 어려운 시국이므로, 법당복구 후원금을 불우이웃에게 돌려쓴다면 더욱 진정한 불사가 되지 않겠는가.

내친 김에 더 나아가, 이번에 불타버린 법당의 잔해를 걷어치우지 말고 그대로 보존함으로써, 불교계에 뼈아픈 교재(敎材)가 되게 하고 승가 구성원들에게 현장학습이 될 수 있도록 활용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방화 뉴스와 함께 홀로 이처럼 씩씩거리다가 문득 생각해보니, ‘불난 절에 당분간 법당을 다시 짓지 말자’는 필자의 주장에 대해서 다른 불교인들의 반응이 어떨까 궁금해졌다. 심히 불경(不敬)스럽고 신앙심이 모자란, 반(反)불교도라고 지탄을 받지 않을까. 물론, 큰 절이든 작은 절이든, 사찰에서의 화재 소식은 종종 있어 왔고 그 때마다 복원(復原) 불사를 하지 않은 곳이 없었을 터이다. 하지만 인도의 석가무니 부처님 당시는 지금처럼 꾸며진 법당이 있지도 않았던 것인데.....오늘날 불교인들에게 ‘법당’이란 무엇일까.

그러고 보니 불교사찰의 법당만이 아니라 가톨릭 성당과 개신교 성전도 처음부터 그렇게 있었던 것이 아니겠지만, 예컨대 2016년 춘천에서 100년 넘은 개신교 교회에 불이 났을 때나 2019년 세계적으로 유명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불이 났을 때, 사람들은 서둘러 그 복구에 힘을 쏟았다. 그렇다. 복구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수순이었을 것이다. 각자의 예배 공간과 그 상징물[聖物]이 불에 타버리는 모습을 보게 될 때, 우선 그 누구보다도 소속한 교인들의 소회(所懷)는 어떠할까. 그런데 가령 이번에 내장사의 화재를 TV 뉴스로 전해 들은 불교 이외 종교인들의 소감이나 노트르담 대성당의 화염을 바라보던 나의 상념을 돌이켜보면, 법당・성당・교회가 종교인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겠다.

그리고 한편에서 화재도 화재 나름으로 달리 돌아볼 문제가 더 생기는 것 같다. 대개의 화재는 오래된 건물에서 누전이라든가 촛불과 같은 불씨를 부주의하게 관리했다든가 하는 경위가 있었지만, 이교도(異敎徒)의 고의에 의한 방화라면 또 어떨까. 불과 수개월 전이라서 아직까지는 기억될 것 같은데, 남양주 수진사라는 절에서 개신교인에 의한 법당 방화사건이 있었다. 그전에도 때때로 법당이나 불상을 훼손한 사건들이 보고되어 왔는데 예를 들어, 2016년에 개신교인이 김천 개운사 법당을 파손한 사건은 당시 사찰에 준 피해보다도 오히려 개신교계에 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문제의 법당을 복구하도록 성금(誠金)을 모으려 한 신학자 손원영 교수가 재직하던 대학과 교단으로부터 축출(逐出)을 당하기에 이른 것이다.

오직 자신의 신앙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찾아가서 굳이 불상들을 내동댕이치고 불 지르는 맹목의 독실함이나, 부서진 불상과 함께 종교적 위엄이 훼손됨으로 말미암아 상심(傷心) 혹은 분개할 불교인을 위로하려는 종교양심이나, 그래서 불교인이 가지게 될 어떤 의미에서 반사적인 신앙심이나, 사사건건 물심양면으로 얽혀 돌아가는 종교계 현상을 종교학자들은 충분히 파악하여 왔을까. 방화든 파손이든 대체로는 단순하게 보고, 어떤 개개인의 충동과 일탈에서 벌어진 일회적 사건으로 치부하곤 했지만, 거기에는 아마도 신앙세계에서 물질적 환경조성이 가지는 특수한 의미가 감추어져 있을 것이었다.

필자로서도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닌데, 종교 상징물에 불을 지르는 방화범들을 자꾸만 상상하게 된다. 맹목(盲目)과 낮은 자존감이 극도의 폭력으로 변질하는 과정을 직접 보는 것 같다. 평소 자신이 예불(禮佛)하던 그 법당에서 신앙적 위의(威儀)와 장엄(莊嚴)이 해체되는 사태를 초래한 그 방화범 승려의 심중에는 진실로 무엇이 작동하고 있었을까. 혹은, 사랑의 하나님을 말하면서 그 종교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기독교도의 심중에는 무엇이 작동하고 있었을까. 종교교리나 신념체계와 달리 물적 토대라는 것은 누구라도 여차하면 엎어버릴 수 있을 만큼 하찮은 것이었을까. 아니다. 여기저기서 화려한 성전(聖殿)을 세우려고 애쓰는 것만 보더라도, 그런 위의(威儀)와 상징물이 종교체계를 이끌어가고 육성하는 바가 분명히 있다. 바로 그렇게 감각의 현상과 기제(機制)를 통찰하고 규명하는 연구가 더욱 필요하다고 본다.

거듭 말하기도 민망하고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이번에 불태워진 내장사 법당을 서둘러 다시 짓기 전에, 부디 불교계는 사찰에서 “법당”이라는 상징적이고도 물적인 토대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 더욱 깊이 성찰하는 계기를 갖기 바란다.

 



 







 


이혜숙_
<계간 불교평론> 편집위원, 전 동국대 겸임교수 
논문으로 <종교사회복지의 권력화에 대한 고찰>, <한국 종교계의 정치적 이념성향 연구를 위한 제언>, <시민사회 공론장 확립을 위한 불교계 역할>, <구조적 폭력과 분노, 그 불교적 대응>등이 있고, 저서로 《아시아의 종교분쟁과 평화》(공저), 《임상사회복지이론》(공저),《종교사회복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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