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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74호-애매모호한 나를 위한 변명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1. 4. 20. 20:28


애매모호한 나를 위한 변명

 

newsletter No.674 2021/4/20

 


 


젊은 시절의 기대와는 달리 살면 살수록 내 머리 속에 분명한 것들이 점점 줄어들고 기존에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오히려 부지(不知)의 류(類)에 분류되곤 한다. 그런데 귀동냥으로 들은 것이나 경험한 것은 있으니 머릿속이 맑고 투명하지도 못해 어떤 정보나 주장을 들으면 동조나 반문의 생각들이 스멀스멀 일어난다. 무식한데 순박하지도 못한 나의 내면을 들키지 않기 위해 더 큰 소리로 횡설수설 떠들어보지만 속으로는 점점 더 위축되고 자기혐오에 빠지게 된다. 명확한 분석과 판단에 대한 요구가 평생 버겁고 말과 글에 논리적 정연함이 없다는 비난이 늘 두렵다. 더욱이 나의 일상, 아니 나의 삶 역시 나의 생각을 닮아 있다. 학자나 선생도 못되면서 생활인으로서의 능력도 모자라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늘 불편하고 미안한 마음이다. 이렇다 보니 생각과 행동에 점점 더 조리가 없어져 뒤죽박죽이 되고 늘 결정과 실행에 장애를 느낀다. 나의 이러한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애매모호(曖昧模糊)’와 ‘혼돈’이다.

‘애매모호’란 단어를 떠올리면서 사전들을 찾아보았다. 원래 ‘애매(曖昧)’와 ‘모호(模糊)’는 별개의 단어인데 흔히 같이 붙여서 사용하고 유사한 의미로 채용되고 있다. 원래 일제시대 전까지는 ‘모호’라는 단어가 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일본식) 한자어 ‘애매(曖昧)’1)의 사전적 의미는 ‘(아직 어두운 새벽처럼) 희미하여 분명하지 아니함’이며 ‘모호(模糊)’ 역시 ‘말이나 태도가 흐리어 분명하지 못함’이 그의 사전적 정의로서 두 단어 모두 논리적으로 명확하지 못하여 한 개념이 다른 개념과 충분히 구별되지 못하여 분명하지 못한 상태를 지칭한다. 민찬홍과 같은 학자는 논문(「애매 모호」, 『철학과 현실』 30호)을 통해 애매와 모호의 구분을 시도하고 있다. ‘애매하다(ambiguous)’는 단어의 내포가 분명치 않은 것으로서 ‘명석하다(clear)’의 반의어이고, 그리고 ‘모호하다(vague)’는 단어의 외연이 분명치 않은 것을 지칭하며 ‘판명하다(distinct)’의 반의어라는 것이다. 설득력이 있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애매와 모호에 대한 그의 구분 역시 내게는 애매모호하게 들린다.


이와 같이 애매와 모호의 차이가 가진 애매모호함을 시인 최승자는 그녀의 시 <나 날>에서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옛날에 옛날에/애매와 모호가 살았는데,/둘은 죽을 때까지/서로 싸웠다./ 너는 왜 그리 애매하냐고,/ 그럼 넌 왜 그리 모호하냐고/둘은 일란성 쌍동이처럼 죽어갔다./정신분열증과 정신분열증 환자처럼/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며 죽어갔다.”

자기혐오적 감정에만 빠져 있을 수 없어 나의 ‘애매모호’함에 정당성을 부여해 보기로 한다. 물론 기본적으로 나의 애매모호한 의식과 자기정체는 지적 게으름, 사유의 부족에 그 원인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한 애매모호함이 인생에는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도 든다.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세계는 그다지 논리적이거나 정합적이지 않다. 부조리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허구(fiction)의 문제는... 그게 너무 말이 된다는 점이다. 현실(실재)은 절대로 앞뒤가 안 맞는다(The trouble with fiction,’...is that it makes too much sense. Reality never makes sense. -『The Genius and the Goddess』-).”라고 한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다.

사실 인생의 과정은 탄생과 죽음이라는 상반된 사태가 그 시작이자 끝이며 인간은 정신과 물질, 신과 사물세계, 성과 속, 선과 악, 양자를 오가는 중간자적 존재이다. 어쩌면 인생이란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설명이 불가피한 대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살면서 경험하는 나의 정신적 혼돈이나 무질서는 그 탓이 오직 나에게만 있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나의 이러한 생각에 핑계를 제공해 주는 것 중 하나가 익히 알려져 있는 『장자』 「응제왕(應帝王)」의 “혼돈(混沌)” 우화이다. 남해의 숙(儵)과 북해의 홀(忽)이라는 임금이 중앙의 임금인 혼돈(混沌)의 초대와 융숭한 대접을 받고 그 덕에 보답하기 위해 그의 칠규(七竅)를 뚫어주었더니 그만 혼돈이 죽고 말았다는 이 우화는 분별과 분석이 가지는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남해와 북해는 밝음(양)과 어두움(음), 생성과 소멸과 같은 인간 사유가 가진 이원적 대립구조를 상징한다. 그리고 숙(儵)과 홀(忽)은 모두 ‘갑자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숙이란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홀은 순간적으로 사라지거나 소멸하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즉 남해의 숙과 북해의 홀은 분별적 의식이 가지는 이원적 구조, 그리고 우주와 시공이 소유한 상대성과 무상함을 상징한다고 할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혼돈은 도(道)라고 하는 무분별적 경지를 상징한다.

숙과 홀은 서로 만날 수 없는 대상이지만 중립지대인 혼돈을 통해 양극단적 입장을 포기하고 조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존에 가졌던 분별의 관성을 이기지 못하여 결국 혼돈마저 파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우화에서 주목할 것은 양극단적 위치에 있던 남해와 북해, 숙과 홀의 조우가 중앙의 혼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숙과 홀에게는 그저 답답하기만 한 중앙의 혼돈이라는 영역은 사실 그들로 하여금 매몰되어 있던 자기자리를 떠나 상반되는 타자를 만날 수 있었던 개방과 소통의 영역이다. 무분별의 혼돈이라는 중간자적 영역에서 분별적 의식들이 자기고립과 편견을 벗어나 의식의 외연을 확장할 수 있었으며 온전한 전체적 의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물론 무지와 사유의 부족에서 생기는 일상적 의식의 혼돈과 이원적 대립을 초월한 미분화적 의식에서 경험되는 혼돈의 경지는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미분화의 혼돈의 경지는 적어도 세속적 지식이나 논리적 사유에 의해 파악되거나 학문적 언술로는 그 실체를 전달하기 힘들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논리적 타당함이나 언어적 명료함이 없어도, 자기고집과 편견에서 떠날 수 있다면 낯선 타자적 대상들과 소통하여 통전적인 세계의 참모습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혼돈은 숙도 홀도 아니지만 숙일수도 있고 홀일수도 있는 대상이다. 섞이어 혼란스럽지만 전체를 융합한 대상이다. 어쩌면 혼돈은 가장 애매모호한 대상일 수 있을 것이다. 인생과 세상이 그렇듯이.

‘혼돈(混沌)’의 우화는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유카와 히데키(湯川 秀樹)가 중간자(meson) 이론을 구상하는데 아이디어의 한 원천이 되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다른 물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원자핵 속의 양성자들이 양전기를 띠고 서로 미는 척력이 작용하고 있음에도 원자핵이 깨지지 않는 이유를 찾고 있었는데, 유카와 히데키가 바로 ‘혼돈’ 우화에서 그 답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는 원자핵 안에 있는 양성자와 중성자는 항상 상대적인 상태이며, 숙이나 홀처럼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이들 두 알갱이를 연결하고 조절해 주는 역할을 하는 중간자가 존재하고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는 것이다. 무슨 내용인지 정확하게 몰라 조심스럽지만 물리적 세계에도 중간자적 위치와 역할이 중요하며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이 그 바탕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이 우화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나의 애매모호함을 스스로에게 변명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붙여 생각을 늘어놓는다. 인생과 세계 자체가 애매모호한 성격이 있다는 생각에 위로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명료하게 지각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함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의 무능과 게으름이 더욱 더 실감된다. 뭘 제대로 알아야 애매모호하거나 혼돈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알 터이니 사실 나의 의식과 행동은 애매모호하지도 못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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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 순 우리말 ‘애매하다’는 ‘아무 잘못이 없이 벌을 받거나 꾸중을 들어 억울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최수빈_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강사
논문으로는 <도교경전에 나타난 우주창조론의 특성 및 도교사적 의미 분석>, <천서(天書)인가 인서(人書)인가 - 도교 경전의 특수성과 대중화 문제에 대한 소고 ->, <중세도교의 자연개념 고찰-위진남북조 시대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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