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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letter No.694 2021/9/7
뉴스레터 지난 호 기고문에서 조현범 선생님께서 불복장(佛腹藏)을 소재로 불교물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신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가슴이 뛰었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1년 하반기 심포지엄의 주제가 ‘종교와 물질주의’로 예정되어 있기에 몹시 시의적절한 글이었다고 생각한다. 필자 또한 물질주의라는 분야에 관심을 가져왔던 터라 심포지엄 발제자 분들의 공부모임을 따라가며 소식을 듣고 있다.
필자가 연구 기반으로 삼고 있는 불교 특히 대승불교 전통은 물질의 실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집착에 기반한 인식의 산물로서 그것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불교에서 물질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관념은 어떤 식으로든 표현되기 마련이고, 대부분의 인간적 표현은 사물을 통하여 구체화되고 또 사물에 그 흔적을 남기게 되므로, 불교가 제아무리 인식론과 심성론 위주의 관념 지향적 교리를 지녔다고 하더라도 불교의 문화전통에서 물질 또는 사물의 존재를 배제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불교의 건축, 조각, 법구(法具) 하나하나가 모두 해당 지역의 전통 속에서 불교의 교의적인 의미를 아로새기며 만들어진 산물이며, 그 모두가 물질불교의 연구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음악이나 의례 또한 저마다의 도구를 사용하여 인간의 신체를 통해 발현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물질주의 연구의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조현범 선생님께서 주목하신 불복장과 함께 공양물로서의 음식이나 불승(佛僧)의 사리(舍利) 등도 불교를 물질주의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여러 학자 분들로부터 각별한 관심을 받는 것으로 안다.
이처럼 고개를 돌리면 눈에 띄는 불교의 유적・유물이고 사물이고 물질들이지만, 필자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과연 그것들을 어떻게 다루고 해석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 물건들의 모양과 용례를 살피어 그 속에 담긴 교리적 의미를 설명하면 될까. 아니면 그 물건들이 제작된 경위를 밝히어 정치경제적 배경을 따져보는 게 나을까. 그도 아니면 그 물건들이 유통되었던 과정을 추적하여 전파 경로에 놓인 문화 간 소통과 길항의 양상을 주목하는 게 좋을까. 그런데 이상의 접근 태도는 모두 물질로부터 교학적, 정치경제적, 인문지리 혹은 비교문화적 의미 ― 바로 여하하게 ‘정형화’된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혹시 물건 그 자체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personality)으로 간주하여 그 탄생과 성장, 변화와 쇠퇴의 과정을 추적하며 그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게 옳은 것인가. 아니, 그 전에 물질과 인간의 접촉으로서의 감각과 감수에 대해 천착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건 또 아닐까.
여러 생각으로 복잡한 와중에, 정작 가장 중요한 작업인 관찰과 분석 ― 즉 연구 대상을 본격적으로 들여다보는 작업을 시작조차 못하고 있는 것은 또 새로운 걱정거리다. 결국 해당 물건에 대한 ‘해석’이 관건이 될 것인데, 도대체 안목이나 입장이 전제되지 않은 관찰과 분석에 해석을 위한 통찰이 주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던 차 조현범 선생님의 글을 읽던 중 ‘유사성과 인접성의 원리’라는 부분에 이르러 눈이 번쩍 뜨였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는 물품은 불교의 경전이다. 여느 종교가 그렇듯 불교도 부처의 가르침을 경전에 담아 전한다. 부처는 세상을 떠나며 제자들에게 곧 죽어 없어질 당신을 절대시하지 말고 본인이 평생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교리와 함께 제자들 자신의 의지를 믿고 나아가라고 당부하였다[自燈明 法燈明]. 그리하여 부처의 사후 제자들이 모여 살아생전 스승으로부터 들었던 가르침들을 기억하고 암송한 것이 경전의 시작이었다. 모든 불교경전에서 한결같이 시작되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라는 표현은 바로 부처로부터 직접 배웠던 제자들이 망각의 경계로부터 기억을 길어 올려 스승의 말씀을 서로 공유하고 승인하였던 경험의 확인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처럼 불교의 경전은 처음 몇 백 년 동안 책이 아닌 구전으로 전승되었다. 그러다가 부파불교 시대에 들어 교리에 대한 해설서인 논서의 제작과 함께 기존에 구전되어 왔던 말씀들이 문자로 정착되면서 책자의 형태로 불교의 경전이 성립되었다. 획기적인 변화는 대승불교의 흥기와 함께 비롯되었다. 대승불교의 사상가들은 기존 부파불교와는 구별된 자신들의 생각을 문자로 기록하면서 책의 앞머리에서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고 서술함으로써 자신들의 새로운 사상에 교조적 정통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대다수 대승경전은 책의 마지막에서 해당 경전의 탁월함을 스스로 찬탄하고, 그것을 지니고 다니며 읽고 암기하고, 나아가 남들에게 설명하고 베껴서 나누어 줄 것을 권면하였다.
특별히 사랑받은 것은 《법화경》이었다. 인도 마가다국의 수도인 왕사성 인근 영취산에서 부처가 직접 설법한 내용이라고 하는 《법화경》은 그리 길지 않은 책자 속에 여러 비유와 함께 대승불교의 주요 교리와 신앙의 내용이 담겨 있어 많은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동아시아 인민 대중의 《법화경》 애호는 더욱 각별한 것이어서 한중일 삼국에서는 공히 《법화경》 신앙에 따른 영험담을 수록한 다수의 《법화영험전》이 씌어졌고, 《법화경》에 대한 사경(寫經)과 판각과 인쇄 그리고 유통이 줄을 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그 경향성이 더욱 강하여 왕실과 사대부 그리고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법화경》의 사경과 판각 및 인쇄에 대한 다수의 기록이 등장하는데, 많은 경우 이는 망자에 대한 추선(追善)의 의지가 곁들여진 것이었다. 이 시기 일본의 여러 지방 정권은 앞다투어 조선 조정에 나와 《법화경》의 제공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불교의 추선의례인 칠칠재와 기신재 등에서 다른 경전과 함께 설법되었던 《법화경》은 중종 때 국가 당국으로부터 불교식 추선의례의 억제가 추진되기 시작하자 급기야 《법화경》의 무대인 부처의 영산회상(靈山會相 : 부처의 영취산 설법)을 재현하는 별도의 불교의례로서 영산재(靈山齋)의 분화로 귀결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팔만사천의 경전 중에서도 특히 《법화경》이었던 것은 이 경전이 가지는 대중성에 기인할 것이다.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어째서 대승불교의 신자들은 가르침의 내용보다도 그 가르침을 담은 책자 바로 그 ‘물건’을 애호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서 해석학적 환원의 분기와 마주하게 된다. 경전이라는 책자에 담긴 부처의 설법 내용이 중요했기에 책자의 소지(所持), 독송(讀誦), 강설(講說), 사경(寫經)이 중시되었다는 교리적 전통적 해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더욱 강조되었던 것은 바로 그 책자 자체에 대한 제작, 유통, 소유, 애호였다는 또 다른 해석 사이의 분기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책자 자체에 대한 애호는 바로 불법 혹은 불법의 상징물로서의 경전을 직접 만지고 곁에 두고 늘 가까이 함으로써 갖게 되는, 이른바 물질과의 접촉에서 기인한 심리적 안정의 희구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것을 ‘인접성의 원리’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면 과한 시도일까.
그렇다면 이 《법화경》 신앙에서 ‘유사성의 원리’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법화경》이 다른 경전들과 함께 했던 불교 추선의례로부터 독립하여 오직 《법화경》 자체만을 주인공으로 한 영산재의 형성을 견인한 데에서 그 가능성을 타진해 본다. 위에서 이야기했듯 영산재는 본래 부처의 영산회상을 재현하는 의례이다. 그때 그곳 그 지고한 순간의 현장을 지금 이곳 우리 삶의 한가운데에 가져와 똑같은 모습으로 반복해 보는 것, 그 재현의 꿈을 ‘유사성’으로 이야기하면 역시 과한 것일까. 폭넓은 독서와 면밀한 상상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향후 이 탐색의 여정이 기대된다. 조현범 선생님 그리고 동학 여러분의 제언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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