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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복되는 사회적 거리 두기에 구룡성채를 떠올린다

 

  news letter No.695 2021/9/14

 

 



     사람 간의 거리를 넓혀야 하는 이 시기에 그와 정반대의 공간을 생각하게 된다. 밀접한 공간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갔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뉴욕 대비 119배의 밀집도를 보였던 어떤 공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홍콩의 구룡성채(Kowloon Walled City)로 떠나본다.

    구룡성채는 20세기에 가장 거리두기가 안된 장소로 꼽힌다.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 같은 홍콩 영화 속에서 범죄자들의 소굴과 무법지대로 등장한다. 협소한 공간들이 촘촘하게 들어찬 밀집된 건물에 사람들이 부대끼며 시끌벅적하게 살고, 위생이 엉망이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건물 사이로 무질서한 배수관들이 보이고, 간판은 건물 여기저기 빼곡하게 달려있다. 블레이드 러너와 공각 기동대에 나오는 미래의 암울한 도시 이미지는 여기서 영감을 받았다.

   1992년 철거 전에 찍은 사진을 보면, 6.5에이커의 공간에 14-15층 높이의 건물들이 불규칙하고 빈틈없이 자리 잡고 있다. 그 건물들에 적어도 35,000명의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홍콩에서 가장 오래된 구역으로, 1668년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다. 19세기 중반 건물들이 하나씩 들어서며 증축과 개축을 하면서 점차 우리가 알고 있는 20세기 중후반의 모습으로 변모해 왔다.

   얼마 전 영화 첨밀밀을 감상하다가 예전에는 잘 안 보이던 첫 장면과 끝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중국 대륙에서 홍콩으로 일자리를 찾아온 장만옥과 여명이 1986년 3월 1일에 도착한 역 이름이 Kowloon City였다. 거기에 내려서 각자의 길로 활기차게 이동하는 주인공들은 기회를 찾아 구룡성채로 이주하는‘난민’ 젊은이들이다. 그곳에서 일거리를 찾고 사랑을 한다. 아쉽게도 그러한 공간은 더 이상 홍콩에 존재하지 않을 운명이다. 밖에서 보는 이미지 말고 실제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자리 잡았을까?

   구룡성채가 허물어지기 전 주민들을 인터뷰한 책과 기사들을 보면, 상당수가 그곳을 행복하고 에너지 넘치는 공간으로 이야기한다. 인간 삶에서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이 건물들 안에 있었다. 대부분은 거주공간이고, 그 외에 학교, 양로원, 상점, 치과와 불법 개업 병원, 음식점, 식료품점, 공장, 정육점, 미장원이 들어서 있었다. 제사를 지내는 작은 사원, 그리고 양로원과 학교를 겸비한 교회도 있었다. 해외에서 온 그리스도교계 선교단체가 건물 안에서 활동을 벌였다. 철거 전까지 있었던 수녀 중 한 분은 한국인이었다고 한다.(Greg Girard, Ian Lambot, City of Darkness: Life in Kowloon Walled City, 2007[1993], UK: Watermark, 171쪽) 그 행복의 바탕에 무엇이 있을지 추측해 본다. 중국에서 홍콩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양쪽의 규제 없이 살았다. 삼합회가 관여하기도 하고 범죄율이 높은 문제가 있긴 했다. 홍콩 속의 제3의 도시처럼 모종의 규칙을 가지고 자치적이고 자족적 상태로 굴러갔다. 그 안에서 나름의 자율권을 지니며 미래를 개척하는 데서 오는 만족감이 주민들 인터뷰 내용에서 느껴진다.

   지금 우리는 구룡성채와 정반대의 지향점이 있는 공간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어린 시절 보았던 영화 속 디스토피아 이미지로 구룡성채를 떠올렸는데, 요즘은 오히려 그 반대가 암울함을 가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과 사회적 모임에 대한 중앙집권적 통제, 과학과 효율의 이름으로 부여되는 강제성과 획일화가 존재한다. 2020년 이후 지금까지 우리 시대의 모습이다. 과학기술, 감시, 무균과 ‘질서’의 세계가 구룡성채의 가난, 무법, 비위생과 ‘무질서’에 맞선다. 좀처럼‘동선’을 알리지 않고 스며들 곳이 없다. 프랑스에서는 백신 미접종자가 레스토랑과 바에서 사람들을 만날 목적으로 가짜 건강패스(pass sanitaire)를 거래한다. 조지 오웰이 <1984년> 에서 경고했던 빅 브라더(Big Brother) 사회가 중국에서는 현실화되고 있다. QR코드와 안면인식기로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개인정보를 사용하여 시민의 동선을 파악하는 K방역은 통제를 일상으로 만들었다.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1966)에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라는 말이 나온다. 모든 장소들의 바깥에 있는 장소이고, 반(反)공간이다.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세계가 유토피아라면 헤테로토피아는 우리가 사는 세계 속 이질적 공간이다. 아이들이 숨어 놀기 좋은 다락방이나 인디언 텐트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감옥, 공동묘지, 술집, 극장, 클럽, 노래방, 휴양지가 있다. 푸코가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종교적 공간도 비슷한 성격을 지닌 것 같다.

    그런데 요즘 이런 장소들이 골칫거리가 되었다. 소위 ‘방역’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곤욕을 치르고 있는 공간은 상당수 이러한 성격을 지닌다. 찾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장소들은‘해방’과 ‘탈출’의 공간이다. 이런 곳일수록 QR 코드를 찍고 들어간다. 작년 5월에 질병관리청은 이태원 클럽을 몇 분만이라도 스쳐 지나간 사람들까지 최첨단 IT기술과 개인정보를 이용해서 ‘확진자’와 그 접촉자들을 빠짐없이 잡아냈다. 이 ‘엄중한’ 코로나 시기에, 색다른 문화적 코드나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모인‘일탈’에 대하여 언론과 대중이 가한 뭇매를 기억한다. 그러나 일상적 공간에 이의를 제기하는 헤테로토피아가 없다면 도시는 얼마나 답답한 공간인가. 유토피아가 진작 가능하지 않다면, 도시 속 ‘구룡성채’적 공간은 허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작년부터 진행되는 코로나 방역 상황과 그로 인해 펼쳐지는 ‘신세계’를 보면서 머리에 도는 말이 있다. 19세기 영국에서 발간된 격언집에 나온다. “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Henry George Bohn, A hand-book of proverbs, London, 1855, 514쪽)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최정화_
서울대학교 강사
논문으로 <신종교현상학의 쟁점들. ‘지향성’과 ‘문제 중심의 종교현상학’>, <‘몸 새김(tattoo)’에 관한 종교학적 소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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