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좀비
news letter No.697 2021/9/28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아들 녀석은 날마다 좀비 놀이를 해달라고 성화다. 좀비 흉내를 내고, 총으로 좀비 쏘아죽이는 놀이를 하면서 저녁 시간이 다 간다. 나는 이쪽 문화에 시큰둥해서 끝까지 본 좀비 영화도 별로 없지만,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연 좀비는 이 시대의 지배적인 상징이다. 좀비의 유래와 영화적 발전에 관해서는 이젠 우리나라에서도 꽤 알려진 편이지만, 그 변화를 종교연구자의 관점에서 정리해보고 싶다. 여기에는 상징의 생명력에 관한 중요한 쟁점들이 녹아 있다.
공동체 바깥의 존재
좀비는 아이티의 부두교 주술사 보코르(bokor)가 노예처럼 부리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다. 보코로는 특정한 사람에게 테트로도톡신이라는 독극물을 사용하여 가사(假死) 상태에 이르게 하고 무덤에 집어넣는다. 시간이 지나 그 사람이 의식을 차리고 무덤 밖으로 나오면 주술사의 부림을 받는 좀비가 된다고 한다. 어떠한 사람이 좀비가 되는가? 인류학자 웨이드 데이비스에 따르면 좀비 만들기는 아이티의 독립을 위한 비밀결사에서 규율을 어기거나 배신한 사람에 대한 처벌에서 유래했다.
우리는 좀비가 되살아난 시체라고 알고 있지만, 원래 부두교 맥락에서는 시체 상태로 비유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의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주술로 만들어진 사회적 죽음이다. 좀비는 공동체의 안녕에 위해를 가한 것으로 인식된 존재를 공동체 바깥으로 추방한 무존재이다. 그래서 아이티 사람들은 좀비가 아니라 '좀비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타자의 상징, 타자화된 상징
아이티가 미국의 지배를 받았던 1915년부터 1934년에 이르는 시기에 부두교와 좀비가 미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부두교는 미국 공포영화의 소재로 등장했다. 부두교 주술사가 백인 여성을 좀비로 만드는 <화이트 좀비>(White Zombie, 1932)가 최초의 좀비 영화로 기록되어 있다. 타자의 종교상징을 영화산업에 끌어들여 공포의 재료로 사용하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다. 미국인에게 아이티는 ‘해방 흑인 노예의 나라’라는 두려운 타자였고, 그곳의 주술사가 미국인을 노예화한다는 것도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좀비는 타자화되고 다른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좀비와 가까운 존재들이 등장한 것은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 1968)부터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로 셀 수 없는 좀비 영화들이 이어지며 영화 내의 좀비 문법을 형성하였다.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좀비는 사람을 잡아먹으려 한다. 둘째, 좀비에 물린 인간은 반드시 좀비가 된다. 셋째, 뇌를 파괴해야 좀비를 죽일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영화는 세상이 좀비로 가득한 ‘좀비 종말론’(zombie apocalypse)을 기본 세계관으로 한다.
영상 속에서 얻은 상징의 생명
영상의 세계에서 자가 발전한 좀비는 새로운 상징이 되었다. 가장 큰 특징은 부두교의 의례적 맥락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제 좀비 이야기에서 부두교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원래의 맥락에서 벗어난 좀비는 영화를 비롯해 소설, 애니메이션, 게임, 웹툰 등 거의 모든 문화 콘텐츠에서 폭발적으로 생산되었다. 학자들은 이를 ‘좀비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이 현상에 대한 종교학자의 평가는 여럿 있을 수 있다.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전공자가 있는 반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전공자도 있을 것이다. 글을 준비하면서 “Encyclopedia of Religion”이나 “HarperCollins Dictionary of Religion”과 같은 종교학 사전들을 찾아보았는데, ‘좀비’는 독립된 항목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부두교’ 항목 안에서만 설명되었다. 아마 전통적인 입장에서 현대의 좀비는 탈맥락화된 것, 그래서 탈종교화된 것이라고 여겨져서 누락된 것 아닐까? 하지만 부두교에서 독립해서 콘텐츠 안에서 독자적인 생명력을 얻은 좀비를 독자적인 상징으로 인정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상징이 대중적인 힘을 얻는 과정은 전통적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 진행된다.
영화산업이 세계화되었기에 공포영화라는 장르의 장에서 세계의 귀신, 괴물이 통합적 세계를 이루는 것(영적 세계의 지구화!)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우리나라에서 괜찮은 엑소시즘 영화를 만들고 한국 감독이 태국 귀신 영화를 만드는 것은 종교적 현실보다는 영화적 현실을 바탕으로 가능해진 일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제 한국은 주목할만한 좀비 이야기들을 만들고 있다. <부산행>, <반도>, <#살아있다> , <킹덤>과 같은 작품들은 한국에 좀비들을 유통시키고 해외에 한국 좀비를 수출한다. 좀비를 우리의 이야기로 누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럴 능력이 있는 영화판을 갖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코로나19로 만난 좀비
좀비는 현대사회에 관한 은유로 사랑받는다. 현대의 맹목적 군중,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사람들, 신체를 상실한 비인간적 통제사회 등 사회의 속성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상징이 되었다. 여기서는 깊이 있는 논의로 이어지는 이쪽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고, 대신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도록 하겠다. 현재 좀비가 지배적 상징이 된 것은 코로나 상황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 이후 우리는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경계하게 되었다. 사람이 아니라 바이러스 숙주로 보였기 때문이다. 마스크가 아직 익숙해지기 전인 작년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길 가다 사람이 오면 조금이라도 떨어져서 지나가려 거리를 두곤 했다. 무의식적인 경계심이기도 하고 그게 상대방에 대한 매너라는 생각에서였다. 모르는 사람이 의식하지 않은 채 감염자가 되어 나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시달리고, 거리두기와 격리라는 말이 일상이 지배하던 시기에, 좀비의 감염을 통해 종말론적 상황이 야기된다는 좀비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호소력이 있게 소비되었다. 그렇게 좀비 이야기에 감염된 아들 녀석의 성화는 이 시대의 지배적 상징을 계속 상기해준다.
방원일_
숭실대 HK연구교수
최근 논문으로 <혼합현상에 관한 이론적 고찰>, <한국 개신교계의 종교 개념 수용 과정>, 저서로 <메리 더글러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