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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713호-추사의 미학 : 또 하나의 ‘반대의 일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2. 1. 18. 18:14

추사의 미학 : 또 하나의 ‘반대의 일치’

 

news letter No.713 2022/1/18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유홍준, 『완당평전』) 내 얘기를 하는 것 같다. 대학원 시절 언젠가 수업 레포트 주제로 추사를 잡고 관련 서적을 읽다가 중간에 포기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추사가 너무 사대주의적이라고 여겨 내심 분노까지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추사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30여 년이 훨씬 넘어 제주도 올레길을 걸으면서 마주친 서귀포 대정마을의 김정희 유배지와 <제주추사관>에서였다. 당시 인상적으로 남은 기억은 유명한 <세한도>가 제주도 유배시절에 나온 작품이라는 점, 그 명칭이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歲寒然後知 松栢之後凋)는 『논어』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 그리고 추사관 건축이 그 그림 속에 등장하는 집 모양을 본뜬 것이라는 점 정도였다. 그러나 지난주 다시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 추사는 내 마음 속 어딘가에 둥지를 틀어버린 듯한 느낌으로 다가서왔다.

코로나사태로 일본을 가지 못하게 되면서 나는 ‘한일 미의식의 비교’라는 연구 목표를 잡고 틈나는 대로 아내와 함께 국내 방방곡곡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박물관・미술관 순례에 더하여 사찰과 서원과 정원을 비롯한 한국 전통미의 현장을 찾아다니고 있다. 충남 예산의 <추사고택>도 그중 하나이다. 추사가 태어나 성장한 그곳은 원래 영조의 부마였던 김한신과 화순옹주가 거하던 집이었다. 인근에는 사도세자의 오해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남편을 따라 순사한 비극의 주인공 화순옹주의 열녀문이 세워져 있는가 하면, 추사의 묘소도 잘 정비되어 있다.

하지만 추사가 수많은 고통과 영예로 굴곡진 71년간의 생애를 마감한 곳은 과천의 <과지초당>이었다. 지금 그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는 <추사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과천에 살면서 차일피일 미루던 나로 하여금 서둘러 <추사박물관>을 찾게 만든 것은 예산 추사고택의 한 기둥에 새겨져 있던 다음 구절 때문이었던 것 같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좋은 반찬은 두부・오이・생강・나물)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훌륭한 모임은 부부・아들딸・손자)” 이는 추사가 타계한 1856년에 남긴 최후의 예서체 대련(對聯)으로, 서체와 내용 모두에서 추사 삶의 종착점이 소박한 단순성과 평범성에로의 회귀에 있음을 잘 보여주는 명작(간송미술관 소장)이라고 말해진다.

추사는 원래 단순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았다. 당대의 일급 명문가에서 태어나 신동으로 자라난 추사는 음식이나 옷가지 등에 대단히 까다롭고 자기주장이 강한 독설가였다. 특히 지필묵에 지나칠 정도로 예민해서 조금이라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글씨를 쓰지 않았던 추사는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권돈인에게 보낸 서간)고 자부하듯이 스스로에게 철저히 충실했고 그런 만큼 타인의 소소한 불성실마저도 참지 못한 완벽주의자였다. 매사에 시시비비를 분명히 따져야 속이 풀렸던 추사는 “알면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하면 다하지 않은 것이 없다.”(知無不言 言無不盡)는 대쪽 같은 성미로 인해 주변 사람들에게 날선 상처를 입혔으며, 결국 많은 적을 만들어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의 10여 년에 걸친 귀양살이를 자초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관용과 단순성의 미덕을 깨닫게 된 것은 유배지에서 겪은 몸과 마음의 고통 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추사는 제주도 시절에 “도대체 무슨 업보로 이와 같이 나에게만 심하게 고통을 준단 말인가?”(아우 명희에게 보낸 서간)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런 류의 신정론적 물음은 체험적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본질적으로 누구나 던질 법한 일상적인 발상에 속한다. 기실 추사의 학문과 예술과 종교는 그러한 일상성을 넘어서서 대립적인 것들의 모순적 공존 혹은 양가적 동거를 보여준다.

예컨대 <세한도>를 한국에 돌려준 일본인 석학 후지츠카 지카시(藤塚鄰)가 ‘청조학 연구의 제일인자’라고 극찬한 추사는 명실상부 금석학과 고증학뿐만 아니라 추사체를 비롯한 시서화에 있어서도 당대 조선 최고의 국제적인 학자로서 종종 오만한 엘리트주의를 드러내곤 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신분사회의 두터운 벽을 넘어 서출인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시는가 하면 이상적 같은 역관들을 애제자로 두었고 조희룡이나 이한철 등의 중인 출신 화가들과 교류하는 한편, 초의선사를 비롯하여 당시 천민 계층이었던 스님들과 돈독한 우애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그의 내면에는 귀족주의의 폐쇄성과 계급을 뛰어넘는 개방성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의 개방성은 이데올로기적 당파성이나 고고한 상아탑으로부터의 일탈을 포함하고 있었다. 가령 추사는 노론의 골수였던 가문의 벽에 구애받지 않고 남인의 간판격인 다산 및 그의 두 아들과 친밀한 학문적 교류를 지속했으며, 심지어 <일독 이호색 삼음주>(一讀 二好色 三飮酒) 현판 글씨가 시사하듯 독서와 호색과 음주의 공존까지 폭넓게 수용하였다. 흥미롭게도 추사가 평양의 명기 죽향에게 쓴 구애의 시 두 편이 전해지기도 한다.

추사 안에는 사대주의와 민족주의도 동거하고 있었다. 24세 때 생부 김노경이 동지부사로 선임되어 연경(지금의 북경)에 가게 되었을 때 자제군관(외교관의 아들이나 동생이 개인적으로 따라가서 외국 견문을 익히게 하는 제도)의 자격으로 따라간 추사는 귀국에 앞서 중국 학자들이 마련해 준 전별연에서 “내가 태어난 곳은 미개한 나라 참으로 천하고 촌스러우니 중국 선비들과 사귐에 부끄러움이 많네.”(我生九夷眞可鄙 多媿結交中原士)라고 읊었다. 하지만 귀국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고증으로 대표되듯이 추사의 민족적 자부심은 대단히 강하고 뿌리 깊은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종교학도로서 특히 관심있게 본 것은 추사에 있어 유불도의 공존이다. 후대(20세기 초)의 불교학자 김약슬이 추사에 대해 ‘유학을 공부하고 불교에 입문한 참된 애불(愛佛)의 제일인자’로 규정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무려 3백여 개 혹은 많게는 5백여 개가 넘는 추사의 별호 중에는 유학이나 실학과 연관된 ‘동해제일통유’(東海第一通儒)라든가 ‘실사구시재’(實事求是齋)도 있지만,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정선’(靜禪), ‘불노’(佛奴) 등 불교와 관련된 것도 많다. 그는 평생 독실한 불교도였음에 틀림없다. 이뿐만 아니라 추사는 도교서적이자 무속서인 『옥추보경』(玉樞寶經) 판각본의 서문을 써 준 일도 있었다. 금석지교의 벗 권돈인에게 보낸 서간에 보이는 다음 구절은 이와 같은 추사의 다원적인 정신세계를 잘 보여준다. “유가의 인산지수(仁山智水)와 도가의 옥약금추(玉籥金樞, 양생법)와 불가의 화엄누각(華嚴樓閣)은 모두 그 성(性)에 가까운 것으로 각각 경우에 따라 다를 뿐입니다. 산은 본디 다름이 있지 않은 것이니, 능히 여기에 얽매이지 않고 유불선의 대가들이 어울렸다는 여산(廬山)의 진면목을 얻는 것이 또 과연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무엇보다 대립적인 것들의 모순적 공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역은 이른바 추사체의 미학적 세계일 것이다. 추사와 동시대 인물인 유최진은 흔히 추사의 예술세계에 대한 최고의 비평문으로 말해지는 <추사 글씨 편액에 부쳐>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추사의 예서나 해서에 대해 잘 모르는 자들은 괴이한 글씨라 할 것이고, 알기는 하지만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미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는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글자의 획이 혹은 살지고 혹은 가늘며 혹은 메마르고 혹은 기름지면서 험악하고 괴이하여, 얼핏 보면 옆으로 삐쳐나가고 종횡으로 비벼 발라댄 것 같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마음을 격동시키고 눈을 놀라게 하여 이치를 따진다는 것이 무의미하다…감히 비유컨대 불가와 도가에서 속(俗)을 바로잡고자 훌쩍 속을 벗어남과 같다고나 할까.”(『초산잡저』)


통상 말해지는 대로 추사체의 미학은 “옛것을 본받으면서 새것을 창출한다”(入古出新)는 고증학의 기본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본질적 요소는 ‘괴’(怪)와 ‘졸’(拙)이라는 두 글자로 요약될 수 있다.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뒤 추사가 새롭게 발견한 것은 ‘괴이함’의 가치 즉 개성적인 ‘파격미’의 구현이었다. 한편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후 과천 시대의 추사는 ‘서투름’과 ‘꾸밈없음’의 의미를 찾아내기에 이른다. 즉 세련된 기교를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감추는 ‘고졸미’의 가치를 재발견한 것이다. ‘불계공졸’(不計工拙,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음)이라든가 ‘수졸산방’(守拙山房, 서투른 것을 지키는 산방) 등은 이런 미학에서 생겨난 추사의 별호이다.

1856년 9월 말, 과천에서 멀지 않은 봉은사의 영기스님이 화엄경판을 완성한 후 그것들을 보관할 경판전의 현판 글씨를 추사에게 부탁했다. 추사체 고졸미의 정점을 보여준다고 말해지는 이 <판전>(板殿) 현판에는 ‘칠십일과 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 추사가 병중에 쓴 글씨)이라는 낙관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 ‘칠십일과’는 ‘71세를 맞이한 과천의 추사’를 뜻하는 일견 괴상한 별호이다. 추사는 이 현판 글씨를 쓰고 난 사흘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 <판전>은 추사의 마지막 글씨가 되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나무막대로 아무렇게나 땅바닥에 갈겨쓴 것처럼 보이는 이 글씨의 진면목을 나는 아직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다만 획의 굳셈과 부드러움이 기묘한 조화를 이룬다는 추사체의 참된 아름다움이 ‘괴’를 수반하는 ‘졸’로 귀결되리라는 예견만 머리로써 어렴풋이 지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괴’와 ‘졸’의 미학은 일찍이 파스칼, 쿠자누스(Nicolaus Cusanus), 융, 엘리아데 등이 주목한 ‘반대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와 상통한다. 이를테면 ‘졸’은 노자가 말한 ‘대교약졸’(大巧若拙, 큰 기교는 서투른 것처럼 보인다)의 ‘졸’이라는 의미에서 ‘반대의 일치’를 내포한다. 마찬가지로 ‘괴’ 또한 그로테스크한 것과 겹친다는 점에서 ‘반대의 일치’와 무관할 수 없다. 매혹적인 요소와 괴이한 요소, 코믹과 비극, 터무니없는 형상과 두려운 형상의 긴장된 조합 또는 양립이 불가한 대립물로 간주되는 요소들의 융합을 뜻하는 그로테스크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요소들로 인해 모순적이며 양가적인 감정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전술한 ‘대립되는 것들의 모순적인 공존 또는 양가적 동거’라는 큰 틀에서 볼 때 ‘반대의 일치’는 비단 서구 정신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서를 막론하고 모든 탁월한 사상과 예술과 종교에 걸쳐 있는 사유의 공통분모를 구성한다. 이를테면 태극과 음양의 사상, 장자의 혼돈신화, 대대(待對)의 논리, 불이(不二) 혹은 즉(卽)의 사유, 성속 또는 진속의 변증법 등에서 우로보로스, 일심, 도(道), 뫼비우스의 띠, 만다라, 성인의 후광, 십자가, 성배, 스와스티카, 시바의 춤, 우주알, 장자의 천균(天均), 이기(理氣) 등의 상징들에 이르기까지, 또는 “원수를 사랑하라”(예수), “지천명・이순・종심소욕불유구”(공자), “죽음도 태어남도 없다…일찍 죽어도 좋고 늙어 죽어도 좋고 태어나도 좋고 죽어도 좋다.”(不死不生…善夭善老 善始善終, 『장자』),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 『노자』), “도는 늘 무위하지만 하지 않음이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 『노자』), “아니다, 그렇다”(不然其然, 동학) 등과 같은 영성적 잠언들이 수렴되는 하나의 갈림길, 그것이 바로 ‘반대의 일치’가 아닐까?

그런 ‘반대의 일치’의 자리에서 보면 “곧바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는 하나같이 굽어 있다.”는 짜라투스트라(니체)의 격언이 종종 메아리가 있는 울림으로 되살아나곤 한다. 추사의 미학도 그런 울림을 내포한다. “평생 마음을 지키는 힘이/한 번의 잘못을 이기지 못했네/세상살이 삼십 년에/공부한다는 것이 복임을 바로 알았네.”(平生操持力 不敵一念非 閱世三十年, 方知學爲福) 과천 시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부채 위에 쓴 이 글에서 만년의 추사는 여전히 ‘물음’이라는 모순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서귀포 대정향교 학생들의 공부방에는 경이롭게도 추사가 쓴 <의문당>(疑問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그 현판을 기억하며 나는 지금 천 번의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는 내게도 ‘의문의 집’에 거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혹 공부한다는 것이 마침내 행복임을 알게 될 날이 찾아올 것인지를 묻고 있다.

 

 







 


박규태_
한양대학교 교수
저서로 《현대일본의 순례문화》,《일본재발견》,《일본정신분석》,《일본 신사의 역사와 신앙》,《포스트-옴시대 일본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일본정신의 풍경》 등이 있고, 역서로 《일본문화사》,《국화와 칼》,《황금가지》,《세계종교사상사 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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