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이 아닌 K-지옥: 한국적 맥락에서의 종교(적) 재현에 대한 고찰
news letter No.710 2021/12/28
대한민국에서 종교와 미디어 및 대중문화의 접점을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최근 넷플릭스 최고의 화제작 <지옥>(연상호 감독)만큼 흥미로운 작품이 또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이미 많은 학자·평론가, 또는 목사·종교인이 이 드라마를 두고 토론과 분석을 이어 가고 있다. 나 역시 이러한 토론에 참여하고 있으며, 석사 논문에서 '종교와 초자연적 호러물'을 다뤘던 사람으로서 (한국종교문화연구소 뉴스레터 665호 참조) 이 드라마에서 내가 흥미롭게 관찰한 몇 가지 지점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지옥>을 아직 보지 못했지만 시청할 예정인 이들은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먼저 드라마를 다 본 후 이 글을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아울러 이 드라마 텍스트에 대한 치밀하고 일관적인 해석·주장을 펴기보다는, 좀 더 풍성한 사유와 토론을 위해 여러가지 생각해 볼 만한 것을 브레인스토밍해 보고자 한다. 그런 의도에서 지금까지 1인 미디어나 토론회 등에서 자주 언급된 내용과는 되도록 중복을 피할 것이다. 우선 '지옥'이라는 단어·개념이 한국에서도 엔터테인먼트의 소재가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번 넷플릭스 드라마만큼 화제가 되지는 못했지만, 노방전도용 구호를 연상시키는 공포 영화 <불신지옥>(이용주 감독)도 있었고, 국내 판타지 영화로 크게 흥행한 <신과 함께>(김용화 감독) 시리즈는 아예 사후 세계인 지옥에서의 여정을 그렸다. 반면 드라마 <지옥>은 지옥을 중심 소재로 삼고 "지옥에 간다"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 사후 세계로서의 지옥을 상정하고 있지만, 지옥 자체를 조명하기보다는 사람들이 지옥의 존재를 인식한 채 '지옥행'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지옥 같은' 세상을 그리고 있다.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한국에서 실제 살아가는 많은 이에게 한국은 조금 다른 의미에서 - 아마도 더 끔찍한 의미에서 - '헬조선'이겠지만, 이 드라마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즐기고 있고, <오징어 게임>(황동혁 감독) 못지않은 해외 흥행을 반갑게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에겐 또 하나의 'K-○○', 즉 'K-지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한편, <지옥>의 영어제목은 'Hell'이 아닌 'Hell Bound'인데, 1988년에 개봉했고, Pinhead라는 다소 끔찍하게 생긴 캐릭터로 유명한 미국 호러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드라마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면 흥미로운 점이 아주 많이 발견된다. 개인적으로 석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가장 흥미롭게 재발견한 성서 속 장면인 다니엘서 5장의 장면(갑자기 공중에서 손이 나와 벽에 글씨를 쓰는데, 그 내용이 알고 보니 그것을 목격하고 있는 특정 인물의 종말을 고하는 메시지였다)과도 제법 유사한 방식으로 '고지'라는 것이 이루어진다. 물론 여기서는 손이 아닌 얼굴이 나오며, 사람이 직접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아무개 너는 언제 지옥에 간다"고 예언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고지'를 전달하는 초자연적 존재가 '천사'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석사 논문을 통해 성서 속 천사와 교회에서 대중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천사의 이미지가 매우 다르다는 점을 발견했던 나에게는 이 부분도 너무나 흥미롭고 매력적이었다(예를 들어, 에스겔서에서 묘사하고 있는 '그룹'들은 '지옥'에 등장하는 '지옥의 사자들'만큼 압도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신약성서 속 인물들이 천사를 마주할 때의 반응은 주로 '두려움'이었다). 초자연적 존재 및 현상의 재현과는 별도로, 종교(적) 집단의 재현 역시 기존 드라마·영화와 확실히 구분되는 지점이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언급하고 있듯, 이 드라마에서는 하나가 아닌 두 개의 서로 매우 다른 집단이 별도로 존재하면서도 공생한다. 제도화돼 있고 경전이 있으며 교리를 관장하는 '새진리회'라는 엘리트주의적 집단과, 이와는 달리 앞뒤 안 가리고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화살촉'이라는 집단이다. 이들은 서로 구사하는 언어나 미디어에 노출되는 이미지가 매우 다르지만, 서로 거리를 두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어쩌면 현재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특정 종교 집단 간의 관계와 유사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지옥>이 온 세상의 권력을 잡은 사이비 종교 집단 '새진리회'에 저항하는 몇몇 등장인물을 통해 뚜렷하게 제시하는 문제의식은 '해석권의 독점'이다. 동일한 텍스트·체험·현상을 두고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그러한 다양성이 장려되는 민주적 세상과는 정반대인 세상을 유지하려는 왜곡된 종교 권력을 향한 비판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번 지금까지의 드라마·영화와 구분되는 지점은 '천사'가 나타나 '고지'를 하고, 예언된 시간에 '지옥의 사자'들이 나타나 처절하게 심판하는 '시연' 등이 모두 실재하는 초자연적 현상으로 (적어도 시즌1에서는)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것이 초자연적인 현상이냐 아니냐가 해석의 논점이 아니라, 분명 초자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이지만 그에 대한 해석은 늘 열려 있어야 하고 다양성도 보장돼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곧바로 종교개혁의 테제가 자연스레 떠오를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한편,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장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은 사회학자 공현준(배우 임형국 분)인데, 왜 이 인물을 인류학자, 철학자, 문학자, 종교학자 또는 역사학자, (인디아나 존스 같은) 고고학자 등이 아닌 사회학자로 설정을 한 것인지도 궁금하고 흥미롭다. 전반적으로 드라마 <지옥>은 특정 종교 집단, 특히 배타주의적 집단이 원할 만한 세상, 즉 '누가 지옥에 가는지'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 이에 대한 공포가 모두를 통제하는 세상을 그려 내고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가 무조건 반종교적 시각만 지향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점은 인간이 만든 사법제도의 모순을 지적하고, 처벌 가능성에 기인한 공포의 사회적 기능을 종교적으로 활용하는 등장인물 정진수(배우 유아인 분)가 던지는 쉽지 않은 질문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종교 못지않게 미디어, 특히 소셜미디어에 대한 비판도 드라마 전반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는 분명 ‘종교와 미디’어 연구자들에게 매력적인 작품일 수밖에 없다. <지옥>은 한국적 맥락에서 종교와 미디어에 관한 아주 많은 '떡밥'을 던져 주고 있다. '시연'을 최초로 생중계하는 장면에 앞서 좁은 동네 골목에서 종교적 용어를 남발하며 공격적인 시위를 하는 이들의 모습은 결코 낯설지 않으며, 그렇게 시연을 당한 인물이 마지막 회에서 다시 살아나는 장면은 그야말로 구약성서 에스겔37장의 그 유명한 '마른 뼈가 살아나는' 장면과 매우 흡사하다. 어쩌면 하나의 일관된 메시지가 아니라 사회·윤리·정의·종교·죽음, 그리고 초자연적 세계에 대한 이런저런 흥미로운 떡밥이야말로 <지옥>이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어쩌면 종교가 해야 하는) 서비스가 아닐까 싶다. *이 글은 2021년 12월 21일자 <뉴스앤조이>에 실린 글입니다.
홍승민_ 미국 Fresno Pacific University 조교수 종교와 미디어, 그리고 문화간의 접점에 대한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으며, 주요논문으로 “Contrapuntal Aurality,” “Exegetical Resistance,” “Uncomfortable Proximity,” “Punching Korean Protestantism”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