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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739호-종교다원주의와 민족종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2. 8. 2. 19:44

종교다원주의와 민족종교


news letter No.739 2022/8/2

 

        

      이제 종교다원주의는 현시대의 종교생활에서 상식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 과학기술문명과 경험실증적 철학이 초래한 허무주의의 시대정신에서 독단적 신학의 형이상학은 이제 존립 지반을 상실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젠 신(神)은 절대적 실재이자 사실의 지위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고, 다만 인간의 주관성의 결단에 의한 신앙적 체험에서 비롯한 종교적 다양성 가운데 하나일 수밖에 없다.

    세계관과 가치관의 다원성을 상징하는 종교다원주의는 철학에서도 탈근대적 조류 속에서 동일한 형태로 반복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철학, 즉 학문은 맑스의 유명한 말인 ‘당파성의 철학’이라는 언명 속에서도 발견되듯, 보편학의 이념은 이제 불가능한 이상이라는 점이 기정사실인 것 같다. 이 점은 사회과학과 경제학은 물론 과학에서조차도 마찬가지이다. 보편이론, 통일이론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단지 다양한 패러다임의 공존이 이 시대의 정신의 지형을 말해주고 있다.

    사실 이러한 다원성은 플라톤 저작의 제3인간 논변에서, 고대 필론의 회의주의에서, 흄의 인과율의 부정에서 이미 예견되었던 것이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수학의 불완정성 정리와 자기지시적 역설이 보편과 통일의 불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즉, 진리가 증명된 것이 아니라, 진리의 불가능성이 증명된 것이다. 특히 현상학에서 지향성의 사태와 본질과의 연관이나, 판단중지 및 상호주관성은, 궁극적 실재의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다자(多者)와의 연관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특히 서구 기독교의 위기, 서구중심주의의 위기로 대표된다. 반대급부로 비서구권의 종교와 문화, 철학, 즉 이슬람과 인도와 중국, 그리고 한국의 민족종교가 다시금 서구와 동등한 종교와 사상의 한 축으로 부상할 시기가 도래했다는 말이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다원성은 곧 평등과 동등을 말하며, 진리는 초월적 이상의 나라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두 발을 디디고 있는 이 땅의 공간과 시간, 즉 역사성의 영향사적 전승과 전통의 고유성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비롯함을 말함이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한 사실이기도 한 문화다원주의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진리는 이제 앎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가 된 것이다.

    대종교를 출발점으로 하여 한국 민족종교 일반에 대해 연구하고자 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다원성의 시대에 한국의 민족종교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가지는 의의는 각별하다. 일제강점기와 6.25의 고난을 겪으며, 우리는 서구 근대성과 과학문명의 위압감에 직면하여 단 하나의 목표만을 따라가기에 다급했던 것 같다. 실재의 진실이 밝혀진 지금의 시대정신에서, 심하게 말하면 우리 민족은 그동안 정신과 육체와 혼을 보편이라는 허구적인 가상에 지배당해 왔다고 본다. 종교다원주의의 시대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를 거쳐 현대 기독교 신학자들의 화려한 사유의 변명 못지않게 우리 조상들이 하늘의 신명(神明)에게 물 한 그릇을 올려놓았던 소박한 두 손이 결코 열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다. 또한 삼신(三神) 사상과 풍류도, 신선 사상을 시작으로 한국의 정신적 전통에도 심오한 역사적 계승물이 면면히 흘러오고 있었다는 것도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다. 더불어 근대기 한국 신종교의 자생적 발흥은 근대 및 서구와의 대결이며 한국적인 전통에 대한 재해석이며, 새로운 정신적 새벽의 창조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근대과학과 다원주의적 시대정신 속에서 종교에 대한 독단주의와 원리주의가 가진 잠에서 깨어났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기독교가 대표적으로 말하는 ‘사랑’의 경우 이제는 ‘사랑’이란 기독교만의 독점물이 될 수가 없게 되었다. 절대적 실재에 대한 허상이 깨진 이상 ‘사랑’과 같은 우리가 대부분 보편적으로 동의하는 도덕률도 그 기원은 이슬람, 힌두교, 중국 유불도, 그리고 한국의 여러 민족종교에서도 똑같은, 아니 어쩌면 더 깊은 진정성을 가진 가치를 담고서 ‘사랑’으로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필자는 축구의 비유를 들고자 한다. 어떤 종교를 선택하고 신앙하는 문제는 마치 어느 축구팀을 응원하느냐와 같아 보인다. 월드컵에서 유럽 축구팀을 응원하느냐, 미국 축구팀을 응원하느냐, 아니면 한국 축구팀을 응원하느냐처럼 말이다. 물론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미국 축구팀을 응원하는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고 고차적이고 저차적인 문제도 아닐 것이다. 다만 2002년 월드컵에서 붉은악마의 열광의 추억처럼 기왕이면 필자는 한국인이 한국축구를 응원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찬희_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문화연구소
논문으로 <대종교(大倧敎)에서 말하는 마음의 세 가지 성격:심통성정론(心統性情論)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논어(論語)』에서 드러나는 ‘즐거움’의 평균적인 성격 해석>, <대종교(大倧敎)의 불도유(佛道儒) 삼교회통관(三敎會通觀) 분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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