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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740호-고래와 구름, 그리고 잡초와 낙타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2. 8. 9. 17:24

고래와 구름, 그리고 잡초와 낙타

 

news letter No.740 2022/8/9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신드롬이 한류 열풍을 타고 이국인들에게까지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나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우영우”라는 일종의 후렴구는 자폐스펙트럼의 도돌이표 같은 것이다. 따뜻한 시선으로 마이너리티 문제를 다룬 이 휴먼드라마는 그래서 분명 감동적이지만, 내게 그것은 무엇보다 ‘고래 이야기’로 다가섰다. 주인공의 고래 사랑은 특별하다. 고래는 그의 삶 자체를 버티게 해 주는 도돌이표이기 때문이다. 넘어서기 어려운 높은 벽에 가로막힐 때마다 그의 앞에는 고래가 튀어 오른다. 그는 고래와 함께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망망대해를 건너간다.

    청와대 근방의 청운(靑雲)중학교에 갓 진학하여 얼마 지나지 않은 4월 말경 첫 번째 중간고사를 치르는 교실 안. 창문 너머 인왕산 위 눈이 부실만큼 푸른 하늘 저편에 부유하는 구름 한 조각이 문득 동공에 맺혔을 때, 내게 그 ‘푸른 구름’은 기적처럼 평생 우영우의 고래 같은 것이 되었다. 논리적으로 근거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세상은 너무 터무니없으며 세상은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이라고 느끼기 시작한 저 영악한 소년은 그 후 지금까지 조금도 키가 자라지 않았다. 인간은 언제 철이 들 것인가.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일기장에 “달은 왜 모난가? 이제부터 ‘예초’(穢草)가 나의 호”라고 적었다. 물론 이 호를 사용할 기회는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다. 어쨌든 옥편을 뒤져 찾아낸 ‘잡초’ 예(穢)자가 왜 어린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눈을 씻고 보아도 더러운 것은 없다. 혹 그런 것이 있다면 무언가를 더럽다고 생각하는 마음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 후 내 사전에서 ‘더럽다’는 말은 금기어가 되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실은 세상에 더러운 자들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나를 무척이나 괴롭힌다. 온갖 사기와 권모술수로 얼룩진 폭력의 정치사나 종교사에 너무 예민해진 탓인가 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세상은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하나의 불순한 운명처럼 자아에 각인된 이래 그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확인을 습관처럼 반복하는 가운데,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 터무니없음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려는 무모한 여행길에 나섰다.

    하지만 그 여로는 여전히 성 안의 잡초밭만 맴돌고 있는 기분이다. 사람들은 흔히 나와 너의 세계에서 살고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잡초에게 그것은 ‘나만의 성(城)’ 안에 갇혀 있는 수인(囚人)의 착각일 뿐이다. 그 자폐적인 성곽은 가까이 다가설수록 다시 멀어져 가는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논문을 쓰고 책을 낼 때마다 늘상 주자의 리(理)나 칸트의 별 같은 윤리 문제로 돌아가야만 했던 강박은 자폐스펙트럼의 도돌이표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가 알고 있던 나와 내가 모르고 있던 나 사이의 거리가 바로 무한이라는 사실에 눈을 떴을 때, 그 사이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나와 내가 모른다고 잡아떼었던 나 사이의 우주가 바로 찰나라는 사실에 눈을 감았을 때, 그 사이에도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오랫동안 잡초는 모든 풀이 되고 모든 꽃이 될 수 있어서 잡초라고 생각해왔지만, 어쩌면 잡초는 잡초 그대로도 좋을 것이다. 그 대신 세상의 모든 풀과 꽃에 감사할 수만 있다면 그만이니까. 설령 잡초의 사막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한들 내가 살지 못한 세계와 내게 가능하지 않은 시간을 그들이 각각 살아 주었고, 주고,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영우의 고래가 “노란 채송화, 그리고 우물과 왕잠자리”(2022년 7월 12일자 <뉴스레터> 736호)를 연상시켰고, 거기에 편승하여 내밀한 속살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실은 멀리 떨어져나가 조각난 시간들을 붙잡으려 하는 이 글의 치기어린 발상은 내게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우물과 왕잠자리 ‘야모’의 회상은 참 말랑말랑하다. 게딱지가 단단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안쪽의 게살이 말랑말랑하기 때문이다. 잡초도 똑같다. 잡초가 거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그 생명력이 너무나 유연하기 때문이다. 장석만 선생님은 “여름철이 문제”라고 했는데, 내게는 봄이야말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던 모든 것들이 판도라의 상자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살아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잡초에게 희망이라는 단어는 늘 죽음의 다른 이름으로 각인되어 있다. 늙어버린 하늘과 지칠 대로 지친 땅사이에서 이제 살아갈 모든 의미가 소진된 자라면 누구에게나, 묻지 않아도 해답을 구하지 않아도 기다리지 않아도 언젠가는 찾아올 죽음이야말로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희망이자 피할 수 없는 인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앞의 ‘고래 이야기’처럼 종종 현실을 투영하는 영화나 드라마는 무리하게 갈등 상황을 연출하곤 하는데, 그런 상황은 우리를 다소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마치 영화 같고 드라마 같은 현실 속의 갈등과 번뇌는 얽히고설킨 인연으로 인해 우리를 ‘어쩔 수 없는’ 자기모멸의 다툼과 배반과 욕망과 절망과 자기연민의 늪으로 빨아들인다. 거기서 빠져 나오기란 정말이지 불가능할 만큼 어렵다. 인연이 세상에 모이니 인연이 세상을 만든다. 그러니 인연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인연 때문에 세상도 사라질 운명이다. 악연만 있는 게 아니라 좋은 인연도 있지만, 그걸 구분하는 것은 인연 자체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 달려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이래서 나는 언제나 도돌이표로 되돌아가고 만다.

     또 하나의 고래가 이런 궁지에 빠진 나를 다른 길로 인도해 줄 수 있을까? 낙타 말이다. 오만하게도 내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 여겼던 군생활을 마치고 대학원에 복학했을 때 만난 한 여자는 어느 날 찻집의 천장을 가득 채운 낙타의 환영으로 내 눈 속을 파고들었다. 지금 나는 그 여자와 같이 살고 있다. 그 낙타가 내게 가르쳐준 비밀이 하나 있다. “잡초의 사막을 견뎌내는 것은 낙타”이며 “아프게 피지 않는 꽃은 없다”(도종환, <꽃>)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종교학도 혹은 일본학도로서 걸어온 지난날의 발자국은 모두 구름과 잡초와 낙타의 기억이 찍어낸 흔적들이었다. 그런데 그것들은 기이하게도 “나는 아직 한 번도 잡초가 되어 본 적이 없어. 앞으로 언젠가 한 번쯤은 꼭 잡초의 꽃을 피워야겠다.”는 자의식을 수반하고 있었다. 어떤 점쟁이가 내게 “벼랑끝 바위 위에 어쩌다 핀 꽃”이라는 꽤 시적인 점괘를 화두처럼 던져준 적이 있었는데, 그게 ‘잡초의 꽃’을 가리킨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종교학개론은 종교 정의란 종교학자의 수만큼 존재한다는 말로 시작된다. 천(千)의 얼굴의 가면을 쓰고 있는 종교의 목록에 노란 채송화, 우물, 왕잠자리, 고래, 구름, 잡초, 낙타 따위의 이름이 끼어든다 해도 그리 이상할 것은 없지 않을까? 우문(愚問)의 사족이라 해도 할 말은 없다.

 

 

 

 

 

 

 

 

 


박규태_
한양대학교 교수
저서로 《현대일본의 순례문화》,《일본재발견》,《일본정신분석》,《일본 신사의 역사와 신앙》,《포스트-옴시대 일본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일본정신의 풍경》 등이 있고, 역서로 《일본문화사》,《국화와 칼》,《황금가지》,《세계종교사상사 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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