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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754호-좀비는 우리들이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2. 11. 22. 18:28

좀비는 우리들이다


 news letter No.754 2022/11/22

 

 

                

     “얼핏 보면 좀비는 인간과 정반대인 것 같다. 그들이 ‘살아있는 죽은 자’(the living dead)라면, 우리는 ‘죽어가는 산자’(the dying alive)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비는 또한 ‘우리’이다. 비록 썩어가지만, 그들은 우리처럼 보이고, 우리처럼 옷을 입고, 가끔은 우리처럼 행동한다.” 앞의 구절은 본 글의 제목을 빌린 저서 Zombies Are Us: Essays on the Humanity of the Walking Dead (eds. by Christopher M. Moreman & Cory James Rushton, London: McFarland, 2011)의 소개글 일부이다. 왜 갑자기 좀비인가? 여기에는 물론 지난 주말 ‘괴물의 종교문화’를 주제로 개최된 종교문화연구소의 하반기 정기 심포지엄에 참여하면서 그동안 심드렁했던 필자의 학문적 호기심이 오랜만에 자극을 받았고, 무엇보다 심포지엄에서 ‘좀비’와 관련된 발표에 대해 논평을 해야 했기에, 그 여운을 좀 더 간직하고 싶어서였다고나 할까. 그러나 사실은 중국의 코로나 상황과 관련하여 미디어를 통해 접한 여러 영상이 그동안 스쳐 간 좀비 영화들의 일부 장면들과 오버랩되면서 필자를 최근 매우 불편하게 하였고 그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중국 허난성 정저우시에 입주해 있는 애플 아이폰을 위탁생산하는 대만에 본사를 둔 폭스콘 공장에서 직원들이 과도한 코로나19 방역조치에 항의하여 폐쇄된 건물을 대거 탈주하면서 떼를 지어 어두운 도로를 지나는 모습들은 흡사 좀비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해당 유튜브 동영상에 달린 “중국 보면 지옥에 있는 것 같다.”라는 댓글은 코로나라는 현대사회의 역병이 가져온 집단적 히스테리와 광기 그리고 종말론적 사회적 분위기를 시사하고 있다.

    근래 들어 좀비를 소재로 한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이 범람하고 있는 현상은 좀비 이미지가 현대사회가 맞닥뜨린 다양한 위험성, 공포, 무력감 등을 담을 수 있는 효과적인 메타포(은유)로 대중문화에서 기능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런 맥락에서 좀비물은 전쟁이나 자연재해, 전염병 등의 거대 재해나 우주적/초자연적 사건으로 문명과 인류가 멸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아포칼립스물(apocalyptic fiction)과 문명이 멸망한 후의 세계를 그리는 포스트-아포칼립스물(post-apocalyptic fiction)의 하위 장르로 분류된다. 혹자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말 일본에 원자폭탄 투하 그리고 근래에는 2001년 9.11 테러와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선언 이후 구체화된 집단 살해/학살에 대한 공포가 이러한 새로운 종말론적 장르물의 유행에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좀비 서사에는 여러 종교에서와같이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이 좀비를 이기며 종말에서 살아남고, 좀비가 창궐한 것에 대해서도 명확한 원인이 제시된다. 이렇듯 좀비물은 여러 종교적 요소를 내포하지만 이들 최후 생존자들의 상당수는 도덕적 미덕의 소유자가 아니라 가혹하고 잔인하며 이기적이라는 점에서 적자생존의 모델을 보여주며, 시체가 되살아난 이유로도 대부분 하느님의 신판과 같은 초자연적/신적 원인이 아닌 과학적인 설명 – 바이러스 감염, 방사선 확산 등 – 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철저하게 세속적 세계관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죽었으나 죽지 않고 움직이는 경계적 존재로서 좀비가 내재하고 있는 역설적 속성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분적 사고체계 - 삶과 죽음, 자신과 타자, 개성과 집단성, 인간과 동물, 주인과 노예 등 – 에 균열을 시도한다. 즉 움직이는 시체인 좀비는 죽음과 삶에 걸쳐있는, 살점과 피를 뿌리며 계속 부패하며, 살아있는 사람의 육체에 게걸스러운 존재로 혐오와 구토의 대상 즉 아브젝트(abject) 이다. 그러나 – 모든 전형적인 아브젝트가 그렇듯이 - 단순히 타자화시켜 밀어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군상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키며 그 불완전성과 한계성을 인식시킨다.

     무엇보다 좀비의 이미지와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좀비는 개체가 아닌 떼나 무리로 다루어지면서 몰개성적 집단성을 표상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커다란 공포를 일으키는 것은 아마도 현대인들이 가장 두려운 병으로 치매를 드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러한 공포는 특히 필자와 같이 폐소공포증을 갖고 있거나 군중 속에 섞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온다. 중국의 코로나 사태에서 당국의 대규모 봉쇄조치나 이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은 군중의 축적된 (운동)에너지가 강제적으로 가둬지거나 그 반대로 폭발적으로 유출되는 결과를 가져오며 이는 쉽게 좀비 집단의 통제하기 어려운 (비)활성화된 힘을 연상시킨다. 특히 현대사회와 같이 혼술, 혼자 스포츠 관람, 데이트앱 사용이 일상화되고 일인가구, 플랫폼 일자리, 고독사 등이 증가하는 ‘개인화’ 혹은 ‘탈사회화’가 심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 당국이 코로나 사태 해결이라는 집단의 공동 목표를 위해서 실행하고 있는 일련의 몰 개인화 정책은 지옥문을 여는 공포스러운 좀비물을 연상시킨다.

     물론 좀비의 이미지는 처음부터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 새롭게 구축된 것이다. ‘좀비’(Zombi)라는 말은 17세기 처음 카리브지역에서 등장하며, 여기에는 (사탕수수) 농장 일을 위해 노예무역을 통해 아프리카에서 이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흑인들의 문화가 한몫을 한다. 좀비는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와 아이티에서 원래 영혼이나 귀신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 사용되었으나, 점점 주술사가 마술이나 최면으로 희생자를 죽은 자처럼 만든 후 다시 살려내 노예로 부려 먹는다는 믿음과 결합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 좀비는 “자신의 의지도 이름도 없이, 끝없는 노동의 살아있는 죽음에 갇힌” 아프리카 노예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Roger Luckhurst, “Where do zombies come from?,” BBC Culture, 2015.09.01.) 백인 좀비가 등장한 것은 미국의 아이티 점령이 끝날 무렵인 1932년으로, 1920년대와 30년대 미국의 싸구려 잡지에는 복수심에 불타는 시체가 무덤에서 기어 나와 살인자를 쫓는 이야기로 점차 가득 차게 된다. 이렇듯 한때 비물질적인 유령이었던 좀비는 썩어가는 시체의 물리적인 형태를 얻게 된다.(위의 글) 이후 어떻게 좀비가 할리우드에서 대중문화의 중요한 소재로 새롭게 구축되는가는 여기서 더는 논의하지 않겠다.

    대신 마지막으로 좀비가 동시대에 더는 죽을 때까지 농장에서 일하는 식민지 흑인 노예가 아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속에서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는 – 특히 중국, 한국, 일본 - 노동자의 메타포로 사용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자 한다. 앞에 올려놓은 폭스콘의 정저우 공장과 이를 탈출하는 중국 노동자들의 사진은 그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정저우의 폭스콘은 세계 최대 아이폰 제조 공장으로 직원 30만 명 대부분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폐쇄루프 제조방식을 택하고 있다. 해당 기업과 관련하여 2010년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것은 18명의 직원이 연속으로 투신자살을 한 사건으로 이들은 대부분 17세에서 25세 사이로, 이 중 14명이 사망했고, 4명은 크게 다치고 겨우 살아남았다. 이후 회사는 기숙사 등 많은 공장 내 건물에 자살 방지용 그물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살아남은 한 폭스콘 노동자의 “우리가 살아왔다는 것을 증언하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것뿐입니다.”라는 발언으로,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절망에 빠졌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음을 말한다.(노동시간센터, 「신자유주의 시대의 과로자살 – 사례 비교 연구」 p. 98, 2018.8.31.) 그 배경을 좀 더 들여다보면 폭스콘은 제품정보가 누출될 것을 우려하여 각각의 공장에 보안을 엄격하게 유지하며, 이를 위해 직원들은 업무 시간에 거의 말을 할 수 없으며, 또한 거대 기지 안에 생산공장 외에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시설 – 기숙사, 식당, 병원, 잡화점, 은행, 소방서 등 – 을 설치하여 직원들이 외부로 나가지 않고 3교대로 쉴 틈 없이 각종 전자제품을 생산하게 하고 있다. 여기서 개개인의 기호, 취미, 창의성은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노동자는 기계로 전락하게 되며, 이런 맥락에서 철저한 인간 소외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앞의 글, p. 98f) 특히 코로나 사태로 고강도 건물폐쇄 조치가 행해지면서 더는 ‘감금’을 참지 못한 많은 노동자가 집단 탈출을 한 것이다. 한 22세 폭스콘 노동자는“기숙사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라며 “공장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플라스틱과 금속으로 된 울타리를 뛰어 넘었다”라고 말하면서, “나는 절대 폭스콘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그곳은 인간성이 없는 곳”이라고 전했다고 한다.(「그곳은 인간성이 없다」, 『경향신문』 2022.10.31.) 이런 맥락에서 좀비 얘기와 (비)인간성 논의는 결국 서로 연결되며, 이는 좀비가 인간을 그 ‘원조’로 한다는 점에서 놀랄 결말도 아닐 것이다.

 

 

 

 

 

 

 

 

 

 




 


우혜란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논문으로 <한국의 현 종교지원정책과 문화자본주의>, <한국 불교계의 ‘마음치유’ 사업과 종교영역의 재편성>, <한국 신종교의 조직구조>, 〈현대사회 성물(聖物)의 유통방식에 대하여>, 공저로는 <한국사회와 종교학>, 〈신자유주의 사회의 종교를 묻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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