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더: 죽음의 기억, 기억의 죽음
news letter No.762 2023/1/17
새학기에 의대생을 대상으로 하는 죽음학 수업을 준비중이다. 수업시간에 활용할 자료를 찾다가 2022년 10월 14일에 방영된 티빙(TVING) 오리지널 시리즈 <욘더>를 알게 되었다. 총 6화 드라마인데 편당 30분 정도라 모두 합쳐도 긴 영화 한 편 정도의 분량이다. 단숨에 볼 수 있었다. 이준익 감독이 연출을, 신하균과 한지민이 주연을 맡았다.
“2032(년) 새로운 안락사법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는 사회적 시스템이 실행되었다.” 1화 첫 장면에 등장하는 시대적 배경 설명이다. 남자주인공(이하 남주)과 여자주인공(이하 여주)은 부부다. 38세인 여주는 심장암으로 죽어간다. 드라마는 여주가 안락사로 죽음을 맞이하고 남주가 홀로 남겨지는 것에서 시작한다. “내가 없어지는 건 나에게서 없어지는 게 아니야. (남주: 무슨소리야?) 당신으로부터 없어지는 거지. 난 그게 슬퍼.” 홀로 남겨져 자신의 사라짐을 슬퍼할 남편을 위해 여주는 숨지기 직전 바이앤바이(BY N BY)의 운영자인 세이렌(이정은 분)을 만나 자신의 기억을 저장한다. “(남주) 추모 사이트인가요? (세이렌) 아니오. 추모사이트 같은 사진이나 기록이 아닙니다. (남주) 그럼 뭐죠? (세이렌) 그녀 자신이 간직하고 싶은 기억이죠.”
남주의 직업은 인터뷰 전문기자다. 아내의 장례를 치른 몇 시간 후 언론사 편집국장으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들어온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뇌과학자 닥터K(정진영 분)가 과학자인지 사이비 교주인지 밝혀달라는 것이다. 함께 전송된 광고 영상에서 닥터K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죽음을 언제까지 종교에 기댈 겁니까? 그 죽음의 문제를 과학이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할까요? Why not design your death? 이제 당신의 죽음을 멋지게 디자인할 수 있습니다.”
아내를 보낸 슬픔과 외로움을 달래며 편집국장의 요청을 거듭 무시하던 남주에게 어느날 아침 영상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여보, 나야. 많이 놀랬지? 음… 설명하기 어려운데, 나… 여기 있어.” 망자를 이용한 사기성 스펨메일이라 여기고 남주는 메일을 삭제한다. 그런데 또 다른 메일이 도착한다. “여보, 나야. 죽기 전에 자세히 얘기하지 못해서 미안해. 나, 여기 있어. 여기로 떠나온 거야. 여기… 기억나?” 영상 속 장소가 아내와 자주 캠핑 갔던 숲인 것을 알자, 남주는 인공지능에게 묻는다. “이 메일 어디서 온거야? (인공지능) 바이앤바이 닷컴 계정에서 보낸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리고 열어본 계정 정보의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You design your life, Why not design your death?” 당신의 삶을 디자인하면서 죽음은 왜 디자인하지 않는가? 아내의 바이앤바이 접속 기록을 찾아보던 중 세 번째 메일이 도착한다. “나, 여기 있어. 여기로 떠나온 거야. 여보, 날 만나고 싶으면 여기로 와 줘.” 이내 지도가 표시되고 바이앤바이가 도착지로 설정된다.
드라마의 요지를 말하자면(스포일러 주의), 드라마는 바이앤바이라는 기업이 운영하는 가상공간 욘더에 대한 이야기이다. 욘더(yonder)는 저기 혹은 저편이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인데, 드라마에서는 망자의 기억이 모여 사는 사이버 가상공간이다. 욘더에서는 망자의 기억이 단순히 저장만 되는 것이 아니라 욘더에 모인 여러 기억들을 기초로 현실 세계와 거의 동일한 가상세계가 창조된다. 그 곳에서 기억들을 통해 재생된 사람들은 고통도 없이 원하는 바를 영원토록 누릴 수 있다. 욘더는 가상세계 천국(Cyberspace Heaven)인 것이다.
드라마는 대체로 남주의 관점에서 전개된다. 남주는 죽은 아내를 기억하고 싶어한다. 아내를 다시 만나 느끼고 만지고 싶어한다. 그래서 마침내 스스로 욘더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이 세상에서는 그것을 죽음이라 부른다. 남주는 욘더로 들어가 그곳에 이미 살고 있는 아내를 만난다. 아내와 함께 갓난 아기도 있다. 아내의 기억이 창조해 낸 욘더에 실재하는 아기다. 욘더에서 남주와 여주는 아기와 함께 아무런 고통도 염려도 없이 한동안 평온한 삶을 누린다.
티빙 드라마 <욘더>의 원작은 김장환의 소설 《굿바이, 욘더》이다. 이 소설은 2011년에 ‘제4회 뉴웨이브 문학상’을 받았다. 드라마의 큰 줄거리는 이 소설을 따르고 있지만, 소설의 내용과 인물 설정이 다소 축약되고 압축되었다. 근미래상에 대한 묘사도 드라마보다 소설이 훨씬 세부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설에서는 욘더가 이중적으로 묘사된다. 인공지능 아바타를 통해 현실 세계와 접속하는 일차 가상공간이 있고, 욘더는 그 일차 가상공간과 별개로 보다 심층적인 차원에서 일종의 통신 규약 형태로 존재한다. 이는 마치 신비주의 종교가 대중적인 제도종교 심층에 은밀하게 존재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실제로 소설은 적극적으로 이런 표층대중종교-심층신비종교의 구도를 따른다. 욘더라는 은밀한 공간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아무나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믿는 자, 믿음이 있는 자에게만 욘더는 실재한다. 드라마 4화에서 최한기 사장은 이미 아내와 자녀들이 욘더에 있다고 확신하고 가족과 함께 하기로 결심하며 이렇게 말한다. “욘더같은 세상은 없고, 이 모든 게 황당한 거짓일 수 있겠죠. 결국 믿음의 문제 아닐까요. 난 여기 남아 있는 게 없으니 잃을 것도 없습니다.” 이 견해에 비판적이던 남주 역시 결국에는 아내와 함께 하기로 선택한다.
한동안 이들은 행복했다. 모든 것이 떠나온 세상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모든 것이 평온할 뿐. 게다가 그토록 원하던 아이까지 함께였다. 그런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지 알 수 없는 어느 때 드라마 6화에서 여주는 놀란 눈으로 남주에게 말한다. “여보, 지효가 이상해. (남주: 왜?) 어, 지효 몸이…자라지 않아. 내가 아무리 먹이고 재워도 그대로잖아. 애가 더 무거워지지도 않고 더 자라지도 않아.” 이런 깨달음이 있은 후 여주는 혼돈에 빠진다. 소설에서는 이 상황을 보다 자세히 묘사한다. “당신도 마찬가지 느낌이야? 저 노을을 바라보면 나는 시간을 잊어버려. 아주 천천히 흐른 건지 아니면 아주 빨리 흘러버리는 건지. 이곳 욘더에 없는 것이 바로 그 시간이야. 시계에는 시간이 표시되지만.”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래. 당신도 나도 이미 죽었지. 그리고 우리 지효……. 저 아인 처음부터 죽어 있었어. 그러니까 여기 욘더는 사실 살아있는 것이 아니야. 영원한 죽음이지.” 당신이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는 남주의 반문에 여주는 “믿은 것이 아니라 믿고 싶었던 거”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런 영원이 싫어.”1)
남주도 욘더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하고 마침내 닥터K와 논쟁한다. 욘더의 창시자, 가상세계 천국의 발명자 닥터K가 말한다. “욘더가 어떻게 천국이 될 수 있는지 모르시는 거예요. 욘더는 근본적으로 모두의 천국이 아닙니다. 당신의 천국이지.” 오리건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는 김장환 원작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닥터K가 계속 말한다. “지금 이 세계는 당신의 세계입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물들, 모든 사람들…… 저 자신을 포함해서 말이죠. 선생님은 욘더가 저 바깥에 존재하고 당신이 그 공간 안에 활동하고 있다고 믿죠. 하지만 사실 욘더는 선생님의 정신에만 존재하는 세계예요. 선생님의 외부에 욘더란 공간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2)
욘더가 영원한 고립이라 판단한 남주와 여주는 마침내 결심한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이 더 소중해. 매 순간이 소중한 것은 지나간 것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야.” 결국 둘은 욘더에서의 탈출을 시도한다. 욘더에서의 탈출 방법은 드라마에서는 물약을 먹는 것으로, 소설에서는 ‘이걸 원하지 않아’를 세 번 외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들은 마침내 오블리비언(oblivion), 기억의 죽음을 택한다.
<욘더>의 아이디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유사한 내용이 다른 영화나 소설로 존재한다. 예컨대 매트릭스, 공각기동대, 에반게리온, 레지던트이블, 로보캅, 인셉션 등에서 인간복제 혹은 기억의 저장에 대한 유사한 아이디어와 세계관을 발견할 수 있다. <욘더>의 구성이 치밀한 것도 아니다. 욘더의 실체에 대해서는 찬찬히 따져보면 허점이 발견된다. 욘더에서는 무엇이든지 가능하다고 하면서 왜 시간은 현실 세계처럼 흐르도록 설정하지 않았을까. 왜 욘더에서는 성장이라는 요소가 없는 것일까. 작가가 설정한 규약, 즉 욘더에서는 과거의 기억만을 유지한다는 것과 그것을 토대로 실제같은 가상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은 이미 스스로 한계를 내포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실상 이 설정 자체는 작가의 의도이기도 하다. 원작자의 의도는 명확하다. 욘더와 같은 가상공간 천국보다는 지금 여기 이 세상의 유한한 삶이 더 의미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작의 제목이 《굿바이, 욘더》라는 생각이 든다.
<욘더>의 상상력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몸과 기억이 분리될 수 있다는 가정에 근거한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전제에 대해 부정적이다. 게다가 나의 뇌로부터 기억을 분리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나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기억이 분리된다면 결국 나라는 정체성이 수없이 복제될 수 있다는 의미인데, 그 모든 존재가 나일 수 있을까. 나라는 정체성과 관련하여 몸에서 기억만을 분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기억은 나의 몸과 함께 있을 때 나의 기억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욘더, 드라마와 소설을 보고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욘더>를 죽음학 수업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활용한다면 어떤 주제와 어느 정도의 분량으로 다루어야 할지도 고민이다. 다만 죽음이 인간에게 갖는 의미를 다룰 때 참조할 수는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글을 쓰던 중에 대학시절 동아리 활동을 함께 했던 지인의 부고를 접했다. 몇 년 전 코로나가 터진 직후 어느 교회에서 아주 오랜만에 만나 식사를 했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십여 년 전 위암수술을 받고 건강해진 줄 알았고 그날도 건강해 보였다. 그래서 언제든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 안심했다. 그런데 부고라니. 갑작스런 소식에 마음이 어지럽다. 욘더가 있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사후세계가 있다면 다시 만나 식사할 수 있을까. 현재의 나는 그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사후세계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의심한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 중 택하라면 믿지 않는다가 현재 나의 대답이다. 하지만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다시 만나 함께 식사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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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장환, 《굿바이, 욘더》, 김영사, 2022, 322-323쪽.
2) 김장환, 《굿바이, 욘더》, 김영사, 2022, 329-330쪽.
김재명_
건양의대 의료인문학교실 조교수
최근 논문으로 <종교학과 의료인문학>, <한국개신교의 ‘생명평화’ 운동과 사상>, <보건의료에서의 종교와 세속>, 저서로 《죽음학교실》 (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