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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사랑과 카타르시스의 다른 이름인가
 

news letter No.767 2023/2/28

 



        



     최근 르네 지라르에 관한 글을 써야 할 일이 있어 오랫동안 먼지 쌓인 『폭력과 성스러움』을 다시 꺼내 읽으면서 오만가지 상념에 빠져들었다. 불문학자 김현이라는 탁월한 독해자로 인해 이미 30여 년 전에 한국의 지라르 읽기는 상당한 수준에 달해 있었다. 자신의 지라르 연구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힌 김현은 “폭력이 과연 어디까지 합리화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우리에게 남겨 놓았다. 주지하듯이 지라르 사상을 관통하는 주제가 바로 폭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좋은 폭력’으로 ‘나쁜 폭력’을 막는다는 이른바 ‘희생양 메커니즘’이 바로 『폭력과 성스러움』의 핵심어이다.

     “욕망은 폭력을 낳고 폭력은 종교를 낳고 종교는 문화를 낳는다.”라는 지라르적 기원론의 모든 계기에는 짝패를 만들어내는 모방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갈수록 욕쟁이가 되어 있는 자신을 보는 일도 이젠 좀 식상해졌지만, 욕하면서 닮아간다는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오늘날 모두가 폭력의 무한경쟁적 짝패로 화해버린 듯한 한국사회의 집단적 현실은 곧 성찰의 대상인 나 자신의 현실이기도 했다.

    혹 사랑과 폭력도 짝패가 아닐까 하는 의문은 우리를 딜레마의 늪으로 빠지게 한다. 사랑과 증오라는 근본적인 두 힘의 교대를 일종의 순환운동으로 이해한 엠페도클레스에게 공감해서였을까, 지라르는 “사랑은 폭력과 마찬가지로 차이를 무화시킨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차이도 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폭력은 사랑과 폭력의 차이를 정말로 없애며 그 차이를 폭력적인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결국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은폐해 버린다. 이런 의미에서 폭력은 사랑과 폭력의 참된 차이를 없애버림과 동시에 지킨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는 폭력이냐 사랑이냐의 선택의 기로가 언제나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지라르의 호모 미메티쿠스(모방하는 인간)가 호모 렐리기오수스(종교적 인간)나 호모 루덴스(유희하는 인간)와 ‘성과 속의 양의성’이라는 공유점을 가진다면, 인류학자 부르케르트(Walter Burkert)가 말하는 호모 네칸스(살해하는 인간)와는 ‘폭력의 양의성’이라는 공유점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 호모 미메티쿠스에게 폭력과 그 모방적 전염성이 초래하는 파괴적 효과를 막는 길은 희생양 메커니즘에 의지하는 것 또는 모든 폭력을 포기하는 것, 이 두 가지 방법밖에 없어 보인다.

    하지만 첫 번째 길은 그 효용성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폭력이 철저히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려서 더 이상 그것을 성화하여 추방할 수 없는 세상, “역설과 모순이 일차적인 현실이 된” 그런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라르는 『세상의 처음부터 감추어져 있는 것』의 결론에서 “지금 우리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길은 단 한 사람도 배제하는 일 없이 폭력에 일체 기대지 않는 화해의 길”이라고 말한다. 또한 『희생양』의 마지막 결론에서는 “우리가 서로를 용서해야 할 시간이 왔다. 기다리고만 있기에는 더 이상 시간이 없다.”고 호소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폭력을 포기하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인가? 지라르는 그리스도가 사랑의 진리를 통해 스스로 희생양이 됨으로써 성스러운 폭력의 허구성을 고발함과 동시에 그런 폭력을 만들어낸 희생양 메커니즘을 종식시켰다고 보았다. 거기서 그리스도의 죄 없음은 사랑을 모방 욕망의 반대편에 위치시키는 것 즉 사랑의 충실을 의미하게 되었고, 그것은 ‘절대적으로’ 폭력에 대항하는 사랑으로 각인되었다. 모방 욕망에서 출발한 지라르는 욕망을 부정하는 진리로서 사랑을 이해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종류의 폭력이 없는 상태”로 평화를 정의내린 ‘폭력론=평화론’의 제창자 요한 갈퉁을 제외한다면 비기독교인들 가운데 과연 이와 같은 지라르의 비전을 받아들일 이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어쩌면 “희생제의화될 수 없는”, 따라서 희생양 메커니즘에서 벗어나 있는 호모 사케르(성스러운 인간)의 관점에 입각한 또 다른 길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고대 로마법에서 호모 사케르는 신에게 바쳐질 수 없고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해도 죽인 자가 벌을 받지 않는 존재였다. 아감벤에 따르면 생명과 성스러움 사이에는 언제나 정치성이 개입된다. 그 자체로 신성한 성스러움은 없으며, 법질서에 종속된 모든 사람은 항상 정치적 삶으로부터 포함되거나 배제될 가능성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호모 사케르는 종교적 영역과 법적인 영역 둘 다에 포함된 동시에 둘 다로부터 배제되어 있다. 그는 인간 세계도 신적 세계도 아닌 중간 지대에 놓인 벌거벗은 생명이다.

    이와 같은 호모 사케르야말로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모순에 의해서만 정의가 가능한 인간”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예컨대 신화적 폭력(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을 종식시키는 신적 폭력(법파괴적 폭력)의 가능성을 역설한 발터 벤야민, 이 신적 폭력의 현대적 변주로서 폭력의 반대는 비폭력이 아니라 권력이라고 주장한 한나 아렌트와 “순수한 폭력의 영역, 그러니까 법 바깥의 영역, 법제정적이지도 법보존적이지도 않은 이 폭력의 영역은 사랑의 영역”이라고 역설한 지젝의 폭력론이 혹 우리에게 어떤 카타르시스적인 위로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카타르시스 개념을 제시한다. 카타르시스는 희생제의의 인간 제물을 뜻하는 카타르마(katharma) 또는 제물 일반을 가리키는 카타로스(katharos)에서 비롯된 말인데, 그 의미가 의학적인 약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카타르시스의 약은 흔히 해당 병과 똑같은 성질을 가진 것으로 병 증세를 더 악화시켜 자신과 함께 병의 원인들을 추방하도록 유발함으로써 병에서 회복되게 해 준다고 여겨진다. 이는 고대 아테네의 희생제물이었던 인간 파르마코스가 독과 약을 동시에 의미하는 파르마콘이라는 말로 변화한 것을 연상시킨다.

    카타르시스는 현대의 면역이나 예방접종과 아주 닮았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사회라는 신체에다 약간의 폭력을 주입시켜 그 사회가 폭력에 저항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희생제의의 기능과도 매우 흡사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까지 다섯 차례나 받은 코로나19 접종은 희생제의의 반복과 일치하는 셈이다. 하지만 작은 폭력으로 큰 폭력을 막는다는 것이 이런 예방접종처럼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어쨌거나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카타르시스를 필요로 하지 않을 터이니,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카타르시스가 곧 사랑은 아닌 것 같다.

 

 

 

 

 



 


박규태_
한양대학교 교수
저서로 《현대일본의 순례문화》,《일본재발견》,《일본정신분석》,《일본 신사의 역사와 신앙》,《포스트-옴시대 일본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일본정신의 풍경》 등이 있고, 역서로 《일본문화사》,《국화와 칼》,《황금가지》,《세계종교사상사 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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