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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조고각하(照顧脚下)
news letter No.803 2023/11/7
근래 뉴스를 보면 가슴 아픈 장면들이 사방에 넘친다. 마치 지구 종말을 그린 SF(science fiction) 영화처럼, 예전에 경험한 적 없는 자연재해가 도처에서 일어날 뿐만 아니라, 참혹한 전장(戰場)의 소식이 끊임없이 들려 온다. 인간들이 도모하는 일 중에서 가장 어리석고 사악(邪惡)한 짓은 바로 전쟁일 것이다. 태어나서 불과 몇 해를 살지도 못한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살기(殺氣) 때문에 다치고 목숨을 잃는 것, 상상만으로도 죄(罪)이다. 전쟁은 대개가 종교와 민족을 빙자해 벌어지는데, 지구촌에서 거창하게 잘나가는 여타 종교계들이 당면한 살육(殺戮) 의 죄업(罪業)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끊임없이 유려(流麗)하던 ‘사랑’과 ‘자비’의 말씀들은 다 어디로 증발하였는가.
만약 내가 올바른 불교인이라면, 이 판국에 나만의 안락(安樂) 속으로 기어들어가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 건건(件件)이 어느 때보다도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시절의 한 가운데서 나는 말할 수 없이 무력하다. 하릴없이 늙은 몸과 마음의 무기력을 덜어보고자, 그저 날마다 맨발로 산속을 걸을 뿐이다. 맨발로 걸으니, 눈에 띄지 않았던 물체들에 가끔 발이 찔리기도 하고 잔잔한 돌멩이에도 발바닥이 아프다. 그러다가 파상풍에 걸릴 수 있다고, 가족은 내게 예방주사를 맞으라고 조언하지만 그럴 생각이 없다. 그리 쉽게 돌부리에 차이거나 찍히는 건 나의 발걸음이 평생 신발에 의존해온 탓일 것 같다. 여느 때처럼 내가 운동화를 신고 산에 올랐다면, 똑같은 그 길에서도 무심히 잘 밟고[짓밟고] 지나쳤을 것이다.
맨발 걷기의 경험이 있는 독자들은 단박에 수긍하실 것 같다. 산길에는 매우 다양한 물질과 물체가 있음을 새삼스레 알게 된다. 가지가지의 새와 벌레들, 상수리 도토리와 깍정이, 알밤과 밤송이 가시, 살았거나 죽었거나, 둥그렇거나 길쭉하거나, 크거나 작거나, 마르거나 축축하거나, 부드럽거나 딱딱하거나, 서늘하거나 따스하거나, 맨발바닥의 촉감 외에도 눈[色] · 귀[聲] · 코[香] 등에서 감각이 다양하게 열리는 것을 경험한다. 숲속에서 그 길은 어제의 그 길이 아니라, 매일 새로운 길임을 발견한다. 그 무엇보다 뜻밖인 것은, 하찮게 여기던 풀벌레나 돌부리조차도 나에게 깜짝 놀랄 만한 아픔과 두려움을 줄 수 있지만, 맨발의 나는 숲속의 그들에게 종래의 ‘인간’이라는 위세(威勢) 따위를 부릴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저 내 발아래를 살피는 걸음걸음이 겸허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으니, 불교의 선가(禪家)에서 유래한 조고각하(照顧脚下)를 어렴풋이나마 익히는 셈이다.
그래서 추정하자면, 사람이 맨발로는 아주 작은 벌레일지라도 짓밟아버리기가 쉽지 않은데, 어느 때부터인가, 튼튼한 신발을 신게 됨으로써 그 발밑이 둔감하게 되었고 그 발밑의 땅을 포함한 여러 존재들을 감히 무시하게 된 것은 아닌가. 더 멀리 나가서 무참히 벌어진 전쟁들도 그 실질적 계기는 어떤 부류의 인간들이 권력과 부(富)로 제작한 모종의 부도체(不導體) 신발을 신은 탓에, 뭇 생명의 존엄성을 짓밟고도 너무나 둔감하고 무지하기 때문에, 잔혹한 살상(殺傷)을 계속 도발하는 게 아닌가. 간간이 우리 사회에서도 정체 모를 마법의 신발이라도 신은 듯,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고통을 초래하는 자들이 있는 것 같은데 수시로 그들에게서 ‘불감증’ 신발을 벗겨주고 맨발의 조고각하를 깨우쳐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신발을 벗겨주자”는 표현 때문에 혹시 누군가 권세(權勢)의 ‘박탈’만을 상상할까 봐 부연한다. 신발을 벗는다고 해서 누구나 무력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경험을 확장하고 역량을 심화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애당초 만물만사(萬物萬事) 위에 군림할 역량이 특정인에게 따로 있을 리도 없고, 상징적 의미에서 ‘신발’이란 오직 자기 자신에게 맞춰진 하나의 틀이므로 그 틀을 넘어서는 경험이 우리들 피차에게 유익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소위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적 지위와 권력이 인간사회에서 선망(羨望)되는 가치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 사용의 옳고 그름에 대한 과보(果報)가 엄연히 있으므로 부단히 자기를 점검하며 자신의 발자취를 돌아봐야 할 일이다.
또 한편으로 보니, 우리나라 문화재청이 조선왕릉 입구마다 설치한 안내판에서 “왕릉과 산책로를 포함한 경내 전 지역이 유교와 그 예법에 근거하여 조성된 공간이므로 맨발 보행은 엄격히 금지한다”(한겨레신문 ‘23. 09. 21)고 전한다. ‘궁 · 능 관람 등에 관한 규정’ 중 ‘복장’에 관련된 문화재청의 그런 해석과 달리, 나로서는 왕릉에서 맨발은 무례나 결례가 아니라 오히려 곡진(曲盡)한 정례(情禮)로 주장하고 싶다. 단순한 방문객이라면 굳이 봉분(封墳) 위까지 올라가 걷는 일은 없을 테지만 설령 봉분을 포함해서 그 주변을 걷는다 해도, 신발이 아니라 맨발로 걸어야만 돌아가신 주인공과 그 주위 자연물에 좀 더 밀접하고 지극한 마음이 생길 것으로 본다. 걷는 사람의 발은 온몸과 대지와의 소통로[窓]인데 그 창문에다 신발과 같은 가림막을 반드시 세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요컨대, 우선은 사회 각 분야 고위층에게 ‘맨발 의무기간’을 공식화하기, 왕릉 입구마다 ‘맨발 금지’ 대신에 ‘맨발 필수’로 입장하라는 안내문을 붙이기, 유명하고 비싼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걷기를 서로 격려하기. 그리하여 우리 발아래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존재하는지를 알아차리고 무지몽매-무참(無慚)하게 짓밟지 않고, 부디 만물만사와 더불어 경외(敬畏)의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꿈꾸어본다.
이혜숙_
계간 불교평론 편집위원장, 국제참여불교네트웤(INEB) 집행위원
논문으로 <종교사회복지의 권력화에 대한 고찰>, <한국 종교계의 정치적 이념성향 연구를 위한 제언>, <시민사회 공론장 확립을 위한 불교계 역할>, <구조적 폭력과 분노, 그 불교적 대응>등이 있고, 저서로 《아시아의 종교분쟁과 평화》(공저), 《임상사회복지이론》(공저),《종교사회복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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