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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교문화의 서술을 위해 몇 가지

유념하고 싶은 것들(2)

2011.6.7


그렇다면 이제 한국종교문화 또는 한국종교사 서술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제까지 일반적으로 한국종교문화의 역사적 서술은 무속, 또는 이른바 샤머니즘을 기층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이에 이어 불교, 도교, 유교, 그리스도교 등이 자리를 잡았으며, 이와 더불어 민족종교라고 할 수 있는 여러 새로운 종교나 종교운동이 동학의 출현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등장했던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자체가 이미 ‘종교이후의 종교’의 자리에서 우리의 종교사를 조망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이 자리에서는 개개 종교사의 서술의 종합이 한국종교사의 서술이라는 것을 당위적인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이때 유념해야 할 것은 이렇게 기술된 종교들을 각기 별개로 놓은 채 단일한 저술로 묶는다고 해서 그것이 한국의 종교사일 수는 없다고 하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개개 종교가 각기 책의 장(章)처럼 독립하여 병존하는 것이 실제 종교의 현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목해야 할 현상은 각개 종교의 구조적 중첩과 그 중첩이 낳는 개개 종교의 문화적 변용의 실제가 개개 종교의 기술 안에 수용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우리는 한국의 개개 종교사를 서술해야 한다. 개개 종교사는 각 종교의 현존을 기술하고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종교문화를 기술하고 싶은 의도에서 보면 그것은 그 의도와 일치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러한 개개 종교사의 기술이 그르다고 하는 판단이 아니다. 다만 한국종교문화를 기술하고자 하는 자리에서 보면 그러한 작업은 그 본래의 기술의도에 상응하는 방법론적인 적합성을 확보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거칠게 말한다면 개개 종교사의 혼융이 오히려 한국종교문화사의 내용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혼융에의 접근을 현실적으로 타당한 태도일 수 없다는 전제가 우리의 인식태도 안에 이미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다름 아닌 ‘종교이후의 종교’개념이다.

그렇다면 혼융의 문화로서의 한국의 종교문화를 어떻게 서술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부닥친다. 나는 이 계기에서 서두에서 말한 종교개념의 문제로 잠시 되돌아가고자 한다. 간략하게 말한다면 만약 우리가 ‘종교이후의 종교’의 자리에서 이를 시도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종교(religion)’는 ‘교의적인 명료성(doctrinal clarity)’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교이전의 종교’의 자리에서 종교를 이해하면 종교란 그것이 인간의 경험 속에서 얼마나 호소력 있는 해답으로 기능하는가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를 잠정적으로 ‘구원론적 명료성(soteriological clarity)’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연한다면 교의적 명료성은 종교 간의 접변(acculturation)을 승인하지 않는다. 자기 정체성의 유지가 자기 기능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론적 명료성은 종교 간의 접변이 낳은 새로운 사태에 더 주목한다. 정체성의 유지보다는 그 정체성을 결과적으로 운위하게 된 삶의 현장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전자의 자리에서는 개개 종교에 대한 개념적인 나열을 통해 한국의 종교문화가 총체적으로 서술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반해 후자의 자리에서는 실제로 그 당대의 그러한 개개 종교의 공존을 살아가는 경험주체들이 어떤 종교적인 삶을 호흡했을까 하는 것을 개개 종교들의 현존을 전제하면서 서술할 수 있어야 그것이 한국의 종교문화에 대한 온전한 기술일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특정 종교들이 제각기 무엇을 발언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서술하는 것이 교의적 명료성을 준거로 한 기술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통해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서술하는 것이 구원론적 명료성을 준거로 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만약 종교라는 혼란스러운 개념을 피해 ‘구원론(soteriology)’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우리의 서술은 더 효율적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soter라는 말을 그리스도교의 신학적인 개념인 구세주(saviour)로 이해하지 않고 문제에 직면한 인간이 일연의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존재양태의 변화’를 체험하게 된 그 체험이 문화화된 현상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종교이전의 종교’라든지 ‘종교이후의 종교’라는 혼란스러운 개념을 사용하지 않아도 경험주체를 준거로 하여 그 일연의 ‘종교경험’이 표상화된 문화를 서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종교문화를 서술하는 데서도 그 종교문화라는 것이 무엇을 지칭하는 지도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다. 종교문화란 각개 종교가 무엇을 선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준거로 한 구원론적 교의(soteriological doctrine)가 표상화된 현상이 아니라 그로부터 비롯하는 구원론적 풍토(soteriological ethos)가 표상화된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나는 각기 ‘종교문화의 지형학(topography)’, 그리고 ‘종교문화의 기상학(meteorology)’이라고 부르고 싶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종교문화는 개개 종교의 지형을 기술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 그 지형 때문에 일게 되는 기상의 변화를 기술할 때 비로소 그 시도의 일단이라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국종교문화의 지형학이 아니라 기상학을, 즉 ‘한국의 구원론적 교의의 역사를 편집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론적 풍토의 문화와 역사를 기술’해보고 싶었다.

‘종교이전의 종교’라든지 ‘종교이후의 종교’라는 개념 대신에 ‘구원론(soteriology)’이라는 개념어를 선택함으로써 얻은 것은 종교자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경험한 그 경험주체의 경험을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 자리바꿈은 나로 하여금 ‘종교이후의 종교’나 ‘종교이전의 종교’라는 개념이 낳는 혼란을 상당히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한 작업을 통해 각 종교의 개개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는 것을 넘어 그 종교들이 빚는 풍토를 모색하고 기술함으로서 우리의 전통적인 종교경험과 현존하는 종교의식(意識)을 이제까지와는 상당히 다르게 다듬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추적할 수 있는 한국의 역사-문화에 담긴 처음의 종교경험(soteriology)을 ‘하늘-경험’과 ‘힘-지향’이라는 개념으로 다듬을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기존의 무속적 기층종교문화 담론을 지지한 현상들을 그렇게 기술해 보았다. 무속적인 현상이라고 기술되는 어떤 현상이 자기를 드러내는 것을 그렇게 개념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드러나는 현상을 그 나름으로 경험한 경험주체들의 경험내용을 개념화한 것이다. 그러한 자취를 좇아 우리 문화-역사 안에 현존하는 종교들을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은 주장을 시론(試論)으로 제시할 수 있다.

불교는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이야기(mythos)’를, 도교는 ‘우주적인 질서라고 할 수 있을 자연(natura)’을, 유교는 ‘합리적 이성이라고 할 수 있을 원리(logos)’를, 그리스도교는 ‘잠재된 신의 이미지를 드러난 실재이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신적인 존재(deus)’를 ‘하늘-경험’과 ‘힘-지향’ 위에 첨가하면서 그 나름의 독특한 문화를 일구고 있는 것이 한국의 종교문화라고 생각해본 것이다. 한국인들은 그런 중첩된 정서(기상도)를 살면서 스스로의 구원론을 각 종교의 이름으로 (지형도)살고 있는 것이고, 그 삶을 기술하는 것이 한국종교문화사를 다듬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동학 이후의 다양한 민족종교의 발흥은 어쩌면 현대적(정치-경제-문화적) 구원의 실현을 의도한 것으로 보아 이미 중첩된 종교문화의 층위에 또 다른 ‘구원자(soter)’를 첨가한 현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종성 교수가 그의 저서 『동학의 테오프락시: 초기동학 및 후기동학의 사상과 의례』(민속원. 2009)에서 동학을 ‘신 경험의 의례화(theopraxy)’ 또는 ‘사라진 게으른 신(deus otiosus)’ 개념에 대칭되는 ‘현존하는 일하는 신(deus industrius)'으로 묘사하고 있음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역사나 문화를 기술한다는 것이 단순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일을 우리가 설정한 서술범주나 우리가 마련한 개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과 인식에 의하여 준비된 범주와 개념을 가지고 그 적합성 여부에 따라 우리의 현상이 만들어지는 그러한 상황 안에 있었다.

특수성에 의해서 보편성을 간과하는 것은 유치한 나르시시즘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미 이루어진 보편성이라는 권위에 의하여 특수성을 유실당하면서도 이를 주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아의 상실과 다르지 않다. 지금 우리는 그러한 계기에서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다시 살피려는 격한 고민을 하고 있다.


* 이글은 지난 서강대 종교연구소 국제학술대회(5.20-21)의 기조강연을 요약한 글입니다.

정진홍_

본 연구소 이사장, 울산대 석좌교수


mute93@daum.net


주요저서로《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 종교담론의 지성적 공간을 위하여》,《열림과 닫힘: 인문학적 상상을 통한

종교문화 읽기》,《경험과 기억-종교문화의 틈 읽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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